"국가 보전을 위해 국가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 놓고 논쟁도
아리엘 샤론 전총리 특히 집착…과도한 민간 희생 우려 때 지휘관들이 기술적 훼방
(서울=연합뉴스) 윤동영 기자 = 1982년 10월 23일, 지중해 공역 상공에서 F-15기 2대의 조종사들은 레이더에 잡힌 DHC-5 버펄로 수송기에 빠른 속도로 접근, 꼬리표에 적힌 등록 숫자 등을 확인, 표적을 제대로 포착했다고 판단해 "사격해도 되느냐"고 무선으로 승인 요청을 했다.

같은 시각, 이스라엘 수도 텔아비브 지하 깊숙이 자리 잡은 공군 지휘통제 벙커에서 스피커를 통해 조종사의 음성을 들은 사람들의 시선은 통제소 사령관 다비드 이브리 장군에게 꽂혔다. 결단력 있는 인물로 알려진 이브리는 이날따라 주저했다.
표적도 확인했고 거리낄 게 없는 격추 환경이었으며 아리엘 샤론 국방장관으로부터 격추 명령도 이미 내려온 상태였지만 이브리의 머릿속에선 의심이 가시지 않았다. "안돼. 다시 말한다, 쏘지 말라"
암살 목표물은 이 수송기에 탄 이스라엘의 숙적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의장.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는 전날 PLO 내부 정보원 2명으로부터 아라파트가 이튿날 아테네에서 비행기를 타고 카이로로 갈 것이라는 첩보를 입수했다. 모사드는 즉각 요원 2명을 아테네 공항으로 파견, 아라파트가 정말 비행기를 타는지 확인토록 했다.
이브리는 자칫 오인 격추했을 때의 파장을 우려해 비상 출격 대기 중인 선임 조종사에게 "내 승인 없이는 발사하지 말라. 알았나? 통신 장애가 발생해 내 명령을 듣지 못했다면, 내 명령을 못 들었다면, 발사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당일 오후 2시 5분, 아테네 공항의 모사드 요원이 흥분한 목소리로 "아라파트가 여기 있다"고 보고했다. 아라파트와 그의 부하들이 마지막 탑승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정보보고를 받은 이브리는 그래도 뭔가 미심쩍었다. 아라파트가 비행기로 카이로에 갈 이유가 분명치 않았다. 정보기관들은 아라파트가 그때 카이로에서 할 일이 없다고 봤다. 설사 가더라도 아라파트 같은 신분의 사람이 개인 수송기를 이용한다? 이브리는 모사드에 다시 아라파트 신분 확인을 요청했다.
아테네 공항의 모사드 요원들은 거듭 아라파트가 맞다고 보고했다. "목표물은 위장을 위해 턱수염을 길게 기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오후 4시 30분, 요원들은 수송기가 이륙했다고 보고했다. 이브리는 라파엘 에이탄 이스라엘 국방군 참모총장으로부터 격추 명령을 전화로 받았다. 이브리는 전투기들을 출격시켰다.
F-15 전투기들이 수송기에 접근하는 중에도 이브리는 의심을 떨칠 수 없었다. 보좌관에게 지시해, 수송기에 탄 사람이 아라파트를 닮은 사람이 아니라 아라파트 본인이 맞는지 재확인토록 했다.
이브리는 시간을 벌 필요가 있었다. 의욕 과잉의 조종사들이 갑작스러운 무선수신기 잡음을 발사 명령으로 해석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무선 교신 없이는 쏘지 말라"고 다시 지시했다.
이브리는 에이탄 참모총장이 계속 전화를 걸어 격추 지시의 이행 여부를 확인할 때마다 "아직 표적이 맞는지 최종 확인되지 않았다"고 똑같은 대답을 했다.
이브리는 모사드와 군정보국인 아만(AMAN)에 눈으로 본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며 정말 아라파트가 그 비행기를 탔는지 교차 확인해 달라고 주문했다. 바로 이때가 조종사들이 표적 수송기를 확인하고 사격 승인 요청을 해온 시점이었다.
이브리는 더 시간을 끌 수 없는 상황. 벙커 안의 공기는 긴장감으로 팽팽해졌다. 몇 분이 더 흐르고 5시 5분 전 모사드 사령부와 직통 전화가 울렸다. "불확실성이 커졌다"는 당혹스러운 목소리였다. 모사드의 다른 정보원으로부터 아라파트는 아테네에 오지 않았으며, 수송기에 탄 사람은 아라파트일 가능성이 없다는 말을 들었다.
이브리는 전투기들에 명령을 거듭 내렸다. "추가 정보를 기다리고 있다. 목표물을 놓치지 말고 기다려라."
5시 23분, 모사드와 아만의 정보원들이 수송기에 탄 사람은 아라파트와 닮은 그의 동생 파티 아라파트라고 설명했다는 보고가 통제소에 전달됐다. 아라파트 동생은 팔레스타인 적십자사인 적신월사를 창립한 소아과 의사였다. 그는 부상한 팔레스타인 어린이 30명이 카이로에서 치료받을 수 있도록 이들을 데리고 가는 중이었다. 이들 어린이는 한 달 전 베이루트에 있는 난민 수용소에서 레바논 마론파 기독교 민병대의 학살극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아이들이었다.
