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이매진] 경주 독락당·옥산서원

입력 2018-05-11 08:01  

[연합이매진] 경주 독락당·옥산서원
봄빛 쏟아지는 날 홀로 즐거이 마음 씻는다

(경주=연합뉴스) 이창호 기자 = "좋아하고 싫어하고 취하고 버리는 것이 의리에 맞고 많은 사람의 정서에 화합하면 반드시 천심과 합치할 것이다."
일두 정여창, 한훤당 김굉필, 정암 조광조, 퇴계 이황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동방오현(東方五賢)으로 불리는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1491∼1553)은 중종에게 올린 상소(上疏) '일강십목소'(一綱十目疏)에서 '민심이 곧 천심'이라고 강조했다. 나라를 다스리는 10가지 원칙을 밝힌 일강십목소는 이황의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 남명 조식의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와 함께 임금에게 올렸던 유명한 글이다.



조선 시대 성리학의 거두였던 이언적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경주 양동마을의 대표 고택인 서백당(書百堂)에서 태어났다. 외가인 월성 손 씨의 대종가에서 태어난 이언적은 24세에 문과에 급제한 후 벼슬길에 올랐으나, 중종 25년(1530) 김안로의 등용을 반대하다 관직에서 물러났다. 1532년 낙향해 양동마을에서 10㎞가량 떨어진 안강읍 옥산리에 독락당(獨樂堂·보물 제413호)을 지었다. 자계옹(紫溪翁), 자옥산인(紫玉山人)이라 자처했던 이언적은 독락당을 둘러싸고 있는 산에 도덕산(道德山), 무학산(舞鶴山), 화개산(華蓋山), 자옥산(紫玉山) 등의 이름을 붙였다. 자계(紫溪)로 불린 계곡의 다섯 군데 바위는 관어대(觀漁臺), 영귀대(詠歸臺), 탁영대(濯纓臺), 징심대(澄心臺), 세심대(洗心臺)로 명명하고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삶을 살면서 성리학에 몰두했다.
은둔하며 학문에 침잠(沈潛)한 이언적은 5년 후 다시 벼슬길에 올랐으나 1547년 훈구파가 사림의 잔당을 제거하기 위해 일으킨 양재역벽서사건에 연루돼 평안도의 오지인 강계로 유배됐다. 6년 후 1553년 찬바람이 부는 유배지에서 숨을 거뒀다. 이언적은 '구인록'(求仁錄),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 '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 등의 저술을 남겼다. 기(氣)보다 이(理)를 중시하는 그의 학설은 영남 사림파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했고, 퇴계(退溪) 이황(李滉)에게 계승됐다.
윤영희 문화관광해설사는 "이언적이 직접 설계하고 이름 붙인 독락당은 홀로 은거하며 자연과 벗하고 학문과 수양에 전념하고자 한 주인의 의도가 담겨 있다"며 "넓은 반석 위로 흐르는 자계천과 계곡에 면한 절벽에 걸터앉은 정자 '계정'(溪亭), 운치 있는 흙 돌담과 어우러져 자연과 더불어 하나 되는 고건축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 바위와 맑은 물, 숲과 정자 어우러진 독락당

'홀로 즐기는 집'이라는 독락당은 안채, 사랑채, 별당(계정), 사당, 공수간(供需間), 행랑채(숨방채) 등이 합쳐져 큰 살림집을 이룬다. 각 영역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독립된 공간을 이루는데, 독락당은 사랑채를 말하지만 지금은 집 전체를 의미한다. 세 칸 솟을대문에 들어서면 문간 마당이 있고 오른쪽으로 솔거노비들이 거주하며 음식을 장만하던 공수간, 앞쪽으로 청지기 등 측근 노비들이 거처하던 행랑채를 마주하게 된다. 행랑채 뒤편으로 여성들의 주거공간인 안채가 들어서 있다. 경주 지역의 사대부 가옥의 보편적인 특징인 'ㅁ' 자형 공간구성을 취하는 안채는 후손의 거주 지역으로 외부인 출입금지 구역이다.
행랑채와 공수간 사이의 문을 지나면 독락당과 공수간 사이의 골목길이 인상적인데, 토담과 토담 사이의 흙길을 지나면 자계천에 이른다. 투박한 흙담과 흙담 사이의 흙길이 편안하게 다가온다. 발길을 돌려 사랑채 문을 밀고 들어서면 다른 사대부 집의 사랑채와 달리 기단과 마루를 한껏 낮춘 독락당과 정면에 걸린 편액 '옥산정사'(玉山精舍)가 눈에 들어온다. 옥산정사의 편액은 이황이 썼고, 마루 안쪽의 독락당 편액은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산해의 글씨다.



