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진 "이인삼각으로 뛴 30년…봄여름가을겨울 변화무쌍하구나"

입력 2018-11-08 15:23   수정 2018-11-08 15:35

김종진 "이인삼각으로 뛴 30년…봄여름가을겨울 변화무쌍하구나"
헌정음반 '친구와 우정을 지키는 방법'…"후배들, 우리 음악 원천수로 강물 이뤄"
전태관, 6년간 암 투병…"난 태관이 빛으로 존재한 그림자"


(서울=연합뉴스) 이은정 기자 = "역시 인생은 참 변화무쌍하구나, 계획한 대로 다 되진 않는 거구나…."
데뷔 30주년을 맞은 밴드 봄여름가을겨울(김종진·기타 겸 보컬, 전태관·드럼, 이상 56)의 김종진은 요즘 생각이 많다.
밴드로 30년을 버텨낸 자축 순간에 멤버이자 36년 지기 전태관이 암과 싸우고 있어서다. 전태관은 6년 전 신장암 수술을 딛고 회복하는 듯했으나 2년 뒤부터 암세포가 어깨뼈, 뇌와 두피, 척추, 골반까지 전이돼 병상에 있다.
"태관이는 성경책도 읽으며 잘 이겨내고 있어요. 엊그저께 태관이 병실에 갔을 때, 미국에서 3집 작업하며 두 달간 KFC 닭 날개를 엄청 먹은 얘기를 했어요. 그날 둘이 치킨과 피자를 시켜 먹으며 옛날 음악 하던 얘기를 많이 했네요."
수많은 무대에 함께 올랐지만 돌아보니 떠오르는 순간은 이렇게 소소하다. 1집 내기 전인 1985년 대기업 입사원서를 쓴다는 전태관의 마음을 돌리려고 설악산에 데리고 가 김치 라면을 끓여준 기억 같은….
최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난 김종진은 홀로 지난 이야기를 하는 게 어색한 듯 보였다. 5년 전 25주년 앨범 '그르르릉!'(GRRRNG!)을 냈을 때만 해도 둘은 "우리 야성은 진행형"이라고 자부했다.
아픈 친구의 쾌유를 빌며 최근 김종진은 후배들과 '친구와 우정을 지키는 방법'이란 음악 프로젝트를 선보였다. 우정이란 테마에 맞게 후배들이 짝을 이뤄 봄여름가을겨울 1~8집 곡을 자유롭게 재해석한 30주년 헌정 음반이다. 지난 4월 전태관 부인이 암으로 세상을 떠나자 후배들의 안타까운 마음이 모여 완성됐다. 음원 수익은 전태관에게 쓰인다.
두 시간에 걸친 서른 번의 봄여름가을겨울 스토리는 자연스레 절반의 지분이 있는 전태관으로도 흘렀다. 그때마다 김종진은 눈에 물기가 스미며 먹먹해졌다.


◇ 김현식과 약속 지키려 결성…"'샌님' 같던 태관이, 연주하면 '광폭'"
봄여름가을겨울 5집(1995)에는 '외로움의 파도를 타고'란 연주곡이 있다. 부제가 '나의 동반자 태관에게 이 곡을 바친다'다. 당시 김종진은 음악 세계가 뚜렷한 뮤지션들이 외롭게 사는 세상이란 생각이 들어 전태관에게 이 곡을 선물했다.
"태관이는 라틴 음악을 잘하지만, 한국은 팝 뮤직을 해야지 라틴 장르론 생계를 꾸릴 환경이 못 되잖아요. 그때 태관이가 '외로움의 파도를 타고 자기 삶을 서핑하는 남정네'로 보였어요. 태관이가 연주를 마음껏 펼칠 연주곡을 만든 거죠."
고려대 사학과 출신 김종진과 서강대 경영학과 출신 전태관은 1982년 12월 24일 뮤지션들의 사랑방이던 방배동 카페 시나브로에서 처음 만났다. 지금은 파라다이스그룹 회장인 전필립이 미국 버클리음대 유학을 앞둬 모인 날이었다. 정원영은 그날 전태관을 데리고 왔다. "다들 필립 형에게 유학 갈 거면 드러머 한 명은 꽂아놓고 가랬더니, 원영 형이 태관이를 데리고 왔어요. 태관이는 1년 재수를 해 대학교 1학년, 전 2학년이었죠."
전태관의 첫인상은 말쑥한 '샌님' 같았다. 그런데 무대에서 연주를 시작하니 '광폭' 했다.
김종진은 "태관이가 무표정해서 그렇지, 드러머들 사이에선 유명한 광란자"라며 "드럼 소리가 크기로 유명하고 인대가 늘어나도 철제 스틱을 들고 연습할 만큼 우직하다. 직장인 밴드 사이에서까지 전태관은 전설"이라고 했다.
성격이 달랐지만 둘은 음악으로 금세 마음을 텄다. 퓨전 재즈 팬이 드물던 시절, 둘은 유독 그로버 워싱턴 주니어, 어스윈드앤드파이어를 좋아했다. 이태원의 레이저 디스크를 틀어주는 카페에서 만나는 게 낙이었다.


