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쉿! 우리동네] "나 밀양사람…" 의열 정신 흐르는 밀양 해천

입력 2018-03-31 11:00  

[쉿! 우리동네] "나 밀양사람…" 의열 정신 흐르는 밀양 해천
김원봉·윤세주 등 독립운동가 수두룩…전국 첫 의열기념관
'약산로','석정로' 도로명에 조상 얼 새겨…"잊지 않겠습니다"




(밀양=연합뉴스) 최병길 기자 = 경남 밀양 시내 중심가에는 아주 작은 하천이 하나 흐른다. 시내 내일동과 내이동 경계를 따라 흐르는 길이 600여m인 이 하천의 이름은 '해천(垓川)'이다.
한때 곳곳이 콘크리트로 덮여 있었지만 생태하천 복원사업을 거쳐 2015년 다시 세상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원래 해천은 조선 성종 10년인 1479년 밀양읍성을 외부 공격으로부터 방어하려고 만든 너비 5.9m 해자였다.
이 작은 해천을 낀 동네에는 일제 강점기 나라를 되찾기 위해 사투를 벌인 의열(義烈) 정신이 살아 숨 쉰다.
해천 주변 반경 500m 이내에 살던 사람 가운데 독립운동으로 서훈 받은 이만 26명에 이른다.
특히 이 동네에 살다 멀리 만주 땅에서 조선 독립에 함께 몸을 던진 죽마고우(竹馬故友) 이야기는 듣는 이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 "나 밀양사람 김원봉이요"
이달 7일 해천 곁에서는 역사적인 기념관 한 곳이 문을 열었다. 바로 의열기념관이다. 기념관이 선 곳은 밀양시 내이동 901번지(약산로 노상하1길 25-12).
이곳은 일제 강점기 의열단장,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교장, 조선민족혁명당 총서기, 조선의용대 총대장, 한국광복군 부사령, 임시정부 군무부장(국방장관)을 역임한 항일독일운동가 약산(若山) 김원봉(1898∼1958) 생가터다.
화려한 독립운동 이력에도 김원봉이란 이름은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다.
2015년 천만 관객을 돌파하며 흥행몰이를 한 영화 '암살'에서 나온 김원봉(조승우 분)의 짧은 명대사 이후 사람들의 뇌리에 많이 남았다.
"가서 (김구) 선생께 전하시오. 나 밀양사람 김원봉이요."
같은 독립군 사이에서도 제대로 정체를 모른 신출귀몰한 인물이었던 김원봉은 일본군의 집요한 추적에도 단 한 번도 체포되지 않았다.
일제가 그를 붙잡기 위해 내건 현상금은 당시 100만원. 현 화폐단위로 환산하면 무려 320억원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김구 등 당시 내로라하는 수많은 독립운동가 중 최고 현상금이었다.


의열기념관에는 의열단 영상자료, 김원봉 연설장면 동영상 등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김원봉의 막내 여동생 김학봉(88) 씨는 여전히 고향 밀양을 지킨다.
의열기념관 개관식에 참석한 김 씨는 오빠의 독립운동이 진정으로 인정받는 날이 오길 간절히 소망했다.
김원봉은 대한민국에서 독립운동 유공 훈장을 받지 못했다.
손정태 밀양문화원장은 "그동안 4차례나 약산 서훈을 위해 발 벗고 뛰었지만,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한 자라는 조항 때문에 계속 좌절됐다"고 말했다.
손 원장은 "언젠가 통일이 된다면 약산은 남북이 공히 인정하는 독립운동가이자, 최고의 훈장을 가장 먼저 안겨야 할 사람"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김원봉의 아내이자 동지로 함께 독립운동을 펼친 박차정(1910∼1944)은 약산의 선영인 밀양시 부북면에 안장됐다.
박차정은 1931년 의열단을 주도하던 약산과 결혼했다.
그는 1939년 2월 일제와 중국 장시 성 곤륜산 전투에서 총상을 입은 후유증으로 광복을 보지 못한 채 1944년 35세 젊은 나이에 순국했다.
김원봉은 해방 후 귀국 때 직접 유해를 안고 와 손수 안장했다.


