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이매진] 물길 따라 걷는 소백산 1자락길

입력 2018-04-07 08:01  

[연합이매진] 물길 따라 걷는 소백산 1자락길

(영주=연합뉴스) 이창호 기자 = 백두대간의 허리쯤에 솟은 소백산(小白山·1,439m)은 지리적으로 경북 영주, 충북 단양, 그리고 강원 영월까지 품고 있는 명산이다. 그 산세는 토산(土山)이라 어머니의 품처럼 부드럽고, 포근하다.



소백산 자락길은 모두 열두 자락에 143㎞로, 각 자락은 문화적 특성에 따라 별칭이 하나에서 셋까지 따로 주어져 있다.
선비촌∼삼가주자창 13㎞ 구간인 1자락은 선비길·구골길·달밭길, 삼가주차장∼소백산역 16㎞ 구간인 2자락은 학교길·승지길·방천길로 불린다. 3자락(소백산역∼당동 12㎞)은 죽령옛길·용부원길·장말림길, 4자락(당동∼금곡리 12㎞)은 가리점마을옛길, 5자락(금곡리∼보발분교 16㎞)은 황금구만량길이다. 보발분교에서 영춘면사무소까지 14㎞ 구간인 6자락은 온달평강로맨스길이란 낭만적인 별칭이 붙었다.
또 7자락(영춘면사무소∼의풍리 19㎞)은 십승지의풍옛길, 8자락(의풍리∼주막거리 7㎞)은 접경길·대궐길, 9자락(주막거리∼오전댐 7㎞)은 방물길·보부상길, 10자락(오전댐∼부석사 7㎞)은 쌈지길·소풍길, 11자락(부석사∼좌석교회 14㎞)은 과수원길·올망길·수변길, 12자락(좌석교회∼배점리 8㎞)은 자재기길·서낭당길·배점길로 불린다.
소백산 자락길은 '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 탐방로'(2009년)와 '한국형 생태관광 10대 모델'(2010)로 뽑힌 데 이어 '한국관광의 별'(2011년)과 '한국관광 100선'(2015년)에 선정됐다.
소백산 자락길의 백미로 꼽히는 1자락은 자연 풍광이 아름답고 볼거리도 많은 구간으로, 4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전체 구간은 선비길(선비촌∼금성단∼배점마을)과 구곡길(배점마을∼죽계구곡∼초암사), 달밭길(초암사∼달밭골∼비로사∼삼가주차장)로 나뉜다. 신미자 문화관광해설사는 "옛 선비들이 걷던 길을 선비걸음으로 따라 걷다 보면 청아하게 흐르는 죽계구곡의 봄과 소백산의 너른 품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한다.



◇ 가슴 아픈 영주 역사를 만나는 선비길

소백산자락길의 1자락 출발점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과 맞닿아 있는 영주 선비촌이다. 영주 지역의 고택을 재현해 놓은 선비촌 입구의 '영주 선비상'을 뒤로 하고 선비처럼 느긋한 맘으로 걷는다. 선비촌을 나오자마자 죽계천을 가로지르는 제월교(霽月橋)를 만난다. 퇴계가 '장맛비가 걷힌 뒤 맑은 하늘 같은 선비의 기운이 감돈다'는 뜻으로 '제월교'라 칭한 이 다리는 가슴 아픈 순흥(영주 지역의 옛 지명)의 역사를 품고 있다. 1456년의 정축지변(丁丑之變) 때 수천 명의 순흥 사람이 제월교에서 참형을 당했고, 희생자들이 흘린 피가 죽계천을 따라 십 리를 흐르다 피끝마을에서 멈추었다고 한다. '청다리'라고도 불리는 이 다리는 소수서원의 선비와 기생 사이에서 태어나 고아가 된 아이들을 데려다 키운 데서 '다리 밑에서 주워 온 아이'라는 말을 낳았다는 이야기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