이들을 프로 뮤지션의 길로 끌어준 건 "세상에서 제일 멋진 형" 김현식이다. 둘은 1986년 김현식의 백밴드인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로 출발했다. 초기 멤버는 김종진(기타), 전태관(드럼), 장기호(베이스), 유재하(건반).
"1985년 11월 현식이 형이 우릴 동부이촌동 집으로 불러 '밴드를 할 건데, 형이랑 할래?'라고 제안했죠. 키보드 연주자가 필요해 태관이가 유재하를 추천했고요. 정말 흥분됐죠."
유재하가 솔로 음반을 위해 나간 뒤 박성식이 합류해 김현식 3집(1986)을 냈지만 밴드는 1987년 와해했다. 멤버들은 김현식이 대마초 사건에 휘말린 사건을 신문 기사로 접했다. 이후 김종진과 전태관은 '조용필과 위대한탄생'에서 각각 기타리스트, 객원 세션(퍼커션)으로 활동하다가 1988년 봄여름가을겨울로 1집 '사람들은 모두 변하나봐'를 냈다. 장기호와 박성식은 1990년부터 '빛과소금'으로 활동했다.
김종진은 "둘이서 '현식이 형과의 약속을 위해 밴드를 깨지 말자'고 1집을 냈는데 불러주는 데가 없었다"며 "그때까지 저는 위대한탄생을 병행했고, 태관이는 대기업 입사원서를 썼다. 그땐 태관이를 말릴 길이 없었다"고 기억했다.
전태관의 마음을 돌린 건 한영애 공연의 게스트 무대였다. 이들의 노래 '항상 기뻐하는 사람들'과 '사람들은 모두 변하나봐'가 끝나자 여의도 63빌딩 공연장을 꽉 채운 관객의 함성이 3분간 계속됐다. "모두 노래를 따라 부르는데, 하늘에서 천사들이 나팔을 내려놓고 노래하는 착각이 들었어요." 호응을 확인한 전태관은 취직 생각을 접었다.


◇ 소리·연주에 대한 고집·웰메이드 위한 시도…"외면당한 6집, 혼신 다한 역작"
봄여름가을겨울은 기타와 드럼의 이색 조합에도 분업이 뚜렷했다. 김종진이 작곡과 보컬을 겸했다면, 전태관은 자신의 고집대로 연주자로만 포지셔닝했다. "초창기부터 공동 작업을 제안해도 태관이는 '난 그냥 연주자야'라고 고집했죠. 태관이에겐 '난 그래' 정신이 있거든요. '비 오는데 왜 우산 안 써?'라고 하면 '난 그래'란 식이죠."
그러나 완벽한 소리에 대한 집념, 퓨전 재즈·블루스·록 등 장르를 품는 유연함은 같았다. 어떤 밴드보다 앨범에 연주곡 비중을 높여 정체성도 붙들었다. 이런 지향점은 때론 대중적인 성취를 가져왔고, 때론 아프게 외면당했다.
그중 2집(1989)과 3집(1992)은 상업적인 성공의 절정을 이뤘다. 펑키한 리듬에 재즈가 섞인 2집 '어떤 이의 꿈'은 '나는 누굴까? 내일을 꿈꾸는가?'란 펀치 라인이 통했다. 그 덕에 3집에선 "하고 싶은 걸 다 할 수" 있었다. 둘은 거금 2억5천만원을 들여 미국에서 앨범 전 과정을 작업했다. 재킷에는 사계절의 영문 첫글자를 따 'SSAW'라고 적었다. 내레이션을 더한 '10년 전의 일기를 꺼내어'가 크게 히트했고, 통쾌한 록 사운드의 '아웃사이더'는 스웨그 넘치는 가사로 X세대 공감을 얻었다. "당시 신승훈 씨 인기가 대단했고 서태지와아이들이 등장했는데, 멜론에서 그해 최다 판매 앨범이 저희 3집으로 돼 있대요. 가장 성공한 앨범이죠."