박차정에게는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문재인 대통령은 제99주년 3·1절 기념식 때 기억해야 할 여성독립운동가 6명 가운데 한 명으로 박차정을 호명했다.

◇ 약산의 죽마고우, 육사의 절친 윤세주
해천을 낀 밀양시 내이동 880번지는 독립운동가 석정(石正) 윤세주(1901∼1942) 생가다. 약산 생가 바로 옆이다.
동네 사람들은 "해천은 석정과 약산이 어릴 적부터 물놀이를 함께하며 꿈을 키운 추억의 공간"이라고 자랑했다.
세 살 위 약산이 먼저 고향을 떠나 만주에서 조선 독립을 위한 의지를 불태울 때 석정은 1919년 3월 고향에서 만세운동을 주동한다.
수천명이 모인 밀양 장날 당당히 독립선언서를 낭독할 때 그의 나이 18세였다.


밀양독립운동사연구소 최필숙 부소장은 "밀양 3·13 만세운동 때 펄럭인 수많은 태극기는 모두 윤세주 집에서 나온 돈과 천으로 만들었다"며 "석정은 땅을 모두 팔아 전 재산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내놨고 목숨까지 바쳤던 분"이라고 소개했다.
석정은 1919년 11월 만주 지린성에서 죽마고우인 김원봉과 운명적으로 만나 마침내 항일비밀결사인 의열단을 조직한다.
그는 의열단 중에서 가장 어린 나이였다.
당시 의열단 창단 멤버 13명 중 5명이 밀양사람이다.
해천 변 윤세주 생가터에는 1934년 4월 23일 의열단 조선혁명간부학교 제2기 졸업식 훈화 때 했던 석정의 뜨거운 어록이 새겨져 있다.
석정은 1942년 5월 일제와 중국 태항산 전투에서 다리에 총을 맞고 조선 독립을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최 부소장은 "석정은 독립운동의 분열 양상을 하나로 모으고 통합하려는데 엄청나게 노력했다"며 "통일에 대한 의지가 가장 강했던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최 부소장은 석정의 절친한 친구로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인 이육사(1904∼1944)와 아름다운 우정 이야기도 들려줬다.
석정과 육사는 의열단에서 생사고락을 함께했다.
1941년 발행된 잡지 조광(朝光) 1월호 연인기(戀印記)에 따르면 육사는 동지이자 벗으로 흠모한 석정과 상해에서 헤어질 때 자신이 가장 아끼던 비취 도장에 '증(贈)S 1933.9.10 육사(陸史)'라고 새겨 건넸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S'는 석정의 이니셜로 추정된다.
육사는 1944년 중국 베이징에 있던 일본영사관 감옥에서 광복의 햇빛을 보지 못한 채 작고했다.
옥사한 육사의 시신을 수습한 사람은 역시 의열단에서 활동한 여성독립운동가 이병희(1918∼2012)다.


◇ 의열 정신 새긴 '약산로·석정로'…"잊지 않겠습니다"
밀양 해천 주변에는 눈길을 끄는 도로명이 있다.
해천을 가로지르는 길 '약산로'와 해천을 따라 평행으로 흐르는 길 '석정로'가 그것이다. 밀양시가 도로명 개정 때 후세에 영원히 남길 이름으로 붙였다.
밀양사람들이 마음속에 간직한 약산과 석정은 그렇게 밀양사람들과 일상 속에서도 만난다.
밀양시는 해천을 따라 항일운동 테마거리도 만들었다.
주민들은 주택과 가게의 문과 담벼락을 독립운동 테마거리 조성을 위해 흔쾌히 제공했다.
거리에는 태극기 변천사와 조선의용대가 함께 찍은 실물 크기 사진 벽화 등 다양한 독립운동사가 흥미롭게 조성됐다.
시는 앞으로 해천 일원 도시재개발사업을 통해 의열단기념관, 의열공원 등 전국에 하나뿐인 의열투쟁 독립운동 지역을 구상하고 있다.
박일호 밀양시장은 "최근 화재 참사 등 어려운 일을 겪었지만, 전국에서 가장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밀양의 자긍심으로 위기를 극복했다"며 "밀양의 의열투쟁 역사와 정신을 이어나겠다"고 말했다.

choi21@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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