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사회당 100년] ① 독립운동사의 빈칸…잊혀진 역사

입력 2018-01-29 06:30   수정 2018-01-29 07:00

[한인사회당 100년] ① 독립운동사의 빈칸…잊혀진 역사
아시아 최초 사회주의 정당…독립정신 고취하며 일제와 맞서
내분·탄압 겪다 4년만에 와해…광복후엔 남북 양쪽서 '냉대'
현장 자취도 거의 지워져…"민족사적 관점서 공로 인정하자"

[※ 편집자 주 = 아시아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이 러시아 하바롭스크에서 깃발을 내건 것은 1918년 5월의 일입니다. 러시아 혁명세력과 손잡고 일제에 맞서 독립의 애국혼을 불태웠지만, 내분과 소련당국의 탄압을 극복하지 못한 채 4년여 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광복 후에도 그들을 위한 자리는 없었습니다. 남한에서는 이념 문제로, 북한에서는 김일성 신격화 과정에서 철저히 소외됐습니다. 한인사회당 주역들의 숨결이 서려 있는 하바롭스크와 항일운동 사상 최대 비극이 빚어진 스보보드니를 찾아 100년 전의 희미한 흔적을 답사하며 역사적 의미를 재조명하고자 합니다.]



(하바롭스크<러시아>=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극동시베리아의 중심도시 하바롭스크는 우리나라의 독립운동가들이 아시아 최초로 사회주의 정당을 만든 곳이다. 피 끓는 식민지 애국지사들은 왜 한반도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한겨울에 영하 30도를 오르내리는 이곳까지 왔을까. 이들은 왜 사회주의 이념을 내세워 국권을 회복하려고 했을까.

◇ 해외 독립운동가들은 왜 하바롭스크에서 모였나
이동녕·양기탁·안공근 등 신민회 출신의 우파 민족주의자, 이동휘·유동열 등 좌파 민족주의자, 김알렉산드라·오하묵 등 한인 2세 볼셰비키 등은 1918년 3월 하바롭스크에 모여 조선혁명가대회를 열었다. 주요 안건은 한반도에서 일제를 몰아내기 위해 몇 달 전 10월 혁명으로 러시아의 권력을 잡은 볼셰비키 세력과 연대하자는 것이었다. 혁명 세력은 제국주의의 압제에 신음하는 약소민족의 해방을 목표의 하나로 내세우고 있어 독립운동가들에게 희망을 안겨주었다.
우파들이 사회주의 노선에 반대하자 나머지 참가자들이 5월 11일 별도 모임을 열고 한인사회당 창당을 결의했다. 위원장에는 1914년 이상설과 함께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웠던 구한국군 장교 출신의 이동휘가 뽑혔다. 하지만 실질적인 창당의 산파역은 하바롭스크 인민위원회 외무위원이자 1916년 한인으로는 처음으로 볼셰비키 당원이 된 김알렉산드라(여)였다.
이곳을 창당지로 선택한 것은 김알렉산드라의 근거지인 데다 시베리아횡단열차가 지나고 아무르강(헤이룽장·黑龍江)을 끼고 있어 교통이 편했기 때문이다. 중국 만주나 러시아 연해주보다는 일제 밀정의 눈을 피하기도 용이했다.
한인사회당은 기관지 '자유종'을 발간해 일제의 만행을 알리고 독립정신을 일깨우는가 하면 보문사란 출판사를 통해 교과서 등을 펴내며 계몽과 교육에 힘썼다. 산하 군사조직인 한인적위대는 러시아 혁명군인 적군(赤軍)에 가담해 반혁명 세력인 백군(白軍)의 일원으로 참전한 일본군과 맞서 싸웠다.
반병률 한국외대 사학과 교수는 "한인사회당의 탄생은 독립운동 진영이 러시아혁명 세력과 연대하며 국제적인 조직으로 발돋움하는 동시에 명망가 중심으로 이뤄져온 조직에서 탈피해 사회주의 이념으로 무장하며 보편성을 획득하는 계기가 됐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하바롭스크를 무대로 한 사회주의 독립운동사는 오래가지 못했다. 1918년 9월 하바롭스크가 백군의 수중에 떨어지면서 한인사회당 주역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김알렉산드라는 백군에 체포돼 33살의 나이로 순국했다.


