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이매진] 섬진강 오백삼십리

입력 2018-04-06 08:01  

[연합이매진] 섬진강 오백삼십리
'꽃 사태'로 알록달록…"얘들아, 봄나들이 가자!"

(임실·곡성·구례·하동·광양=연합뉴스) 이창호 기자 = "가문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퍼가도 퍼가도 전라도 실핏줄 같은/ 개울물들이 끊기지 않고 모여 흐르며/ 해 저물면 저무는 강변에/ 쌀밥 같은 토끼풀 꽃,/ 숯불 같은 자운영 꽃 머리에 이어 주며/ 지도에도 없는 동네 강변/ 식물도감에도 없는 풀에…(중략)… 흐르다 흐르다 목메이면/ 영산강으로 가는 물줄기를 불러/ 뼈 으스러지게 그리워 얼싸안고/ 지리산 뭉툭한 허리를 감고 돌아가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중략)…어디 몇몇 애비 없는 후레자식들이/ 퍼 간다고 마를 강물인가를."



봄은 늘 설렘과 함께 온다. '섬진강 시인'으로 불리는 김용택 시인의 '섬진강 1'을 읽다 보면 마음은 이미 유장하게 흐르는 섬진강 변에 앉아 있다. 섬진강의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이 모두 좋지만, 김용택 시인은 봄에서 시적인 영감을 많이 받았다고 했다.
장편 소설 '혼불'의 최명희 작가는 섬진강을 '구름이 몸을 이루면 바위가 되고 바위가 몸을 풀면 구름이 되는 곳'이라고 표현했고, 많은 사람은 '누이 같은 강', '봄소식을 전하는 강'이라고 말하곤 한다. 이런 섬진강은 마을따라 굽이굽이 흐르며 가는 곳마다 아름다운 풍광과 명소,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낸다.
전북 진안의 팔공산 자락 옥녀봉 아래 데미샘에서 발원한 섬진강은 임실, 순창, 남원, 곡성, 구례, 하동, 광양을 지나 광양만으로 흘러간다. 총 길이 212.3㎞, 오백삼십 리의 물길은 진안의 마령과 임실 관촌을 지나 옥정호에 이르고, 진뫼마을과 구담마을을 거쳐 순창의 장군목과 향가유원지를 지난다. 순창의 오수천과 남원의 요천을 받아들인 섬진강은 곡성의 압록에서 보성강과 물길을 섞은 뒤 구례의 대나무숲을 지나 지리산과 백운산 사이로 흘러간다. 화개천을 받아들인 섬진강은 매화가 흐드러진 하동과 광양의 물길을 따라가다가 광양의 망덕포구에서 남해로 빠져나간다.
전라도와 경상도의 젖줄인 섬진강은 모래내, 모래가람, 다사강, 두치강으로 불렸는데, 고려 우왕 11년(1385)에 왜구가 하구로 침입했을 때 수십만 마리의 두꺼비떼가 울부짖자 이에 놀란 왜구들이 피해 갔다고 한다. 두꺼비 섬(蟾), 나루 진(津) 자를 붙여 섬진강으로 부르게 된 이유다. 섬진강은 '나루터에 두꺼비가 나타난 강'이다.