그러나 서태지와아이들과 듀스의 블랙뮤직으로 시선이 옮겨간 탓일까. 사운드의 완벽을 기한 4집(1993)부터 혼신을 다한 역작이라는 6집(1996)까지 전작에 못 미쳤다. 4집엔 브라스가 도드라진 '말 없는 인사'와 '이성의 동물, 감정의 동물' 등 연주곡에 힘을 실었다.
5집은 리바이벌을 부끄러워하던 시절, "좋은 음악은 대가 끊기면 안 된다"는 소신으로 만들었다. 인트로에 과거로의 회귀를 알리는 모스(Morse) 신호를 넣고, 신중현과엽전들의 '미인'을 타이틀곡으로 내세웠지만 초기작에 견줘 빛을 보진 못했다.
기대와 달리, 가장 저평가된 앨범은 로커로 귀환한 6집이다. 김종진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작품"이라고 했다. 6집은 케이스를 깡통 형태로 만들고 영상과 사진 등을 담아 확장형 CD(enhanced CD)로 만들었다. 가사의 선정성이 대두된 '바나나 쉐이크', 이현도의 랩이 튀는 '이기적이야', 신해철의 고음 샤우팅 코러스가 귀에 꽂히는 'X라고 부르지마' 등 재기발랄한 록 앨범이었다.
"사실 6집을 뛰어넘는 음악을 만들기 어려워 쉴 참이었는데, 한 일간지 객원 필자의 평이 잔인했어요. '부에 취한 연예인이 록을 이용해 돈을 벌려 한다'라고요. 록은 배고프고 저항 정신이 있어야 하는데, 부자 밴드가 록을 한다는 거죠."


둘은 사람들 생각을 되짚어보기로 했다. 6년 공백 끝에 낸 7집(2002)은 '밴드는 10년을 넘기 어렵다'는 징크스를 깨줬다. 헝가리 고성(古城)에서 녹음한 7집 '브라보, 마이 라이프!'(Bravo, My Life!)는 IMF 사태 후유증을 겪는 이들에게 희망가가 됐다. 한일월드컵이 열린 그해 YB의 '오! 필승 코리아'보다 방송에서 더 많이 틀어졌다.
김종진은 "2003년까지 2년에 걸쳐 방송횟수 1위를 했다"며 "'어떤 이의 꿈', '사람들은 모두 변하나봐' 보다 저작권 수입이 100배는 정산된 것 같다"고 기억했다.
이들은 크고 작은 시도에도 적극적이었다. 당시로는 드문 공연 실황 라이브 앨범 '봄여름가을겨울 라이브'(1991)를 내 이 흐름을 견인했고, 국내 최초의 리마스터링 개념을 도입한 앨범 '베스트 오브 더 베스트'(1998)도 냈다. "음질, 좋은 소리, 웰메이드를 위한 노력" 일환이었다. 2012년 음원이 덤핑 판매되는 '무제한 정액제'에 대한 반기로 발표한 앨범 전곡의 음원 서비스를 중단한 적도 있다.
특히 2004~2015년 와인 콘서트를 열고 라이브 음반 10장을 낸 것은 호평받을 디스코그래피다. 둘은 카니발 두대를 렌트해 악기를 싣고 연주자들을 태워 라이브 클럽을 누볐다.
"우린 7집까지 큰 규모 공연장을 고집했는데 이때 생각이 바뀌었죠. 진짜 음악가는 대스타가 아니라 작은 클럽에서 매일 연주하는 생활 연주인이란 걸요. 이런 생각의 선언 방법이 재즈 클럽에서 공연하고 그걸 음반으로 내는 거였죠. 둘이 밴드 초창기 적은 '투 두 리스트'(To do list·해야 할 목록)에서 추가된 것은 이게 유일해요."