◇ 한인사회당 세력의 분열과 독립군 간 살상전의 비극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이 일어나 중국 상해에서 통합 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한인사회당도 재편됐다. 이동휘는 11월 3일 국무총리로 취임한 뒤 한인사회당 본부를 상해로 옮기고 하바롭스크에는 지부를 뒀다. 이듬해 1월 적군이 이르쿠츠크를 점령하자 한인사회당 창당에 참여했던 오하묵·김철훈 등을 중심으로 이르쿠츠크 공산당 한인지부를 조직했다가 다른 지역 한인들을 참여시켜 1920년 9월 고려공산당 중앙총회로 이름을 바꿨다.
이로써 한인사회당을 출범시킨 러시아의 사회주의 독립운동 세력은 한인사회당 지부(상해파)와 고려공산당 중앙총회(이르쿠츠크파)로 양분됐다. 상해파의 수장 이동휘는 임시정부 개혁을 추진하다가 대통령 이승만의 완강한 반대에 부닥치자 1921년 1월 24일 국무총리직을 사임하고 임정에서 탈퇴했다. 이동휘는 국제공산주의조직 코민테른의 지원금 40만 루블을 놓고 이르쿠츠크파, 임정의 김구와도 갈등을 빚었다.
그 무렵 코민테른은 볼셰비키 당원들이 포함된 이르쿠츠크파를 노골적으로 지원했다. 이르쿠츠크파는 유리해진 국면을 이용해 이르쿠츠크에서 1921년 5월 고려공산당을 창당했다. 이동휘도 며칠 뒤 상해에서 고려공산당 창당대회를 열며 3년 만에 한인사회당 간판을 내렸다.
두 파는 이름만 같을 뿐 인물 구성이나 노선 등에서 많은 차이를 보였다. 이들이 주도권 다툼을 벌이다가 1921년 6월 28일 이르쿠츠크파와 적군이 상해파 독립군 부대를 공격해 300여 명이 숨지고 250여 명이 행방불명된 사건이 자유시 참변(흑하사변)이다. 적군이 1920년 알렉세옙프스크를 점령하고 '자유'를 뜻하는 스보보드니로 개칭하자 한인들은 이를 번역해 자유시라고 불렀다.
이 참극으로 러시아의 독립운동 세력이 큰 타격을 받았으며 책임 소재를 따지는 과정에서 이르쿠츠크파도 힘을 잃었다. 1922년 10월 두 파를 아우른 고려공산당 연합대회가 베르흐네우딘스크에서 열렸는데, 이동휘를 비롯한 상해파가 전권을 장악하자 이르쿠츠크파는 중도에 대회장을 벗어나 치타로 철수했다.


◇ 코민테른 변심으로 자생적 사회주의 운동 막 내려
그러나 코민테른은 통합 고려공산당을 승인하지 않았다. 일본군을 연해주에서 완전히 몰아내고 1922년 12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소련)을 선포하자 이제는 독립군의 힘을 빌릴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동휘가 정통 사회주의자가 아니라는 점도 감안한 것으로 알려진다.
코민테른은 1922년 12월 극동부 산하에 '꼬르뷰로'(고려국)를 설치해 원격 통치에 들어갔다. 이동휘는 코민테른 극동부의 지시를 받아야 하는 4인 위원 중의 한 명으로 전락했다. 1923년 1월부터는 코민테른 고려국이 한국 사회주의·공산주의 운동 전반을 직접 지휘했다.
한인사회당 창당으로 시작된 러시아(소련)에서의 자생적 사회주의 독립운동은 이로써 막을 내렸다. 더욱이 연해주를 중심으로 새 터전을 일군 한인(고려인)들이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되면서 뿌리까지 뽑히고 말았다. 레닌의 친필 증명서와 함께 권총과 금화를 선물 받은 '봉오동 전투의 영웅' 홍범도 장군도 카자흐스탄 고려극장 수위로 쓸쓸하게 죽음을 맞았다.

