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 전 약속 지키러 떠난 꽃할배의 다사다난한 여행기

입력 2018-08-29 12:02  

70년 전 약속 지키러 떠난 꽃할배의 다사다난한 여행기
영화 '나의 마지막 수트'


(서울=연합뉴스) 조재영 기자 = 주황색 양복에 하늘색 베레모, 청색 스카프로 한껏 멋을 낸 88세 노인 아브라함. 그의 양손에는 여행 가방과 그가 손수 지은 양복 한 벌이 들렸다. 아르헨티나에 사는 그가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향한 곳은 70년 전 떠나온 고향 폴란드. 노인 홀로 지구 반대편으로 가는 여정은 순탄치 않다. TV 예능 '꽃보다 할배' 시리즈 속 꽃할배들의 여유로운 낭만 여행과는 다르다. 그에게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한쪽 다리는 썩어들어가고, 친구의 생사는 불투명한 상황이다.


다음 달 9일 개봉하는 영화 '나의 마지막 수트'는 친구와의 70년 전 약속을 지키기 위해 먼 여정을 떠난 노인을 따라간다.
아브라함은 평생 재단사로 살았다. 더는 일을 할 수 없게 되자 집을 딸들에게 나눠주고 남은 생을 보낼 준비 한다. 딸들은 꼬장꼬장하고 고집불통인 아버지가 어려워 그를 요양원에 모시려 한다. 아브라함은 "늙으면 자기 나이를 못 받아들이지만, 그렇다고 딸들에게 부담을 주기도 싫다"며 밤에 몰래 집을 나선다.
그에게 폴란드라는 단어는 금기어다. 가족들조차 그 단어를 입에 올린 적이 없다. 출입국 심사 때도 그는 행선지를 말로 하는 대신 글로 적는다. 그런가 하면 독일 땅을 한뼘이라도 밟지 않고 폴란드로 가는 방법을 찾으려 애쓴다.


독일 나치에 의해 평생 씻을 수 없는 아픔을 겪은 그의 사연은 여행을 통해 조금씩 드러난다. 고향 가는 기차 안에서 그는 아주 오랫동안 마음속 깊은 곳에 봉인해뒀던 과거와 마주한다. 그때 그의 눈가에 맺힌 눈물, 흔들리는 눈동자, 얼굴에 깊게 팬 주름은 그가 고향을 떠난 후 어떤 심정으로 살아왔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아마 전쟁의 상흔과 고통, 증오, 공포 등을 마음속에 삭인 채 죽을 힘을 다해 살았고, 일가를 이뤘을 것이다. 치열하고도 처연했을 그의 인생은 보여주지 않아도 가슴이 저릿해지고, 경외심마저 든다.
아브라함의 여행길은 험난하지만 외롭지는 않다. 음악 하는 청년, 파란만장한 사연을 지닌 스페인 모텔 여사장, 그의 아픔을 이해해주는 독일인 인류학자, 폴란드 간호사까지.


그가 만난 사람들은 어쩌면 마지막일 수도 있는 노인의 여행을 진심으로 응원한다. 보는 이들의 마음도 저절로 따뜻해진다.
캐릭터들의 다양한 매력 덕분에 영화는 단조로울 새가 없다. 아브라함은 딸들에게는 퉁명스럽지만, 손녀에게만은 따뜻한 미소를 짓는 반전 매력을 지녔다. 질문에 대꾸도 하지 않는 젊은이를 나무라거나 딸과 자존심 싸움을 하는 '꼰대' 같은 면모도 있지만, 난감한 상황에서도 유머와 멋을 잃지 않는다. 아르헨티나의 베테랑 배우 미겔 앙헬 솔리가 연기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약속대로 친구를 찾아가 양복을 건넸을까.
아르헨티나 감독 파블로 솔라즈가 각본·연출을 맡았다. 그는 한국영화 '내 아내의 모든 것'의 원작인 '내 아내의 남자친구'의 각본가로도 잘 알려져 있다. 감독은 자신의 할아버지 이야기와 카페에서 우연히 들은 실화를 토대로 극본을 썼다고 한다. 그런 만큼 이야기는 더욱 생생하다.


fusionjc@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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