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이매진] 세상을 이어주던 한양의 돌다리

입력 2018-08-07 08:01  

[연합이매진] 세상을 이어주던 한양의 돌다리
청계천에만 24개…흥미진진했던 그 역사 속으로

(서울=연합뉴스) 임동근 기자 = 한양으로 불리던 서울은 태조 3년(1394년) 조선의 도읍이 된 후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등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624년의 역사는 곳곳에 무수한 흔적을 남겼는데, 대표적인 것이 돌다리다.



조선왕조는 한강 이북에 도읍을 정한 후 경복궁, 종묘와 사직단을 짓고 백악산, 낙산, 남산, 인왕산을 이어 도성을 축조하고 성의 내외부를 연결하는 문 8개를 냈다. 한양 복판에는 동서로 가로지르는 하천이 흘렀다. 이 하천은 도성을 남북으로 나누었는데 북쪽에는 궁궐, 종묘와 사직단, 주요 관청, 사대부의 마을이 들어섰고, 남쪽에는 일반 백성의 터전이 형성됐다.
하지만 이 하천은 산으로 둘러싸인 지형, 집중호우, 물이 잘 스미는 모래하천이란 특성으로 수시로 범람해 백성의 삶을 위협했다. 이에 태종은 1411년 개거도감(開渠都監)을 설치해 하천을 정비하고 축대를 쌓게 했다. 개거도감은 1412년 개천도감(開川都監)으로 바뀌었다. 물길을 열다는 뜻의 '개천'은 이 하천의 이름으로 사용됐다. 개천은 바로 청계천의 옛 이름이다. 하천 공사에는 전라·경상·충청 백성 5만2천800명이 투입됐고 공사는 두 달 남짓 걸렸다고 한다. 그리고 개천에는 총 24개의 다리가 놓였다. 이 중 현재까지 남아 있는 다리는 광통교, 수표교, 살곶이다리뿐이다. 나머지는 완전히 사라지거나 현대적인 다리에 모전교, 장통교, 모전교 등 옛 이름만 붙어 있다.
우리나라 다리는 크게 보다리와 구름다리로 나뉜다. 보다리는 디딤돌을 기둥으로 지탱하고, 홍예라고 불리는 구름다리는 무지개 모양 구조물로 디딤돌을 떠받친 것을 말한다. 보다리는 세우기 쉽지만 구조상 불안정하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이 적은 이유다. 민간에서는 주로 보다리를, 궁궐이나 사찰에서는 구름다리를 놓았다.



◇ 광통교, 정월 대보름 다리밟기 명소

현재 예금보험공사와 관정빌딩 사이 청계천을 가로지르는 광통교는 경복궁~육조거리~종루(종각)~숭례문으로 이어지는 길을 연결하는 도성에서 가장 큰 다리였다. 원래 위치는 지금보다 동쪽으로 155m 떨어진 광교사거리. 태조가 도성을 건설할 때 토교(土橋)로 지었다가 태종 10년(1410) 홍수로 유실되자 석교(石橋)로 다시 건설했다. 한양의 행정구역 중 하나인 광통방에 있어 광통교 또는 광교라 불렀다.
광통교에는 태종과 신덕왕후 강 씨(태조의 계비)와의 정치적 적대 관계에 얽힌 이야기가 전한다. 신덕왕후는 1392년 둘째 아들 방석이 세자로 책봉되며 권력의 중심에 서지만 1396년 돌연 병으로 사망한다. 이후 태조 첫째 부인의 아들인 방원(태종)이 등극하며 복수가 시작된다. 처음에는 신덕왕후 묘소 가까이에 민가를 짓는 것을 허락하더니 1409년에는 아예 지금의 정릉으로 이장해버린다. 태종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원래 묘소에 남은 병풍석과 난간석을 때마침 유실된 광통교 공사의 부재(部材)로 사용한다. 광통교 아래를 보면 거꾸로 세워진 신장석(神將石)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신덕왕후에 대한 태종의 적대감 때문으로 추정된다.
광통교는 전형적인 난간이 있는 보다리다. 지대석(地臺石, 지면을 단단하게 다진 후에 놓는 돌) 위에 사각 돌기둥 2개를 쌓은 석주(교각) 8개를 두 줄로 나란하게 놓았다. 돌기둥은 안정감을 주기 위해 위 기둥보다 아래를 더 길고 크게 설계했다. 석주 간 간격은 약 2m로 석주의 개수는 다리의 규모를 가늠하게 한다. 다릿발은 물의 저항을 덜 받도록 하기 위해 모로 세워 놓았다. 교각 위에 멍에를 걸치고 다시 그 위에 디딤판을 놓았다. 광통교의 폭은 15m, 길이가 13m로 당시 도성 내 다리 중 폭이 가장 넓었다. 조선 시대 사람들은 정월 대보름에 다리밟기를 하면 1년 동안 다리에 병이 들지 않고 재앙을 막을 수 있다고 믿어 나이만큼 다리를 밟았는데 도성 내 다리 중 광통교가 가장 성황을 이룬 이유이기도 하다. 현재 디딤돌이나 난간은 대부분 청계천 복원공사를 하며 새로 만든 것들이지만 다리 아래는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교대(橋臺, 다리 양쪽 끝을 받치는 석축이나 기둥)에서는 신덕왕후 능에서 가져온 신장석과 불교 용구인 금강저가 양각된 커다란 돌을 볼 수 있다.
석주 여기저기에는 '庚辰地平'(경진지평), '癸巳更濬'(계사경준), '己巳大濬'(기사대준)이 한자로 새겨져 있다. 경진지평은 영조 36년(1760)에 땅을 평평히 했다는 뜻으로 이때 준천(濬川, 물이 잘 흐르도록 개천 바닥을 깊이 파냄)했다는 표시이다. 영조는 공사 이후 교각에 이 네 글자를 새기고 준천의 기준으로 삼았다. 계사경준과 기사대준은 연도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각각 '계사년에 다시 준천했다' '기사년에 크게 준천했다'는 뜻이다.