◇ 때 묻지 않고 수줍어하는 누이 같은 강

봄날의 섬진강 풍경을 만나기 위해 전북 임실로 달렸다. 작은 옹달샘에서 시작한 물길은 임실 땅에 인공호수인 옥정호(玉井湖)와 '육지 속의 섬'인 붕어섬(외앗날)을 만들어내며 흘러간다. 섬진강다목적댐으로 생겨난 옥정호의 풍광이 눈과 마음을 사로잡아 버린다. 노령산맥의 첩첩한 산줄기를 타고 하산한 구름과 수면으로부터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물안개는 몽환적이다. 국사봉 전망대에 올라서면 발아래로 화려한 지느러미를 펼치고 유유자적 헤엄치는 듯한 붕어섬이 한눈에 들어온다.
임실군 운암면 마암리에서 용운리 용운마을까지의 물안개길은 수변을 따라 구불구불한 길이 실핏줄처럼 뻗어 있어 사색하기 좋다. 그야말로 때 묻지 않은 오솔길이다. 옥정호 곁을 지나는 749번 지방도는 '한국의 100대 아름다운 길'에 선정된 길로 섬진강의 풍경을 감상하며 드라이브하기 좋다.
섬진강은 옥정호의 끝 지점, 1965년 12월 준공한 우리나라 최초의 다목적댐인 섬진강댐에 잠시 머물러 있다가 다시 흐른다. 파스칼이 '팡세'에서 "강은 움직이며 흘러가는 길이다. 가고 싶은 곳으로 데려다주는 길"이라고 이야기했듯이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의 근거지였던 회문산을 감고 돌아 임실 진뫼마을에 이른다.
마을 앞에 긴 산이 있어 '진뫼'란 이름이 붙었다고 하는데 '진메' '질메' '장산마을'이라는 이름도 있다. 김용택 시인의 마을로 유명한 진뫼마을 입구에는 제13회 풀꽃상을 받은 아름드리 정자나무가 한 그루 서 있고, 마을에서는 김용택 시인의 생가와 시비 '농부와 시인'이 방문객들을 맞이한다. 강물을 내려다보며 고즈넉하게 앉아 있는 자그마한 한옥에 붙은 옥호는 '글이 돌아온다'는 회문재(回文齋)다. 그는 '섬진강' 연작을 쓰면서 '섬진강 시인'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회문재 마루에 앉아 강 쪽을 바라보면 계곡이라기엔 넓고 강이라고 하기엔 폭이 좁은 부드럽고 고운 강물이 흐른다.



'시인의 길'로 불리는 진뫼마을에서 천담마을까지의 5㎞는 가장 아름다운 섬진강길에 속한다. 강이라기보다 개울에 가까운 물줄기는 청량한 소리를 내며 주로 암반 위를 미끄러져 내려간다. 섬진강의 물줄기가 속삭이듯 길동무를 하는 이 길은 섬진강 자전거길 중에서도 백미로 꼽힌다. '시인의 길 전망대'에서 휴식을 취하던 장재혁 씨는 "좁은 협곡에 굽이가 많은 풍광이 너무 좋은, 때 묻지 않은 포근한 강"이라며 "섬진강의 자연 그대로를 느끼며 라이딩이 가능한 코스"라고 말한다.
강물은 천담마을을 지나 이광모 감독의 1998년 영화 '아름다운 시절'의 촬영지인 구담마을에 이른다. 섬진강을 따라 구릉과 비탈에 가옥이 들어선 구담마을은 마을 앞 섬진강에 자라가 많이 서식하고 있어 구담(龜潭)이라 했고, 아홉 개의 소(沼)가 있다 하여 그렇다는 설도 있다. 뿌리가 드러난 당산나무 언덕 앞에는 김용택 시인의 시비 '강 같은 세월'이 세워져 있다. "꽃이 핍니다/ 꽃이 집니다/ 꽃 피고 지는 곳/ 강물입니다/ 강같은 내 세월이었지요"