제월교를 지나 마을로 들어서면 금성단(錦城壇)이 눈에 들어온다. 조선 세조 때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화를 당한 금성대군(단종의 숙부이자 세조의 아우)과 순흥부사 이보흠 등을 추모하기 위해 만든 제단이다. 정축지변으로 순흥도호부는 폐부됐다가 숙종 9년(1683)에 다시 복원되고, 숙종 45년(1719)에 신단을 설치하였다. '금성대군성인신단지비'(錦城大君成仁神壇之碑)라는 글씨가 새겨진 금성단비와 제단이 옷깃을 여미게 한다.
'선비와 지조'를 떠올리며 압각수(鴨脚樹·경북 보호수 제46호)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잎사귀 모양이 마치 오리발을 닮아 '압각수'로 불리는 은행나무는 순흥과 흥망성쇠를 함께한 '충신수'이다. 수령 1천200년의 은행나무는 "순흥이 죽으면 이 나무도 죽고, 이 나무가 살아나면 순흥도 살아나네"라는 참요(讖謠)처럼 순흥도호부가 폐부될 때 불타 죽었다가 밑둥치만 남아 있던 나무에 새로운 가지와 잎이 돋아나자 순흥부가 복원되었다고 한다. 잎눈이 뾰족뾰족 돋아난 채 봄의 기운을 잔뜩 머금은 은행나무를 지나면 선비촌에서 600m 떨어진 금성대군 위리안치지(圍籬安置地)와 마주한다. 조선 시대 왕족이나 고관이 큰 죄를 지었을 때 유배지 둘레를 탱자나무 등의 가시덤불로 울타리를 둘러 외부 접촉을 막았음을 보여주는 흔적이다.
과수원 길과 죽계로를 따라가면 죽계천을 막아 만든 순흥저수지가 눈에 들어온다. 소백산의 사계절을 담고 있는 저수지는 원앙 등의 철새 도래지로 유명한데, 저수지 한편에는 고려의 명현이며 문장가인 안축의 '죽계별곡'(竹溪別曲) 시비가 세워져 있다. 이 고장 출신 안축은 이곳을 비롯한 순흥 일대의 아름다운 풍경을 죽계별곡(竹溪別曲)으로 노래했다.



송림호 또는 배점저수지로도 불리는 순흥저수지의 옆 아스팔트 길을 걷다 보면 배점마을의 삼괴정(三槐亭)을 만난다. 천민 출신이었던 배순의 무쇠점(대장간)이 있던 마을이라는 이곳에는 수령 600년가량의 느티나무 세 그루가 서 있는데 바로 옆에는 배순의 정려비(경북 유형문화재 제279호)가 있다. 배점마을의 유래도 흥미롭다. 배순은 대장장이 아들로 태어난 천민 출신이라 공부를 할 수 없었다. 소수서원을 찾아 강학당 문밖으로 흘러나오는 유생들의 글 읽는 소리를 듣고, 마당에서 작대기로 글씨를 써가며 귀동냥 공부를 했다. 퇴계는 이를 가상히 여겨 유생들과 같이 글을 읽게 했다. 퇴계가 죽자 부모상을 당한 것처럼 3년 상복을 입었고, 선조가 죽자 매월 삭망에 국망봉에 올라 궁성을 향해 곡제사를 지냈다. 그 소문이 궁 안에까지 퍼져 조정에서는 배순의 충효정신을 기리기 위해 정려비를 내렸다.