◇ 숙종과 장희빈의 운명적 조우(遭遇)

서울에는 수표교(서울유형문화재 제18호)가 2개 있다. 청계 2가와 3가 사이에 하나, 장충단공원에 또 하나가 있다. 위치로는 청계천에 있는 것이 맞지만, 진짜는 장충단공원에 있다. 수표교는 1959년 청계천 복개공사 때 홍제동으로 옮겨졌고 1965년 다시 장충단공원으로 이전된 후 물길이 열린 지금도 제자리로 가지 못하고 있다.
수표교의 원래 이름은 마전교(馬前橋) 또는 마전교(馬廛橋). 다리 옆에 말과 소를 사고팔던 마전(馬廛)이 있어 붙은 이름이다. 세종 23년(1441) 다리 서쪽에 박석을 깔고 하천의 수위 변화를 측정하는 수표(水標)를 나무로 만들어 세우면서 수표교라 불리게 됐다. 장충단공원에 있는 길이 27.6m, 폭 7.5m의 수표교는 고색창연하다. 오래된 석조 구조물이 발하는 예스러운 빛깔이 그윽하다. 다리는 현재 장충단공원의 개천을 가로지르며 여전히 다리의 기능을 하고 있다.
수표교는 9행 5열로 배열한 2단 기둥 교각 위에 세운, 난간이 있는 보다리다. 원래 수표교는 다릿발 기둥이 1단에 9행 4열이었고, 난간도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보다 다리가 수면에 더 가깝고 폭도 좁았다는 것이다.
최근 서울 동대문구가 펴낸 '서울 청계천 수표 정밀실측조사보고서'를 보면 영조 44년(1768) 다리 위로 물이 넘치는 것을 막기 위해 교각을 2단으로 높였고, 다릿발을 한 열 추가해 9행 5열로 증축한 것으로 추정된다.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조선 후기 최고 회의기관인 비변사의 활동에 관한 기록)에 따르면 당시 호조참판 김시묵은 영조에게 "수표교는 여러 다리에 비해 매우 낮아 적은 수량에도 걸핏하면 물이 넘치므로 서너 해 전에 개수하겠다는 뜻을 올려 윤허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는 금위영 관할 구역으로 현재 이미 석재를 떠서 옮겨 놓았으므로 초일부터 역사를 시작하고자 감히 아뢰옵니다"라고 했다.
수표교는 광통교처럼 교각 기둥이 2단이다. 거친 사각기둥 위에 잘 다듬은 사각기둥을 올렸는데 위 기둥은 물의 흐름을 고려해 바깥으로 모서리가 보이게 틀어져 있다. 교각 위에 굵고 긴 석재를 얹고 그 위에 디딤돌을 놓았으며 다리 위에는 돌난간을 세웠다. 난간은 엄지기둥을 세우고, 그 사이에 동자기둥을 1개씩 놓아 기다란 석재로 연결했다.
수표교 교각에는 '庚辰地平'(경진지평)이, 상류 측 중앙 부분 귀틀석에는 '營改造'(영개조), '丁亥改築'(정해개축)이 새겨져 있다. 경진지평은 광통교와 마찬가지로 1760년 개천을 준설하며 새긴 것이다. 정해개축은 고종 24년(1887) 난간 공사를 한 때를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수표교 돌난간은 이때 생긴 것으로 추정된다. 영개조는 원래 '戊子禁營改造'(무자금영개조)였으나 청계천 복개공사 때 유실돼 일부만 남았다. 이 글자는 수표교를 증축한 1768년을 나타낸다.
수표교는 숙종과 장희빈이 처음 만난 곳으로 전해진다. 숙종이 수표교 남쪽에 있는 왕들의 영정을 모신 영희전을 참배하고 돌아오던 길에 이곳에서 우연히 장옥정을 만났고 이후 그녀를 불러 궁녀로 삼았다고 한다. 둘의 첫 만남 장소가 장통교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수표교와 함께 있던 수표(보물 제838호)는 현재 서울 홍릉 세종대왕기념관에 보관돼 있다. 수표교가 장충단공원으로 이전할 때 세종대왕기념관으로 옮겨졌다. 수표는 홍수로 인한 하천의 범람 여부를 알기 위해 세운 것이다. 세종 때 나무로 제작된 수표는 성종 때 돌로 바뀌었고 현재 수표는 순조 때 세운 것으로 여겨진다.
수표 석주 양면에는 1~10척(1척은 약 21.5㎝)이 한자와 함께 가로줄로 표시돼 있다. 3·6·9척 가로줄에는 동그란 구멍을 파서 각각 갈수(渴水), 평수(平水), 대수(大水)를 헤아리는 표지로 삼았다. 즉 수심이 3척 아래면 물이 부족하고, 9척이 넘으면 범람을 예고했다.



