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 시인 "문단 내 성폭력…이제 안 된다는 인식 생겼죠"

입력 2018-01-31 07:05   수정 2018-01-31 08:56

김현 시인 "문단 내 성폭력…이제 안 된다는 인식 생겼죠"
시집 '입술을 열면' 출간…"같이 목소리 내자는 연대의 마음 담아"



(서울=연합뉴스) 임미나 기자 = "문제가 불거지기 전에는 인식 자체가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는데, 이제는 최소한 그게 문제라는 인식은 생긴 것 같아요. 지금은 그나마 조심을 하는 분위기입니다."
2016년 '문단 내 성폭력' 문제를 처음 공개적으로 제기한 김현(38) 시인은 30일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지금은 달라진 게 있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그는 당시 '21세기 문학' 가을호에 기고한 '질문 있습니다'란 제목의 글에서 남성 문인들이 술자리에서 여성 문인들을 비하하거나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등 여성 혐오와 성폭력이 만연한 문화를 폭로해 파문을 일으켰다. 이후 '#문단_내_성폭력'이라는 해시태그를 달고 문인들로부터 성추행이나 성희롱을 당했다는 폭로가 SNS에서 잇따라 터져 나오면서 자정을 촉구하는 목소리도 커졌다. 미국에서 벌어진 '미투' 운동보다 한발 앞서 이뤄진 일이다.
"이제는 술자리에서 누군가 그런 말이나 행동을 하려고 하면 '그러다 큰일 나요'라는 식으로 제지하는 목소리가 나오곤 합니다. 그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은 많이 없어진 것 같아요. 또 그즈음에 새롭게 여성 작가들의 페미니즘 작품이나 성소수자 시각에서 의미 있는 작품에 대한 재조명이 이뤄지면서 젠더 인식이 많이 나아졌다고 할 수 있죠."
다수의 침묵에 동조하지 않고 목소리를 내는 그의 저항성은 이번에 펴낸 새 시집 '입술을 열면'(창비)에도 오롯이 담겨 있다. 첫 시집 '글로리홀'(2014) 이후 4년 만에 내놓은 이 시집에는 2013∼2015년 쓴 시 50여 편이 묶였다. "벗/대학시절/청년노동자/우리들의 하느님//박근혜가 대통령이 되었다"('불온서적' 전문)로 시작해 세월호에 관한 시 '열여섯번째 날'로 끝난다.
"죽어 있는 사람들이/도서관에 모여 있었다//말해볼까//괴담/졸업앨범을 펼치고 죽은 사람을 찾아보자//나 너 너 너/우리//죽은 사람이 산 사람보다 이렇게 많은데/졸업사진은 찍어 뭐 하니//거리에서 매운 물을 뒤집어쓰면/속죄하는 기분이 들어서//밥을 먹었다" ('열여섯번째 날' 중)
"시집을 열고 닫는 게 박근헤 전 대통령과 그 상징적 사건인 세월호입니다. 처음엔 엄청난 투쟁의 시나 구호의 느낌이 있었다면 그 시간이 다 지나고 난 이후에 책으로 묶어서 내놓을 때는 좀 더 다른 방향에서 그 사건이나 시공간, 인물을 떨어져서 보게 되는 느낌이 있을 것 같아요. 독자의 반응이나 교감이 다를 수도 있겠고요. 후일담 같은 시집으로 읽히면서도 한편으론 그렇게만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것이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 미래까지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지 좀더 고민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시에는 날이 서 있지만, 그는 스스로 "겁이 많은 사람"이라며 수줍게 웃었다.
"투쟁꾼이라고 할 순 없어요. 주위 사람들한테 '나는 앞에 서서 돌을 던질 순 없다. 남들이 갈 때 손잡고 같이 가는 게 나의 최선이다' 그러는데, 시 역시 그런 마음으로 쓰는 것 같아요. 투쟁하고 구호 외치는 마음보다는 손잡고 연대하는 마음이죠. 아주 미약하지만, 목소리를 좀 내야겠다는 마음이요. 이번 시집에서도 유독 많이 쓴 게 입술이더라고요. 입술을 열고 목소리를 내는 것, 이런 사람들끼리 같이 산다는 것을 말하는 데 조금 더 가닿아 있었던 것 같아요."
시집 제목이 될 뻔했던 '조선마음' 연작은 이번 시집의 대표작이다.
"'헬조선'이란 말이 엄청나게 떠돌아 다녔잖아요. 그런 글을 많이 접하다 보니까 '조선'이란 말에 좀 꽂혔어요. 대한민국에서 왜 갑자기 조선을 호명할까 궁금했는데, 아무래도 그 시절의 가부장이나 유교 질서가 억압적인 느낌이 된 게 아닐까 싶더라고요. 그런 걸 시적으로 풀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문을,/닫고//밧줄을,/감고//촛농을,/떨구고//그게 어느새/늙어버린 우리 얼굴//건널 수 없는/얼굴을 사이에 두고//우리는 우리를 본다/우리는 다 알겠다는 표정으로//우리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우리는 움직이지 않는다//조선은 오래전에 망한 나라/우리는 자학한다//너는 우리 앞에 시간이 있다고 생각하겠지만/우리 앞에 놓인 것은 시간이 아니다//시간은 끝났다" ('조선마음 11')