당산나무 언덕에서 매화의 아름다움 사이로 내려다보는 섬진강 풍경은 한 폭의 수채화다. 굽이굽이 흐르는 섬진강의 청류도 한눈에 들어와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준다. 당산나무 언덕에서 돌계단을 따라 강가로 내려오면 시심(詩心)을 불러일으키는 징검다리가 놓여 있고, 징검다리를 건너면 순창 내룡마을의 장군목으로 이어진다. 이곳에는 수만 년 동안 산줄기 사이를 굽이치며 흘러온 강물이 빚은 기기묘묘한 바위가 그득하다.
'장구목' '물항'이라 부르기도 하는 장군목은 풍수지리상 '용궐산 장군대좌형'이라는 형세에서 유래한 곳으로, 각양각색의 바위에는 마치 용틀임을 하며 살아 움직이는 듯한 다양한 무늬가 새겨져 있다. 그중 둘레 약 1.6m, 깊이 2m가량의 구멍이 뚫려 있어 그 모습이 마치 요강처럼 생긴 '요강바위'는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 1993년 도난당했다가 1년 6개월 만에 제자리로 돌아온 요강바위는 아이를 못 낳은 여인이 움푹 파인 구멍에 들어가 치성을 드리면 아이를 얻는다는 전설이 깃든 신비로운 바위다. 한국전쟁 때는 빨치산 다섯 명이 바위 속에 숨어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장군목에서 빠져나와 순창 명소인 향가(香佳)유원지로 향한다. 향가는 섬진강의 강물을 향기로운 물(香水), 옥출산을 아름다운 산(佳山)이라고 하여 각각 앞글자를 따다가 이름을 붙였다. 그 이름에 걸맞게 강물 위에 배를 띄워 놓으면 절로 시가 읊어지는 아름다운 풍광을 지녔다. 2013년 섬진강 자전거 도로가 만들어지고 자동차캠프장과 방갈로 등이 들어서면서 섬진강의 명소로 떠올랐다.
일제 강점기 말에 순창, 남원, 담양 지역의 쌀을 수탈하기 위해 남원에서 순창을 넘어가는 옥출산 아래 터널을 뚫고 섬진강을 가로지르는 철도 교각 공사를 진행했는데 해방이 되면서 공사가 중단됐고, 이미 깔렸던 철길도 철거됐다. 섬진강 자전거 도로를 만들면서 384m의 향가터널에 LED 조명을 설치하고 조형물 '새들의 향연'이 꾸며졌다. 도보나 자전거로만 다니게 된 터널 안은 살갗에 소름이 돋을 만큼 서늘하다. 교각 위에 상판을 얹은 향가목교 중간 지점에는 스카이워크 전망대가 놓여 있는데, 발아래로 많은 이야기를 품은 섬진강물이 흐른다.



◇ '섬진강의 무릉도원' 곡성 침실습지

곡성군을 경유하는 섬진강을 '순자강'이라고도 한다. 강은 곡성읍에서 남원의 요천을 받아들여 제법 큰 강이 되는데 합류 지점에 '여울 옆에 서 있는 정자'인 횡탄정(橫灘亭)이 서 있다. 이곳에서 12㎞ 떨어진 관촌면 가정리 청소년야영장까지의 섬진강 자전거길 곡성 구간은 섬진강 물길과 강변 철쭉 길을 따라 달리는 환상적인 코스로 명성이 높다.
'섬진강 무릉도원'으로 불리는 섬진강 변의 침실습지는 2016년 우리나라에서 22번째 국가습지보호구역으로 지정된 생태계의 보고다. 강둑에 오르면 침실습지의 전경이 펼쳐지는데, 멸종위기 야생생물 1급인 수달과 흰꼬리수리, 2급인 삵, 남생이, 새매, 큰말똥가리, 새호리기 등이 살고 있고, 각시붕어·칼납자루·긴몰개· 쉬리 등이 서식하고 있다.
탐방로 덱을 따라 습지 속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는데 습지 중간에 빨간색 '퐁퐁다리'가 놓여 있다. 강물이 불어나면 다리가 잠기는데 다리의 유실을 막기 위해 다리 중간중간 구멍을 뚫어 '퐁퐁다리'라고 불린다.