◇ 조선 유학자들이 성지처럼 찾아든 죽계구곡

정월 보름이면 배순을 배향하는 동신제가 열리는 삼괴정에서 죽계구곡으로 향한다. 순흥초등학교 배점분교(폐교)와 관광안내사무소가 있는 배점주차장을 지나면 죽계구곡을 끼고 걷는 길이다. 배점리에서 초암사에 이르는 계곡을 성리학의 창시자인 주희의 '무이구곡'을 본떠 '죽계구곡'이라 부르는데, 소백산 자락에서 가장 깊고 아름다운 계곡이다. 퇴계가 '계곡의 물 흐르는 소리가 노랫소리 같다'하여 절경마다 이름을 지었고, 소수서원의 창시자인 주세붕도 나름의 구곡을 정해 풍류를 즐겼다.
1자락의 구곡길은 영조 때 순흥부사 신필하가 정한 죽계구곡으로 구곡의 위치마다 글씨가 새겨져 있다. 주희의 무이구곡이나 퇴계의 죽계구곡 등 다른 구곡과 달리 상류인 금당반석(제1곡)에서 하류인 이화동(제9곡)까지 2㎞ 물길을 따라 내려오며 이름을 붙이고 새겨두었다.
신미자 문화관광해설사는 "죽계구곡은 조선 유학자들이 평생 한 번은 꼭 걷고 싶어 했던 순례길이었다"면서 "풍광도 아름답지만 선비 정신의 참뜻을 되새기는 길"이라고 말한다.
죽계구곡으로 들어서면 맨 먼저 물줄기가 마치 배꽃이 떨어지는 것 같은 제9곡 이화동(梨花洞)이 길손을 반긴다. 밑바닥이 훤히 보이는 맑은 물이 흐르지만, 주변의 건물과 시멘트 다리로 인해 다소 운치가 떨어진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다시 구곡길을 걷는다. 길옆 사과밭에 깔아둔 거름 냄새가 코를 자극하고, 죽계천의 수풀은 이른 봄빛으로 파릇파릇하다. 계곡을 따라 아름다운 숲길이 이어지는데, 하얀 바위와 맑은 계류, 푸른 하늘과 따스한 햇볕이 빚어놓은 풍광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8곡 관란대(觀瀾臺)와 7곡 탁영담(濯纓潭)을 지나 6곡 목욕담(沐浴潭)에 이르면 주저앉아 발을 담그고 싶은 마음이 솟구쳐 오른다. 6곡은 아래와 위로 선녀가 내려와 몰래 몸을 씻었을 듯한 바위와 숲에 가려진 소(沼)로, 옆에 앉아만 있어도 바위틈 사이로 흐르는 맑디맑은 물소리에 취한다. 일상의 찌든 때도 겨우내 얼어붙었던 계곡 사이로 흘러내린다.



5곡 청련동애(靑蓮東崖)와 초암주차장을 지나 4곡에 이르면 깊은 못 한가운데 둥근 바위가 놓여 있다. 검푸른 물굽이가 소용돌이치는 깊은 못 가운데 큰 바위가 누워 있어 마치 용이 구름 비를 뿜는 듯하다 하여 '용추'(龍湫)라 불린다. 순흥 사람들은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살아있는 돼지의 목을 베어 이곳에 던져 넣으면, 소의 물이 끓어오르듯 핏물이 솟구친다고 한다. 용이 깃들어 있는 신성한 처소를 핏물로 더럽히면 신령이 그 더러움을 씻어내고자 곧 비를 내렸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3곡 척수대(滌愁臺)를 지나면 곧바로 2곡 청운대(靑雲臺)와 마주치고, 주세붕이 '소백산 흰 구름이 비추는 곳'이라고 백운대(白雲臺)라 불렀던 2곡 옆에는 초암사(草庵寺)가 계곡 물소리를 들으며 국망봉 산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가 부석사를 창건하기 전 초막을 짓고 잠시 머물던 곳이다.
초암사에서 100여m 떨어진 제1곡 금당반석(金堂盤石)엔 높이 5m쯤 되는 와폭(臥瀑)과 소 앞으로 수십m에 이르는 화강암 너럭바위가 펼쳐져 있다. 반석 위로 흐르는 맑은 물길은 마치 거울같이 길손의 마음을 비춰 준다.