◇ 착공 63년 만에 완성된 '살곶이다리'

청계천이 중랑천으로 유입하는 성동구 사근동 한양대학교 앞으로는 조선 시대 한양에서 규모가 가장 컸던 살곶이다리(보물 제1738호)가 있다. 폭이 6m, 길이가 75.75m의 이 다리는 현재 한양대가 있는 사근동과 남쪽 성수동을 연결하고 있다.
살곶이라는 지명에 관해서는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한다. 하나는 조선 태조가 사냥할 때 화살을 맞은 사냥감이 이 부근에 주로 떨어졌다고 해서 붙었다는 설명이다. 다른 하나는 형제들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태종을 미워해 함흥에 머물던 태조가 우여곡절 끝에 한양으로 돌아올 때 이곳에서 기다리던 태종을 향해 화살을 쏘았는데 그늘막 기둥에 화살이 꽂혔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는 것이다.
이곳에 살곶이다리가 놓인 것 또한 태종과 관련이 깊다.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 태종은 한양 동쪽 벌판인 살곶이벌에 낙천정을 짓고 거처로 삼았다. 세종은 날마다 문안을 해야 했고, 신하들은 당시 실권을 쥔 태종을 만나기 위해 물을 건너야 했다. 이런 불편함을 없애기 위해 세종은 1420년 다리를 만들기 시작했지만 2년 뒤 태종이 죽어 공사가 중단됐다. 이후 성종 때 공사가 재개돼 첫 삽을 뜬지 63년 만인 1483년 다리가 완성됐다. 성종은 사람들이 평지를 걷듯 다리를 건너는 것을 보고 제반교(濟盤橋)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살곶이다리는 4개의 교각 위에 멍에와 귀틀석을 올리고 디딤돌을 3열로 놓은 형태다. 특히 안정적인 구조를 위해 교각 4개 중 가운데 2개를 약간 낮게 만들어 다리의 중량을 안쪽으로 쏠리게 했다. 살곶이다리는 광통교나 수표교와 비교하면 미려하지 않고 난간도 없다. 또 일부는 콘크리트로 제작돼 있다.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수 때 절반을 뜯었고 일제강점기에 홍수로 일부가 떠내려간 탓이다.
한편 청계천 상류인 종로구 옥인동 수성동 계곡에는 물길을 가로질러 길이 3.7m의 장대석 2개를 붙여 걸쳐 놓은 기린교(麒麟橋)가 숨겨진 듯 놓여 있다. 원래 수성동 계곡은 조선 시대 역사지리서인 '동국여지비고'와 '한경지략'에 명승지로 소개될 정도로 풍광이 수려한 곳이었다. 겸재 정선은 이곳 풍경을 '장동팔경첩'의 '수성동' 그림에 담기도 했다. 하지만 1971년 계곡을 따라 옥인시범아파트 9개 동이 들어서며 옛 경관은 사라졌고, 계곡을 가로지른 기린교도 자취를 감췄다. 지난 2012년 옥인시범아파트가 철거되고 이곳이 문화재보호구역으로 지정되면서 계곡은 비로소 옛 모습을 되찾았고 기린교도 모습을 드러냈다. 기린교와 맑은 물이 끊임없이 흐르는 수성동 계곡은 인왕산을 배경으로 아름다운 정취를 선사한다.



