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손' 처단하기에 너무 먼 법…사법체계 불신 해결책은

입력 2018-03-07 17:02  

'나쁜 손' 처단하기에 너무 먼 법…사법체계 불신 해결책은
"수사기관·법원 남성 상당수 '여자가 원인제공'이라는 잘못된 통념 빠져있어"
'2차 가해의 무기'인 명예훼손죄 등 개정 필요성도


(서울=연합뉴스) 사건팀 = "여성이 술을 마시고 성관계를 맺는 것은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2016년 8월 서울서부지법 공판 중 A 판사)
"남자친구 여러 명과 성관계를 했죠? 정액이 묻은 휴지가 든 쓰레기통은 누가 버렸나요?"(2016년 4월 서울고법 공판 중 피고인 B 변호사)
술자리에서 나온 얘기가 아니다. 법원에서 열린 공판에서 성폭력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여성을 버젓이 앞에 두고 판사와 피고인 변호사가 법정에서 한 발언이다.
7일 사회 전 분야에서 확산하는 '미투 운동'은 가해자에 대한 처벌을 의도한다기보다는 폭로를 통한 사회적 인식 변화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러나 폭로가 구체적이면 사법기관의 수사로 이어질 수밖에 없고, 실제로 안희정 전 충남지사, 연극연출인 이윤택 씨 등이 수사를 받게 됐다.
사법적인 처벌은 우리 사회에서 권력형 성폭력을 근절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이지만 대부분의 피해자는 속으로 앓기만 하는 게 현실이다.
가해자가 유명인이거나 교수 등 지위가 높은 사람이 아니면 피해자가 폭로해도 주목받지 못한다. 오히려 직장에서 해고를 당하거나 명예훼손 위협 등 2차 피해를 보곤 한다.
정현미 이화여대 젠더법학연구소장은 "'미투'라는 폭로 운동을 통해 성폭력 문제를 해결한다는 게 꼭 바람직하다고만 볼 수는 없다"면서 "사법체계가 성폭력 사건을 다루는 방식에 대해 불신이 깊어진 것이 '미투'를 통해 목소리가 터져 나온 한 원인"이라고 진단했다.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가 지난해 낸 '성폭력 재판 과정에서의 피해자 권리에 대한 모니터링 보고서'를 보면 피해자들이 사법체계 안에서 어떤 2차 피해를 겪는지가 여실히 드러난다.
보고서에 따르면 상담소가 2013년부터 2016년 8월까지 334회에 걸쳐 피해자와 재판에 동행한 결과 이중 30회의 재판에서 피해자의 이름이나 주소, 나이, 직업 등 신상이 노출됐다.
A 판사나 B 변호사처럼 성폭력에 대한 왜곡된 통념이 드러나는 발언을 해 피해자에게 또 다른 성폭력을 가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보고서는 "잘못된 성폭력 통념에 따른 발언은 법정에서 통념을 강화해 가해자의 논리에 힘을 실어줌으로써 성폭력범죄 재판의 공정성을 훼손한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사법체계를 움직이는 상당수 남성이 여성에 대한 인식을 바꾸지 않는 한 형사 절차에서 피해자들의 불신은 계속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한국여성민우회 정예원 활동가는 "같은 성폭력 사건이라도 경찰, 검찰, 법원에 이르는 과정에서 어떤 담당자를 만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오기도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현행 체계에서는 피해자에게 '왜 거부하지 않았느냐', '왜 따라갔느냐'는 식으로 성폭력 사건의 입증 책임을 피해자가 지게 한다"면서 "성폭력에 대한 근본적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정현미 교수는 "(수사나 재판 과정에서) '왜 강하게 부인하지 않았느냐. 당신도 성관계를 원한 게 아니냐'는 등의 질문이 나오는데 이는 사법체계 안의 남성들이 가해 남성들과 기본적으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면서 "'원인 제공자는 여자'라는 잘못된 시각이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많은 가해 남성이 2차 가해의 '무기'로 선택하는 명예훼손죄를 개정하는 등 법체계를 손봐야 한다는 지적도 있었다.
변혜정 한국여성인권진흥원장은 "사실적시에 의한 명예훼손죄를 손봐야 한다"면서 "성폭행을 당한 것도 억울한데 이를 알렸다는 이유로 피해자가 처벌을 받게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없애야 한다. 공공성을 목적으로 할 때는 위법성이 조각될 수 있다(위법성이 없다)는 부분을 적극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윤김지영 건국대 몸문화연구소 교수는 "피해자가 동의하지 않은 사태에서 성관계를 맺었다면 명백한 강간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피해자 스스로 강간을 당했다는 것을 입증해야 하는 게 현실"이라면서 "지금처럼 모든 것을 피해자가 입증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이주희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는 "직장 내 성희롱이 형법상 처벌 대상이 아닌 경우 기업에 민사상 징벌적 손해배상을 요구할 수 있도록 하는 등 피해자를 위한 다양한 법적 지원 체계를 만들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ahs@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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