이언적이 자연과 벗하며 책을 읽던 공간인 독락당은 마루와 사랑방으로 구성돼 있다. 사랑방 서쪽에는 한 칸의 작은 방이 붙어 있는데, 책을 쌓아두는 책방인 동시에 독락당과 안채를 연결하는 매개공간이다. 사랑방에 앉으면 자연을 향해 열린 구조인 독락당이 은거를 위한 건축물임을 느낄 수 있다. 안채 건물과 토담으로 둘러싸여 외부로 향하는 시선이 차단된 독락당은 자연을 향해서는 열린 독특한 구조로 되어 있다. 사랑방에 앉아 뒤쪽 창문으로 자신이 가꾸는 약쑥 밭을 내다볼 수 있고, 계곡 쪽 담장 중간에 낸 나무로 된 사각형 살창을 통해서는 흐르는 계곡 물을 바라볼 수 있다. 토담에 뚫린 살창이 이채롭고, 그 사이로 들리는 계곡 물소리로 마음의 묵은 때가 홀연히 씻기는 듯하다. 홀로 머물다 가고 싶은 곳이다.
독락당에서 뒤편의 약쑥 밭을 지나 문을 밀고 들어가면 독락당의 별당인 계정(溪亭)이다. 동쪽의 계곡으로 면한 부분은 정자인 계정이고, 계정에서 'ㄱ'자로 꺾어 지은 2칸 방은 양진암(養眞庵)이다. 자개천에 놓인 자연암반 위에 기둥을 세워 날렵한 모습으로 지은 계정은 2칸 대청과 1칸 온돌방으로 이뤄졌고, 쪽마루를 덧대어 계자난간을 두른 소담하고 작은 집이다. 난간에 기대어 계곡을 내려다보면 마치 공중에 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기존의 띠집을 헐고 계정과 양진암을 지었는데, 양진암은 정혜사 승려와 교류했던 이언적이 계정을 찾은 정혜사의 스님이 머물도록 배려한 공간이라고 한다.


흐르는 개울과 숲을 내 정원처럼 감상할 수 있는 계정의 참모습은 계곡 쪽으로 나가야 볼 수 있다. 독락당에서 계정으로 길게 이어지는 토담과 관어대(觀魚臺)에 우뚝 솟아 있는 계정, 그리고 맑은 개울이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이 된다. 어느 것 하나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독락당의 선계(仙界)인 듯한 아름다운 풍광은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독락당에서 북쪽으로 400m쯤 올라가면 신라 시대 사찰인 정혜사지(淨惠寺址)와 높이 5.9m의 정혜사지 십삼층석탑이 남아 있다. 국보 제40호로 지정된 이 석탑은 흙으로 쌓은 1단의 기단 위에 13층의 몸돌을 차곡차곡 쌓은 것으로 1층 몸체 중앙에는 불상을 모시는 감실이 있다. 감실의 부처는 사라지고 없다. 2층부터는 몸돌의 너비와 높이가 크게 줄어들지만 몸돌이 절묘한 비례를 이룬다. 신라 시대 석탑 중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양식이다.



◇ 조선 시대 명문사립학교 '옥산서원'

독락당을 나와 자개천을 따라 10여 분 걸어 내려가면 계곡의 너럭바위에 새겨진 '洗心臺'(세심대)라는 이황의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세심대 옆 외나무다리를 건너면 회재 이언적을 배향한 옥산서원(玉山書院)이다. 이언적이 죽은 지 20년 뒤인 1572년, 경주부윤 이제민이 유림들과 함께 묘우(廟宇)를 건립했고 1574년에는 선조로부터 '옥산서원'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아 사액서원(賜額書院)이 되었다. 화개산을 주산으로 해서 앞으로는 자개천이 흐르는 곳에 자리 잡은 옥산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그대로 살아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다.
옥산서원의 정문인 역락문(亦樂門)은 논어 학이편의 '유붕자원방래(有朋自遠方來) 불역락호(不亦樂乎)'에서 따온 것으로 편액은 명필 한석봉의 글씨다. 학문의 즐거움을 아는 사람만 출입하라는 뜻으로 조선 시대 명문사학 중 하나였던 옥산서원에 입학하려면 생원시에 합격하거나 추천을 받아야만 가능했다. 역락문을 들어서면 누각인 무변루(無邊樓) 앞으로 자계천에서 서원 안으로 끌어들인 물이 흐른다. 물길을 건너 무변루 통문을 지나 돌계단에 올라서면 강학공간의 마당이다. 마당은 유생들의 휴식 공간인 무변루와 강당인 구인당(求仁堂) 사이에 기숙사인 동·서재가 끼워진 형식으로 구성된 정방형의 공간이다.



