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이매진] 세계유산 山寺에서의 하룻밤

입력 2018-07-06 08:01  

[연합이매진] 세계유산 山寺에서의 하룻밤
눈 씻고, 귀 씻고, 마음도 씻는다



(해남=연합뉴스) 한미희 기자 = 흔히 절로 부르는 사찰(寺刹)은 승려가 불상을 모시고 불도(佛道)를 닦으며 교법(敎法)을 펴는 집이다. 도(道)를 얻고자 수행하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도량(道場)이라고도 하고, 승원·가람(승가람마) 등 수십 가지의 이름을 갖고 있다. 서기 4세기 우리 땅에 처음 유입된 불교는 종교 이상의 의미를 품고 있다. 국교로 융성했던 역사이자 전통예술의 보고(寶庫)다. 토착 신앙, 풍수와 만나 명산에 자리 잡은 한국의 사찰은 당대의 문화 그 자체이기도 하다.
산중에서 주변의 지형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자리 잡은 사찰이 '산사(山寺), 한국의 산지승원'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앞두고 있다. 해남 대흥사, 양산 통도사, 영주 부석사, 보은 법주사가 그 주인공이다. 지난 6월 초순 우리 문화의 보물단지인 사찰이 세계 유산으로 인정받기를 기원하는 여행길에 나섰다. [※편집자 주: 세계유산위원회(WHC)는 6월 30일 바레인에서 열린 회의에서 이들 산사를 포함해 안동 봉정사, 공주 마곡사, 순천 선암사 등 한국의 사찰 7곳을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하는 결정을 내렸다.]




◇ 해남 대흥사, 작은 마을 같은 사찰

땅끝마을, 전라남도 해남으로 향했다. 서울에서 남쪽으로 달리는 길 내내 걷히지 않는 지독한 미세먼지로 시야는 갑갑하고 목이 따끔거렸다. 대흥사로 들어가는 두륜산 숲길이 시작되자마자 마법처럼 숨이 탁 트였다. 울창한 구림구곡(九林九曲)의 숲길을 지나며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그저 장관이다.
사찰의 시작점을 알리는 일주문을 지나 사찰로 들어가는 관문인 해탈문에 서면 탁 트인 대흥사 앞마당이 한눈에 들어온다. 한참을 숲길로 들어온 것을 잊을 만큼 널찍한 분지다. 초의선사가 만들었다는 굴곡 있는 연못 무염지가 보이고 낮은 돌담이 당우(堂宇)를 둘러싸고 있어 단정하고 소박하게 꾸며놓은 작은 마을 같은 느낌이다. 꽤나 큰 사찰인데도 산이 포근히 둘러싸고 있어 아늑하다. 사찰을 지키는 사천왕문이 없는 이유도 북쪽의 월출산, 남쪽의 달마산, 동쪽의 천관산, 서쪽의 선은산이 대흥사를 감싸고 있는 풍수명당이기 때문이라 한다. 일찍이 이 터의 가치를 알아본 서산대사는 '삼재가 미치지 못할 곳, 만 년 동안 훼손되지 않는 땅'이라고 했다. 묘향산에서 입적하며 의발(衣鉢, 가사와 공양 그릇)은 해남 대흥사에 두라고 한 이유다.
가람배치(사찰의 건물 배치)도 독특하다. 해탈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있어야 할 대웅전이 보이지 않는다. 김광수 문화유산해설사는 손가락으로 멀리 두륜산 봉우리들을 가리키며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이었다. 부처님의 머리, 가슴 앞에서 모은 손, 부처님의 발이 그려진다. 누워있는 청정법신 비로자나 부처님이다. 불자들은 해탈문 앞에서 이 비로자나 와불상을 향해 참배한다.



왼쪽으로 몸을 돌려 대웅보전으로 가는 길에 서 있는 느티나무 연리근(連理根)은 관광객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장소다. 가까이 자라는 나무가 만나 합쳐지는 것을 '연리'라고 하는데, 가지가 만나면 연리지, 줄기가 만나면 연리목, 뿌리가 만나면 연리근이라 한다. 오랜 세월 함께 햇볕과 바람을 맞으며 두 몸이 하나가 된다 하여 '사랑나무'라 일컬으며 부부와 연인의 사랑을 기원한다. 당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을 소재로 한 백거이의 시 '장한가'에서도 "땅에서 만난다면 연리지가 되기를 원하네(在地願爲連理枝)"라는 구절에 등장한다.