은빛으로 반짝이던 섬진강은 압록에서 보성군 일림산 중턱의 선녀샘에서 발원한 보성강을 받아들인다. 전라선 열차가 지나가는 철교와 압록교, 예성교가 강을 가로질러 놓여 있는데 옛날에 압록진이라는 나루터가 있었다. 한여름 피서지로 널리 알려진 압록유원지는 시원한 강줄기 때문인지 여름에 모기가 별로 없고 강변에는 은어회, 참게탕을 맛볼 수 있는 음식점이 즐비하다.
섬진강과 보성강이 만나 한결 넓어진 강은 구례에 이르러 더더욱 푸르고 화사한 자태를 뽐낸다. 강가에는 산수유꽃이 노랗게 꽃망울을 피웠고, 강줄기 따라 700여m 이어진 대나무 숲에서 바람이 일렁일 때마다 댓잎 소리가 서걱거린다. 대나무숲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청명한 하늘빛 닮은 푸른 물줄기가 내내 함께하고, 대나무 사이사이 오산 자락이 보인다. 자라처럼 생긴 오산을 감싸고 흐른 섬진강은 지리산과 백운산 사이를 굽이돌며 흐르면서 반월형 백사장, 목가적인 강촌 풍경, 푸른 대나무숲, 매화꽃 별천지 등 숱한 풍치를 만든다. 봄이면 섬진강과 나란히 달리는 국도 17호선과 19호선을 따라 매화와 벚꽃이 피고 진다.



◇ "오메, 몸과 마음에 꽃물이 들겠네"

구례에서 19번 국도를 따라가면 '섬진강의 동쪽'이란 뜻을 지닌 하동(河東)의 화개장터에 닿는다. 김동리의 소설 '역마'의 무대이기도 한 화개장터는 옛 시절 경상도와 전라도의 물산이 만나 흥정이 이루어진 곳으로 지금은 쌍계사까지 이어지는 환상적인 벚꽃 터널로 사람들의 발길을 끈다. 화개천을 받아들인 섬진강은 넓어질 대로 넓어지고 하얀 모래톱도 드넓게 펼쳐진다. 다사강(多沙江)이라는 이름처럼 예전에는 하얀 백사장만 있었는데 몇 년 전부터 모래톱에 잡초와 나무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지역 주민들은 한국수자원공사의 다압취수장 때문에 유량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대하소설 '토지'의 주 무대인 악양 벌판, 봄 햇살이 내려앉은 강변의 평사리공원을 지나면 조선 영조 때 강바람과 모래바람의 피해를 막기 위해 만든 하동송림(천연기념물 제445호)이 반긴다. 오랜 세월을 버텨온 '맞이나무' '원앙나무' '고운매 나무' '못난이 나무' 등 900여 그루 노송들이 맑은 물결, 고운 빛깔의 모래톱과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 같은 쉼터를 만들어낸다.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솔향 가득한 산책로를 거닐어보면 노송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이 싱그럽다.
강 건너편은 전남 광양 땅이다. 구례에서 매화마을로 향하는 섬진강 변 주변으로 청매(靑梅), 홍매(紅梅), 백매(白梅) 등 꽃구름이 내려앉는다. 꽃 중에 가장 먼저 봄소식을 전한다는 매화는 꽃잎이 바람에 날리고 강물에 떨어지면 그야말로 절경이다. 백운산 자락의 매화마을 중에서 매실 명인인 홍쌍리 여사가 50년 동안 일군 청매실농원이 가장 아름답다. 매화꽃이 마치 백설이 내린 듯 언덕을 뒤덮고, 매화꽃 너머로 섬진강 푸른 물결이 출렁인다. 3천여 개에 달하는 장독대 위에 매화비가 내리면 누구나 감탄하는 진경산수화다.



정호승 시인은 "섬진강에 꽃 떨어진다/ 인생을 추위 속에 살아도/ 결코 향기는 팔지 않는/ 매화꽃 떨어진다…(중략)…섬진강에 가서/ 지는 매화꽃 보지 않고/ 섣불리/ 인생을 사랑했다고 말하지 말라"고 읊었다.
봄기운을 가득 머금은 섬진강은 섬진교와 경전선 철교를 지나 광양 망덕포구에서 바다와 몸을 섞는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8년 4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changho@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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