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님 코끼리 만지기를 통한 '경합하는 진실'서 옥석 가리기
단어 비틀기·통계 수치 선택적 활용·상상의 적 만들기 등 '진실 편집법' 소개
(서울=연합뉴스) 이승우 기자 = "나는 그 여자, 르윈스키 양과 성관계를 갖지 않았습니다."
1998년 1월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재직 시절 백악관 인턴 모니카 르윈스키와 성관계를 했다는 혐의에 휘말렸을 당시 내놓은 해명이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은 같은 해 8월 클린턴은 르윈스키와 '부적절한 관계'가 있었다고 시인했다.
우리나라 같으면 신성한 대통령 집무실 안에서 여성 인턴과 성관계를 한 사실만으로도 탄핵감인데, 설상가상으로 클린턴은 미국인이 가장 싫어하는 '위증'까지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클린턴은 미 헌정사상 두 번째로 하원 탄핵소추를 당하고도 상원 투표에서 부결돼 자리를 지켰다. 특검은 사건을 모두 종결하고 클린턴을 불기소 처분했다.
심지어 클린턴은 최근 포르노 배우 매춘 의혹에 휘말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보다 수적으로도 훨씬 많은 섹스 스캔들을 일으켰고 대부분 사실로 드러났다. 상대도 인턴, 백악관 직원, 주 정부 임시직원 등으로 더 부적절했다.
그런데 클린턴은 결국 화를 입지 않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전략 커뮤니케이션 컨설턴트인 헥터 맥도널드의 신간 '만들어진 진실(흐름출판 펴냄)'에 따르면, 변호사 출신인 클린턴이 '합법적으로' 진실을 조작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맥도널드식으로 말하면, '진실을 편집하는 법'이다.
클린턴 법률팀은 앞서 진행 중이던 폴라 존스 성 추문 공판이 진행되는 동안 '성관계'에 대한 법원의 정의를 '누군가의 성적 욕망을 불러일으키기거나 만족할 의도로 누군가의 엉덩이, 허벅지 안쪽, 가슴, 고환, 항문, 성기와 접촉하는 것'으로 좁히는 데 성공했다.
나중에 클린턴은 르윈스키와 구강성교를 한 것으로 드러났지만, 이 정의에 따르면 당시 클린턴은 적어도 법률상으로는 위증한 게 아니다.
저자는 클린턴이 활용한 이런 방법을 상황에 맞춘 '단어 비틀기'라고 정의한다.
이와 비슷한 것이 의도적 네이밍(naming)과 프레이밍(framing) 기법, 부정적 별명 붙이기 등이며, 이는 주로 언론, 정치권, 광고 마케팅에서 주로 활용되는 교묘한 수법들이다.
우리의 뇌는 사실 이성적이지 않아서 이미지, 맥락, 스토리에 끌린다. 그래서 '천연소금'으로 광고하는 소금을 사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과학적으로 '천연'이든 '합성'이든 소금은 그저 염화나트륨일 뿐이어서 차이가 없다.
미국 보수층이 반(反) 낙태(anti-abortion)란 용어를 생명 옹호(pro-life)로 바꿔 쓰는 것도 긍정적 이미지를 주기 위해서다.
예컨대 우리 언론 역사에서도 '쓰레기 만두소'라는 언론의 작명에 만두 제조사들이 곤욕을 치렀고, 그 유명한 '공업용 우지' 파동에 삼양라면은 당시 부동의 업계 1위 자리를 내주고 여전히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이처럼 우리가 진실이라고 여기는 것들은 언제든 왜곡될 수 있고, 사실 우리는 모두 진실을 제대로 바라볼 수 없는 근원적 한계가 있다. 장님들이 코끼리를 만지면 개인마다 생각하는 코끼리가 다를 수밖에 없어서다.
실제로 현실계 모든 사건과 존재는 단순한 게 아니라 상당히 복잡해서 하나의 진실로만 규정하기 어렵다.
저자는 이처럼 사람마다 다르게 받아들이는 여러 진실을 '경합하는 진실'로 정의하고 이 가운데 호도된 것, 조작된 것들을 가려내는 시각을 길러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를 위해 저자는 위에 든 '진실 편집법' 외에도 '생략', '어지럽히기', '관련시키기', '과거 망각과 선택', '맥락 깔기와 무시하기', '유리한 기준으로 설명하기' 등의 방법이 사용된다고 알려준다.
특히 요즘 정치권과 언론에서는 수치와 통계를 활용한 진실 편집법이 많이 쓰인다.
저자에 따르면 수치를 완전히 조작하는 것은 아니지만 숫자를 더 크게, 또는 작아 보이게 하는 여러 테크닉을 통해 얼마든지 진실을 감출 수 있다.
예를 들어 정부가 여론에 불리할 것으로 보이는 지출은 연간으로 말하는 대신 일간 단위로 말하거나 납세자 1인당 드는 비용을 말하는 방법이 있다.
영국 '데일리 익스프레스'는 심지어 '이것밖에 안 들다니! 왕실은 어떻게 우리가 낸 56펜스로 1년 살림을 할까'라는 다소 낯뜨거운 제목을 달았다. 그해에 왕실 경비로 들어간 세금은 3천570만 파운드(약 536억 원)였다.
반대로 캐나다 연방정부는 어느 해 "인프라 구축에 810억 달러 할당"이라고 발표했다. 이는 '11년간 매년 인프라 예산 73억 달러'보다 훨씬 대단한 일로 느껴진다.
이런 일은 지금도 세계 모든 정부에서 국내총생산과 경제성장률 전망, 실업률, 국책 사업 예산 등을 발표할 때 허다하게 벌어진다.
여론조사도 마찬가지다. 질문 내용을 통해 원하는 답변에 대한 호응 비율을 어느 정도 조절할 수 있다고 한다.
이밖에도 특정한 대상을 청산해야 할 집단으로 설정해 공격하는 '상상의 적 만들기', 마녀사냥을 위한 '악마 만들기' 등의 방법도 진실을 호도하고 편집하는 주요 기술들이다.
이지연 옮김. 416쪽. 1만6천 원.
leslie@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관련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