◇ 후배들 헌정곡에 '쇼크'…"봄여름가을 류 생긴 것 같아"
그럼에도 김종진은 자신들의 어떤 시도보다 멋있는 작품은 후배들의 정성이 모인 '친구와 우정을 지키는 방법' 프로젝트라고 했다.
혁오의 오혁×이인우, 윤도현×정재일, 십센치×험버트 등은 봄여름가을겨울 노래에 새 감성을 입혔다. 지난달부터 2곡씩 공개된 음원들은 뉴잭스윙, 어반 R&B 등으로 탈바꿈했다. 11일에는 황정민(배우)×함춘호(기타리스트)의 '남자의 노래', 윤종신×최원혁(베이시스트)의 '첫사랑'이 공개된다. 부인끼리 친분으로 참여한 황정민은 "김광석과 김현식을 합한 것 같은 목소리였다"고 한다.
후배들의 편곡 아이디어는 신선하고 재치있었다. 십센치가 부른 '언제나 겨울'에서 험버트는 봄여름가을겨울에 대한 오마주로 전자 사운드 연주를 넣었다. "자신의 표현법으로 저희가 연주자란 사인을 넣어 오마주 했죠. 혁오가 '하루가 가고 또 하루가 오면'에서 미국 여성 보컬을 담은 아이디어도 짜릿했고요. 정말 치열하게 고민한 게 느껴져 고마웠어요."
김종진은 이 작업에서 "쇼크를 받았다"며 후배들을 칭찬했다. "제가 할 수 없는 걸 하는 후배들이 비일비재했죠. 윤도현이 너무 잘 부른 '사람들은 모두 변하나봐'는 '노래를 빼앗겼다'는 느낌도 들었고요."
무엇보다 "바둑의 조치훈·서봉수 류(流)처럼 '봄여름가을겨울 류'를 만들고 싶었던" 이들에겐 특별한 감동이었다. 김종진은 "우리 '투 두 리스트' 중 하나였다"며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도회적이면서 세련됨을 추구하는 '류'가 생긴 것 같다. 우리가 원천수인 샘물이었다면 후배들이 강물을 이뤘다"고 강조했다.


후배들의 헌사에 대한 화답으로 김종진은 8집(2008)에서 아카펠라로 선보인 '땡큐송'을 '친구들'(스윗소로우, 이시몬 등)과 다시 불러 프로젝트 캠페인송으로 내놓았다.
'내가 걸어왔던/ 지난 시간 동안/ 내 곁에 있어 줘서 정말 고마워/ 이젠 내 차례야/ 내가 지켜줄게/ 곁에 있어줄게/ 나의 아름다운 노래 소리로/ 너를 지킬 거야'('땡큐송' 중)
10년 전 노래지만, 마치 전태관에게 건네는 진심처럼 지금의 상황에 빗대도 어색함이 없다.
그는 "태관이가 나의 그림자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내가 태관이의 그림자였다"며 "햇볕을 받아야 뒤에 생기는 게 그림자 아닌가. 내가 태관이란 빛을 받았기에 존재했다. 정말 기둥 같은 친구"라고 돌이켜봤다.
"태관이는 누구보다 수가 높은 친구에요. 원래 수가 높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갖고 놀기도 하고, 자기 이익을 취하는데 그러지 않았어요. 진짜 고수인거죠."


되새김질해도 그에게 지난 30년은 힘든 것 없이 아름답고, 할 만했던 시간이다. 때론 다퉈도 팀이 깨지지 않은 것은 반드시 당일 사과하는 철칙이 있었던 덕이다. 그래도 전태관에 대한 미안함이 떠오른다.
"우린 이인삼각으로 둘의 발을 묶고 뛰었죠. 세상 사는 속도가 같은 사람은 없는데, 전 늘 더 잘하자고 채근했어요. 3년 전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아들에게 빨리 가자고 재촉하니 힘들어했죠. 그걸 보면서 '태관이도 힘들었겠구나'란 생각이 들었어요."
불가능해 보여 "당위성까지 빼곡하게" 적었던 젊은 날의 '투 두 리스트'를 하나씩 지워나간 건 값지다. 미국에서 앨범 작업하기, 들국화처럼 회전 무대에서 공연하기, 10년간 장수해 비틀스 징크스 깨기, 그랜저 타고 한손엔 햄버거, 한손엔 핸들 잡고서 잠실체육관 들어가 공연하기…. 남은 것은 백발이 성성해도 무대에서 섹시한 뮤지션으로 남자, 무대 위에서 절명하자….
김종진은 이 약속에 대한 희망도 걸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멋진 은발로 다닌 그는 "친구도 염색을 안 하니까…"라고 말을 잠시 멈췄다. 그리곤 이내 목소리 톤을 바꿨다.
"제가 술이나 '잡기'도 대인관계 좋은 태관이에게 다 배운 거 알아요? 태관이는 지방 공연 가면 남는 시간에 당구장에 데리고 갔죠. 당구를 못 쳐서 제가 기타를 꺼내 손가락을 풀면 이렇게 말했어요. '밴드를 위해 너도 당구를 치라'고요. 하하."
mimi@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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