◇ 조선 명필의 글씨들

금당천을 건너면 대웅보전(大雄寶殿)이다. 대웅보전이 사찰의 한가운데가 아닌 북쪽에 물러서 있는 것도, 사찰 규모와 비교하면 대웅보전 마당이 작은 것도 여느 사찰과는 다른 점이다.
대웅보전이 있는 북원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조선 후기 쌍벽을 이루는 두 명필, 원교 이광사(1705∼1777)와 추사 김정희(1786∼1856)의 글씨다. '대웅보전'이 이광사의 글씨, 왼편 요사채인 백설당에 걸린 '무량수각'(无量壽閣)이 추사의 글씨다. 두 명필의 글씨가 나란히 걸리게 된 일화도 유명하다.
완도군 신지도에 유배 온 이광사는 대흥사의 대웅보전과 침계루, 천불전의 편액을 썼다. 이광사의 '원교체'는 18세기 조선의 고유서체인 '동국진체'를 완성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추사는 원교체를 무시하고 깎아내렸다.
제주도에 유배 가는 길에 친구인 초의선사가 있는 대흥사에 들른 추사는 이광사의 글씨를 보고는 '저것도 글씨냐, 당장 떼어버려라' 하고는 자신의 글씨를 대신 걸게 했다. 8년의 유배 생활을 마치고 서울로 가는 길에 다시 대흥사에 들른 추사는 과거 자신의 교만을 인정하며 원교의 편액을 다시 걸라 했다 한다.
호남의 명필 창암 이삼만(1770∼1845)은 대흥사 한가운데 남원의 출입문인 가허루(駕虛褸)의 현판 글씨를 썼다. 평생을 초야에 묻혀 글씨만 쓴 창암은 유배길에 오른 추사 앞에 자신의 글씨를 내놓는다.
16살이나 어린 추사는 '시골에서 밥은 먹겠다'며 창암을 모욕했다. 창암은 분노하는 제자들을 달래며 '글씨를 아는지는 몰라도 묵향은 모르는 사람'이라 했다 한다. 유배 생활 동안 깨달은 추사는 창암을 찾아 사과하려 했으나, 창암이 세상을 떠난 뒤였다. 추사는 애통해 하며 창암의 묘비문을 남겼다.

◇ 사찰 안의 유교 사당 '표충사'

사찰 남쪽 별원에는 서산대사와 그의 제자인 사명대사, 처영대사를 기리는 유교 사당인 표충사(表忠祠)가 있다. 편액은 정조의 친필이다. 임진왜란 당시 73세의 나이로 전국 승군 5천 명을 통솔하는 팔도도총섭이 된 서산대사는 평양성을 탈환하는 데 큰 공을 세우고, 왕이 환도한 뒤 묘향산으로 돌아가 임진왜란이 끝나고 6년 뒤 입적했다.



서산대사의 유촉에 따라 선조가 하사한 금란가사(법의)와 발우(공양 그릇), 염주를 비롯해 법라(소라 껍데기로 만든 군악기), 호패 등의 유물이 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창건 시점도 정확히 알려지지 않은 대흥사는 서산대사의 유촉으로 주목받은 이후 13명의 대종사와 13명의 대강사를 배출한 큰 절이 됐다. 일주문에 새긴 '선림교해만화도량'(禪林敎海滿華道場·참선과 가르침이 활짝 핀 도량)이 그 뜻이다.
일주문을 지나자마자 보이는 부도전에는 스님의 사리를 봉안한 탑인 부도와 비문을 새긴 탑비 80여 기가 즐비하다. 이중 서산대사의 부도는 보물로 지정돼 있다. 정조의 왕명으로 봉행된 서산대제를 재현하고 있는 대흥사는 다시 찾아온 한반도 평화 분위기를 타고 올가을 묘향산 제향을 추진하고 있다.