◇ 화전을 일구며 살았던 달밭골

죽계구곡 1곡에서 200m 오르면 갈림길에 '국망봉 4.1㎞, 비로사 3.1㎞'라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비로사로 가는 왼쪽 길로 접어들면 월전계곡을 끼고 있는 달밭골이다. 초암사와 비로사 사이의 달밭골은 골이 깊고 물도 맑아 오래전 화전민들이 모여 살던 곳이다. 달밭골의 '달'은 산의 고어로, '달밭'은 '산 경사지에 있는 달뙈기만한 다락밭’을 뜻한다. 국토순례를 하던 신라 화랑들이 유오산수(遊娛山水)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일제 강점기 전후 정감록 신봉자들이 이곳으로 숨어들었다고 한다.
달밭골 곳곳에 경지의 흔적이 남아 있고, 잣나무 숲이 늘어선 쇠자우골에 닿으면 소 발자국 모양이 찍힌 바위가 시선을 끈다. 소가 직접 바위를 밟아 난 흔적이라기보다는 달밭골 사람들이 이 길을 지나다니며 위치를 알리는 이정표로 삼았다고 한다. 잠시 다리쉼을 한 뒤 물길 옆으로 이어지는 자락길을 걷는다. 개울과 길이 하나가 되는 좁고 깊은 협곡, 하늘을 가리는 숲 터널, 낙엽이 푹신하게 깔린 흙길, 호젓한 숲길이 번갈아 나타나 사색하며 걷기에 그지없이 좋다. 개울에서 졸졸 흐르는 물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힘도 덜 들고 지루할 틈이 없다.
눈이 채 녹지 않은 가파른 산길을 힘겹게 오르니 순흥 달밭골과 풍기 달밭골 경계인 성재다. 고개를 넘자 짙은 잣나무 향이 코끝을 자극한다. 잣나무숲 명상쉼터는 아름드리 잣나무 숲이 울창해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다. 사부작 사부작 숲길을 걷다 보면 어느새 가슴에 쌓인 잡념들이 하나 둘 사라진다.



잣나무숲에서 휘적휘적 걸어 내려오면 '산골민박'의 '자유의 종'이 눈에 들어온다. 영주 철도국에서 기증한 이 종은 1960년대 달밭골에 살던 주민이 마을 회의를 소집할 때 연락용으로 쓰던 종이다. 비로봉에서 발원한 계곡을 따라 내려가면 의상대사가 창건한 비로사(毘盧寺)가 길손을 맞는다.
고려 태조가 방문해 법문을 들었던 비로사는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뒤 광해군 때 중건됐고, 1908년 법당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다시 불에 타 1919년 중수했다. 옛 건물은 없지만, 숲에 둘러싸인 산사는 평온하다. 경내에는 보물 제996호인 석조아미타불좌상과 석조비로자나불조상, 비로사 진공대사보법탑비(경북 유형문화재 제4호), 영주삼가동석조당간지주(경북 유형문화재 제7호) 등이 있다.
비로사를 나와 개울길을 따라 하류로 내려가면 소백산국립공원에서 운영하는 삼가야영장을 거쳐 1자락 종착지이자 2자락 출발지인 삼가주차장에 닿는다. 다리가 묵직하다. 선비촌으로 원점 회귀하려면 시내버스를 타고 풍기역까지 간 후 시내버스를 갈아타야 한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8년 4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changho@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관련뉴스

    top
    • 마이핀
    • 와우캐시
    • 고객센터
    • 페이스 북
    • 유튜브
    • 카카오페이지

    마이핀

    와우캐시

    와우넷에서 실제 현금과
    동일하게 사용되는 사이버머니
    캐시충전
    서비스 상품
    월정액 서비스
    GOLD 한국경제 TV 실시간 방송
    GOLD PLUS 골드서비스 + VOD 주식강좌
    파트너 방송 파트너방송 + 녹화방송 + 회원전용게시판
    +SMS증권정보 + 골드플러스 서비스

    고객센터

    강연회·행사 더보기

    7일간 등록된 일정이 없습니다.

    이벤트

    7일간 등록된 일정이 없습니다.

    공지사항 더보기

    open
    핀(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