◇ 일본·중국에서의 사회주의 운동과 조선공산당 탄생
러시아혁명의 성공은 러시아 밖에도 영향을 미쳤다. 일본에서는 1920년 1월 도쿄에서 재일 한인 유학생들이 결성한 조선고학생동우회를 시작으로 아나키즘 계열의 흑도회, 김약수가 중심이 된 북성회 등 사회주의 단체가 잇따라 생겨났다. 중국에서도 한인사회당 상해파 말고도 김원봉이 이끄는 의열단,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과 연계를 맺은 김성숙의 창일당과 조훈의 고려공산청년동맹 등 사회주의 그룹이 본격 활동을 개시했다.
국내에서는 서울청년회, 무산자동맹회, 토요회, 꼬르뷰로 국내부, 이르쿠츠크파 신사상연구회(화요회), 조선노동당, 북풍회 등이 경쟁하다가 화요회와 북풍회가 주축이 돼 1925년 4월 17일 서울 을지로의 중국음식점 아서원에서 조선공산당 창당대회를 열었다. 책임비서는 김재봉이었고 김찬, 조봉암, 김약수, 송봉우 등이 포진했다. 이튿날 출범한 청년전위조직 고려공산청년회의 책임비서에는 박헌영이 뽑혔다.
그러나 조선공산당은 일제의 혹독한 탄압을 받아 해체와 재건을 거듭했다. 1927년에는 좌우 합작의 신간회를 결성하기도 했으며 중심인물이 대부분 투옥되거나 중국으로 망명했다. 중국에서도 공산주의 활동을 이어가려면 코민테른의 '일국일당주의' 원칙에 따라 중국공산당에 가입하는 수밖에 없었다.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도 중국공산당 팔로군에 편입됐고 '무정장군'으로 알려진 김무정, 님 웨일스가 쓴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본명 장지락), 중국인민해방군가를 작곡한 정율성, 소설 '격정시대'의 작가 김학철 등도 중국공산당의 일원이 됐다.


◇ 광복 후에도 고난…독립유공자 인정받지 못한 사례 많아
한인사회당 창당 이래 온갖 풍상을 겪은 좌파 독립운동가들은 꿈에 그리던 광복을 맞았어도 여전히 가시밭길을 걸어야 했다.
친미 우파가 권력을 잡은 남한에서는 이념 문제로 배척당했고 6·25 후에는 반공사상이 더욱 강화되면서 이름마저 지워졌다.
친소 좌파 정권이 들어선 북한에서도 박헌영이 이끌던 남로당, 김두봉 등 조선의용대 중심의 연안파, 허가이 등 소련파 모두 김일성과의 권력 투쟁에서 밀려나 숙청됐을 뿐 아니라 독립운동사가 김일성의 빨치산 부대를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업적도 잊혀졌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누구보다 치열하고 끈질기게 싸웠지만 남북한 어디서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면서 독립운동사의 상당 부분이 공백으로 남고 말았다.
그나마 한중·한소 수교 이후 사학자와 사회단체 등이 역사 복원에 나서고 민주화 이후 정부가 이동휘와 김알렉산드라에게 1995년과 2009년 각각 건국훈장을 추서하는 등 명예 회복에 나서고 있다. 그러나 증언자가 숨지고 사료와 사적이 망실돼 역사의 빈칸을 메우는 작업이 쉽지 않은 형편이다. 오하묵·김철훈 등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와 의열단의 김원봉 등은 아직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한인사회당 창당 주역들의 숨결이 서려 있는 하바롭스크에서도 100년 전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한인사회당 창당대회 개최지와 당 간부회관 터는 건물을 짓는 공사가 한창이고 김알렉산드라가 근무하던 인민위원회 건물은 의류 매장으로 바뀌었다.
반병률 교수는 "사회주의 혁명 세력의 힘을 빌려 빼앗긴 국권을 되찾으려던 이들이 광복 후 남북이 분단될지 어떻게 알았겠느냐"면서 "이제는 민족사적 관점에서 좌파 독립운동가들의 공로를 인정하고 기념사업에 적극 나서야 할 때"라고 주장했다.
heeyong@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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