◇ 산사의 가장 고요한 시간

사찰을 한 바퀴 둘러보고 남원 가장 위쪽에 깔끔하게 지어진 템플스테이 숙소 심검당에 짐을 풀었다. 이른 저녁 공양을 마치고 나면 산 사이로 붉은 노을이 찾아오고 땅거미가 지는 동안 잠들기 전의 새 우는 소리와 종 치는 소리, 목탁 두드리는 소리, 나무 사이로 바람이 오가는 소리가 귀를 씻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마음이 꽉 차는 시간이다.
모두가 잠이 든 이른 새벽, 산사의 적막을 깨우는 것은 목탁 소리다. 목탁을 치는 스님이 산사를 돌며 대중과 산천초목을 깨우고, 이어 종소리가 들리면 예불이 시작된다. 아침 공양을 마치고 두륜산을 올랐다. 어느 때보다 깨끗한 산의 새벽 공기는 놓치기 아깝다. 산은 높지 않지만 가파른 돌산이라 초심자라면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이 좋다. 열심히 오르면 40분, 여유 있게 오르면 1시간이면 북미륵암에 도착한다. 샘물로 목을 축이고 가쁜 숨을 고른 뒤 용화전으로 들어갔다. 암벽에 조각된 후덕한 마애여래좌상(국보 제308호)을 마주하면 이른 아침부터 땀을 흘린 수고가 보상된다. 불자가 아니더라도 느껴지는 감흥이 있다.





0.6㎞만 더 가면 대흥사가 처음 시작된 곳이라는 만일암터에 하늘에서 쫓겨난 천동과 천녀가 불상을 조각하는 동안 해를 매달아 놓았다는 설화를 간직한 천년수가 있다. 수령 1천 년이 넘은 이 느티나무는 올해 초 역사 속에 '전라도'라는 이름이 등장한 지 1천 년이 된 해를 기념하는 '천년나무'로 지정됐다.
천년나무를 보러 가는 대신 부처님 손바닥 모양 같은 자연 암반 위에 세워진 동삼층석탑을 지나 널따란 바위 위에 앉았다. 산이 바다를 이루는 광경이 내려다보인다. 김경숙 템플스테이 팀장이 안내한 명상 명당이다. 눈앞에서 안개가 흐르며 바로 옆 바위를 가렸다 드러낸다. 새소리를 배경 음악 삼아 언제까지고 앉아 있고 싶은 곳이다.



◇ 초의선사와 추사 김정희

이끼 낀 바위를 타고 내려와 길가에 잘 익은 산딸기를 따 먹으며 일지암으로 향했다. 서산대사와 함께 대흥사를 상징하는 초의선사가 지은 암자다. 이곳에서 초의선사는 차와 선은 하나라는 다선일미(茶禪一味) 사상을 담은 '동다송'(東茶頌)을 펴냈고,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와 차를 통해 교류했다.
추사는 초의에게 빨리 차를 보내달라고 조르는 편지를 자주 보냈고, 차에 보답하는 '명선'(茗禪)을 써서 남겼다. 연못에 돌을 쌓고 기둥을 세운 누마루나, 가운데 방 한 칸을 두고 사면에 툇마루를 두른 정자의 운치가 그만이다. 초의선사가 열반에 든 뒤 폐허가 됐다가 복원한 것이다. 초의선사의 다도 정신을 기리는 초의문화제가 매년 열린다.
등산로를 다 내려오면 표충사 뒤편 호젓한 곳에 스님들이 참선하는 선원으로 사용되는 대광명전 구역이다. 대광명전은 초의선사가 유배 중이던 추사의 방면과 축수를 위해 지은 전각이다. 동국선원의 편액은 추사의 글씨다.
이 조용한 선원을 찾는 관람객이 많아진 이유는 따로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사법고시를 준비하던 곳이기 때문이다. 선원은 일반인이 출입할 수 없는 곳이지만, 문 대통령 당선 이후 문의가 쇄도하면서 안거 기간을 제외하고 개방 중이다. 문 대통령이 묵었던 요사채 7번 방 앞에는 아예 안내문이 붙었다.
문 대통령은 대흥사에서 공부하던 시절 차를 배운 이후 차를 즐긴다고 밝힌 바 있다. 전통방식으로 소량 생산되는 대흥사 차는 청와대에 선물로 보내지기도 했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8년 7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mihee@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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