이런 사회 비판과 저항 정신의 아래에는 따뜻한 온기가 흐른다.
"지름을 이해하기 위해/뽀뽀한다//뽀뽀함으로/우리는 인간일 수 있다//낮잠을 자고 일어난/생명의 입술에/입술을 맞대면/입술이 넓어지고 좁아진다는 것을/공부한다//공부할 때/생명은 이런 숨을 쉬는구나/처음 느끼고//생명에는/생명의 숨을 불어넣어주어야 하는구나/배워서 알지 않는다//(중략)//당신과 나는 원에서 태어났고/입술소리로 한편생 진실을 읽는다/뽀뽀의 순리//생명은 뽀뽀함으로 가볍다//우리는 그 길로 사람을 이해하므로/생명의 첫 지름을 깨우친다" ('생명은' 중)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시들도 눈에 띈다. 그와 친한 소설가 조해진, 서효인 시인의 딸 은재, 이 시집의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양경언 등이 등장한다.
"경언이와는 '304 세월호 낭독회'를 같이 하고 있어요. 낭독회를 알리는 전단을 붙이며 다녔는데, 우리가 왜 세월호를 잊지 말자고 얘기하면서 이걸 붙이고 다닐까, 이런 행위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생각하다 시를 쓰게 됐죠. 최근에는 이름을 많이 호명하는 시를 쓰고 있어요. 이름을 불러주는 행위 자체가 특별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는 점점 냉혹해지는 이 세계를 마주하면서도 문학과 예술의 힘을 믿는다고 했다.
"예술만이 해줄 수 있는 역할이 있다고 생각해요. 음식을 맛있게 먹는 것과 책을 읽는 것은 각기 다른 것을 충족시켜 주잖아요. 시나 소설은 말초적이고 즉각적인 포만감을 주는 건 아니지만, 정화라고 할지, 다른 방식으로 뭔가를 주지요. 제가 창비에서 운영하는 시 전문 앱 '시요일'에서 시 처방전을 써주는 걸 한 달 동안 했는데요, 라디오처럼 사연을 보내면 거기에 맞는 시를 골라주고 짧은 산문을 써서 처방전처럼 주는 거예요. 처음엔 과연 몇 명이나 사연을 보낼까 싶었는데, 200명 넘는 사람이 사연을 보내더라고요. 사람들이 시에서 원하는 게 뭘까 생각해봤는데, 가만 보니 어떤 걸 극복하려는 방법을 시에서 찾는 거였어요. 기쁨이나 슬픔처럼 하나로 똑 떨어지는 감정이 아니라 아주 복잡다단한 마음이 뭉쳐있을 때 그걸 풀어내는 용도로는 시가 음악, 영화보다는 나을 수 있죠. 시는 복잡한 감정의 겹을 푸는, 물꼬를 틔워줄 수 있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mina@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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