2층으로 이루어진 무변루는 총 7칸이지만 마당 쪽에서는 5칸으로 인식되는 묘한 건물이다. 통나무 계단으로 오를 수 있는 누마루의 가운데 3칸은 대청이고, 그 양측에는 1칸의 온돌방이 있다. 온돌방 옆 1칸의 누마루에는 계자난간을 둘렀다. 무변루는 사방이 확 트인 병산서원의 만대루와는 달리 서원 밖의 경관을 차단하는 판문을 설치했다. 판문을 열어젖히면 자개천과 자옥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본래 이름은 납청루(納淸樓)였으나 훗날 문신이자 학자인 노수신이 주돈이의 '풍월무변'(風月無邊)에서 뜻을 취해 무변루로 고쳤다.
무변루 맞은 편 중앙에는 이언적이 쓴 '구인록'(求仁錄)에서 이름을 따온 구인당(求仁堂)이 있다. 강의와 토론이 열렸던 구인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3칸의 대청마루와 대청 양쪽의 온돌방으로 구성됐다. 교수와 유사(有司)들이 기거하던 방 앞에는 명(明)과 성(誠)을 뜻하는 양진재(兩進齋), 경(敬)과 의(義)을 뜻하는 해립재(偕立齋) 편액이 걸려 있다. 다른 서원의 강당과 달리 온돌방 앞에 툇간이 없다.



구인당은 명필로 당대를 주름잡던 대가들의 친필을 감상할 수 있는 즐거움이 있다. 강당 처마에 걸린 편액 '옥산서원'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다. 굳세고 강직한 느낌을 주는 이 편액은 1839년 화재로 구인당이 소실돼 증수하면서 다시 써서 헌종이 하사한 것이다. 대청에 걸린 또 하나의 '옥산서원' 편액은 문신이자 명필로 알려진 이산해의 글씨다. 창건 당시 편액으로 추사 김정희의 편액보다 크기가 작다. 두 개의 편액은 보통 편액과 달리 흰 바탕에 검은 글씨인데, 이는 임금이 하사한 사액편액이기 때문이다. 마루 안쪽에 걸려 있는 편액 '구인당'은 무변루와 함께 한석봉이 썼다.
구인당 대청마루에 앉으면 무변루 지붕 너머로 자옥산의 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언적은 "천만권 경전과 서적들이 오로지 '인'(仁)을 떠들고 있으나 이루어지는 것이 없다"고 개탄했는데 오늘날에도 그의 올곧은 선비정신이 그립다.
구인당 앞마당 좌우에는 기숙사인 동·서재가 강학 공간을 이룬다. 동재인 민구재(敏求齋)는 '민첩하게 진리를 구한다'는 뜻이고, 서재인 암수재(闇修齋)는 '드러나지 않은 가운데 묵묵히 수양한다'는 뜻이다.
구인당 뒤편은 제향 공간이다. 평소엔 잠겨 있는 체인문(體仁門)을 들어서면 이언적의 위패를 모신 체인묘(體仁廟)와 전사청이 있다. 사당은 신성한 공간으로 주위를 담장으로 둘렀고, 사당의 담장 밖 왼쪽에는 선조 10년(1577)에 세워진 이언적의 신도비각(神道碑閣)이 자리하고 있다. 이언적의 업적을 기리는 신도비의 비문은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이 짓고 글씨는 이산해가 썼다.
옥산서원에는 고려 시대 새긴 목판 외에 조선 태조 때와 중종 7년(1512)에 각각 새롭게 만든 목판을 혼합해 선조 6년(1573)에 경주부에서 찍은 '삼국사기' 완질본(국보 제322-1호), 인(仁)에 관한 학설을 종합적으로 고찰한 '구인록' 등의 서책과 이언적의 유품들이 보존돼 있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8년 5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changho@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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