◇ 금지구역으로 연결되는 '금천교'

조선 궁궐은 모두 정문을 들어서면 다리를 건너도록 설계돼 있다. 궁궐마다 이름은 다르지만 이들 다리를 통칭해 '금천교'(禁川橋)라고 부르는데 다리 안쪽이 '금지구역'이란 뜻을 내포하고 있다. 즉 금천교는 임금이 있는 공간과 백성이 사는 세상을 구분하는 구조물이다. 금천교 아래 흐르는 물길은 금천이라 불린다. 금천교는 튼튼하면서도 조형미를 갖춰야 했기에 홍예(무지개다리) 2개를 잇댄 모양으로 건축됐다. 위엄이 있으면서도 다양한 조각과 무늬를 넣어 화려하고, 다리 중앙에 임금이 다니는 어로(御路)를 한 단 높여 마련한 것이 특징이다.
경복궁 금천교의 이름은 영제교(永齊橋)로 '마음을 깨끗하게 하라'는 뜻이 있다. 광화문을 지나 왕의 업무 공간인 근정전으로 향하는 길에 있는 흥례문과 근정문 사이에 놓여 있다. 이 다리는 조선 태조 3년(1394) 처음 건설돼 세종 때 영제교란 이름이 붙었다.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불타며 폐교됐다가 고종 3년(1867) 중수됐다. 일제강점기 다리가 있던 자리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건축하며 헐렸다가 1996년부터 5년간 진행된 복원사업을 통해 현재 모습을 갖추게 됐다.
다리 난간 네 귀퉁이에는 서수(瑞獸, 상서로운 동물)가 조각돼 있다. 이 상상의 동물은 잡귀나 사악한 것을 물리치기 위한 용도다. 또 영제교 좌우로 석축 위 네 곳에는 짐승 네 마리가 엎드려 금천을 내려다보는 조각이 있다. 천록(天鹿)이라 불리는 이 동물은 머리에 뿔이 하나 달리고, 온몸이 비늘로 덮여 있다. 물길을 타고 들어오는 사악한 것을 물리치는 구실을 한다. 다리 아래 홍예 아래에는 거북 조각상도 있는데 이 또한 사악한 것을 막는 장치다.



창덕궁 금천교(錦川橋, 보물 제1762호)는 창덕궁이 창건되고 6년 뒤인 태종 11년(1411) 건축됐다. 현존 궁궐 돌다리 중 가장 오래됐고, 다리 폭이 12.5m로 궁궐에 있는 다리 가운데 폭이 가장 넓다. 다른 궁궐의 다리가 정문과 정전의 직선 상에 놓인 것과 달리 정문인 돈화문을 들어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꺾어 금천을 건너도록 설계돼 있다.
금천교는 경복궁 영제교보다 볼거리가 많다. 난간 네 귀퉁이에 서수가 있는 것은 같으나 난간 아래를 보면 멍엣돌 위치에 용의 머리 모양 조각이 돌출돼 있다. 두 홍예 사이에는 귀신 얼굴(鬼面)이 조각돼 있으며 북쪽에는 거북, 남쪽에는 해태의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조각상은 모두 나쁜 기운이 들어오는 것을 막는 도구다.
마지막으로 창경궁에는 길이 9.5m, 폭 5.8m로 규모는 작지만 단아한 옥천교(玉川橋, 보물 제386호)가 서 있다. 성종 때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며 궁궐 내 다리 중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평가받는다. 다리 양옆 아래 홍예와 홍예 사이 공간에 귀면 상이 조각돼 있으나 해태나 거북의 조각상은 없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8년 8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dklim@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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