이브리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전투기에 "귀환하라"고 지시했다.
뉴욕타임스가 발행하는 잡지 뉴욕타임스매거진은 23일(현지시간) 이스라엘의 집요한 아라파트 제거 시도의 역사를 수백 명의 정보·국방관계자 인터뷰와 기밀문서 수천 건에 대한 연구를 통해 돌아보면서 이스라엘 내부에서 벌어졌던 고민의 논쟁들을 소개함으로써 "민주주의 근본 원칙들과 국가 안보 본능 사이의 격렬하고 때로는 화해할 수 없는 충돌"을 성찰했다.
1982년 10월 23일의 사건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스라엘 당국자들이 맞닥뜨렸던 딜레마의 한 예일 뿐이다.
이 얘기를 쓴 필자는 "이스라엘은 제2차 세계대전 이래 서방의 어떤 나라보다 암살과 표적 살해를 많이 이용한 나라"라면서 "그 와중에 이스라엘 내부에선 국가의 보전 방법을 놓고, 국가가 테러리즘 방법을 사용할 수 있는가? 그 과정에서 무고한 민간인들을 희생시킬 수 있는가? 그 비용은?, 그 경계선은? 등의 논쟁이 죽 이어져 왔다"고 설명했다.
그중에서도 2004년 사망한 아라파트를 "죽고 싶을 만큼 죽이려 했던" 이스라엘의 샤론과 아라파트 간 좇고 모면하는 사례들은 이 논쟁의 무거운 주제와 별개로 매우 흥미롭다.
"아라파트를 죽이려는 열망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한 국가가 살아남기 위해 할 수 있는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에 관한 끊임없는 논쟁의 중심에 서도록 했다"고 필자는 말했다.
아라파트는 이스라엘의 암살, 폭살 시도를 행운에 의해, 또는 정보 미확인이나 과도한 민간인 희생 우려로 인한 작전 취소 덕분에 불사신의 모습을 보였으나 2004년 원인을 알 수 없는 감염으로 뇌졸중을 겪은 끝에 11월 11일 75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2001년 총리에 오른 샤론이 조지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과 합의에 따라 팔레스타인 문제의 정치적 해결로 선회했다가 2004년 4월 "부시와의 약속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밝힌 후의 일이다.
아라파트의 사망 원인을 두고 "방사성 물질 폴로늄이 아라파트의 옷에서 발견됐는지를 두고 오늘날에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으나, 이스라엘 정부 대변인들은 아라파트의 죽음에 이스라엘이 전혀 개입한 바 없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고 매거진은 말했다.
이스라엘 내부에서 논쟁이 있었지만, 아라파트를 제거하는 것이 팔레스타인 문제를 온전히 해결하는 첩경이라는 입장이 우세했다.
이에 따라 1967년 제3차 중동전쟁(6일 전쟁) 직후, 아라파트가 동예루살렘과 서안지구에서 게릴라 활동을 전개하자 이스라엘군이 그의 본거지를 급습했으나 몇 분 차이로 놓쳤다.
이스라엘은 1968년엔 팔레스타인인 수감자를 3개월간 세뇌해 권총을 쥐여주고 아라파트를 살해토록 했으나 수감자는 석방 5시간 만에 경찰에 자수했다.
이들 시도는 실패했을 뿐 아니라 아라파트에게 세계적 명성을 벌어주는 결과가 됐다. 미 중앙정보국(CIA)마저도 막후통로로 아라파트와 교류했다. 그 결과 1970년대 말엔 아라파트가 광범위한 지지를 받는 국가수반 위상을 얻음으로써 공개 암살했다간 국제관계 규범을 파괴하는 일이 될 정도가 됐다. "이스라엘은 이를 갈았다"
1981년 국방 장관에 임명된 샤론은 이듬해 1월 1일, PLO 지도부가 최초의 이스라엘 타격 작전을 벌인 것을 기념하기 위해 베이루트에 건설 중인 경기장에 모이는 것을 겨냥, 귀빈석 아래 다량의 폭탄을 설치하고, 여기서 살아남아 대피하는 사람들까지 제거하기 위해 경기장 주변 도로에 폭발물을 가득 실은 차량 세 대를 주차시켜 놓은 '올림피아 작전'을 계획했다.
경기장 내 예상되는 인파를 고려할 때 유례없는 인명 살상과 파괴를 우려한 AMAN의 일부 장교들과 국방차관이 메나헴 베긴 총리를 찾아가 "전 세계가 우리를 노릴 것"이라며 작전 취소를 요구해 관철시켰다.
아라파트를 제거하려는 샤론의 집념은 "개인감정 차원"으로까지 변했다고 이브리는 말했다고 매거진은 전했다.
이에 따라 폭격 등을 통해 아라파트를 제거하려는 무모한 작전이 아라파트가 탑승한 일반 여객기 격추 명령과 같이 무고한 민간인 희생자를 너무 많이 낼 것 같으면 휘하 공군지휘관이나 조종사들이 "정보 관점에서 목표물이 성숙하지 않았다"거나 무선 주파수를 엉뚱한 곳에 맞춰 작전 수행이 불가능해질 때까지 시간을 끌며 통신을 두절하는 등 "기술적 방법"을 통해 명령 이행을 피하기도 했다.
ydy@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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