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로 칼럼] '로완 중위'들은 생환할까

입력 2018-12-10 09:00  

[율곡로 칼럼] '로완 중위'들은 생환할까

(서울=연합뉴스) 조채희 논설위원 = "아무개에 대해 알고 싶은데 찾아봐서 정리해 주게"라고 상사가 지시했을 때. "그가 누구죠?" "어느 사전을 찾아봐야 합니까?" "제가 그런 심부름이나 하려고 회사 다니는 줄 아시나요?" "그 사람 아직 살아있나요?" "급한 일입니까?" "무엇 때문에 찾아보시려는 거죠?"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시는 편이 좋을 텐데…"라는 답은 오답. 군더더기 없는 "예, 잘 알겠습니다"가 정답.

회식 자리에서 상사가 설파하는 '직장에서 살아남는 법' 왕초보 편인가. 1세기도 전인 1899년 세일즈맨 출신 출판업자 엘버트 허버드가 쓴 칼럼 '가르시아 장군에게 보내는 편지'에 나오는 얘기다. 스페인 지배를 받던 쿠바가 1895년 독립전쟁을 시작한 후 1898년 전쟁에 뛰어든 미국. 쿠바 반군 지도자 가르시아 장군과 손잡기 위해 윌리엄 매킨리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해야 하는 상황. 로완 중위는 밀림 어디에 은신했는지 알려지지 않은 가르시아 장군에게 친서를 전하는 임무를 맡았다. 로완 중위는 묵묵히 편지를 건네받았을 뿐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는 게 칼럼의 핵심 메시지다. 로완 중위는 편지를 전했고, 유유히 귀환했다.



로완 중위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자주 언급했다고 해서 21세기 한국 땅에 소환됐다. 후배 법관들에게 로완 중위 같은 사람이 되라고 했다는 양 전 대법원장은 검찰에 출석하는 헌정사상 첫 전직 대법원장이 될 위기다. '로완 중위'들이 총애받는 조직에서 무엇이든 맡아 처리해 '마타하리'로 불렸다는 고위법관은 구속 1호가 됐다. 양 전 대법원장 바로 아래 전직 대법관 2명은 구속영장이 청구된 첫 전직 대법관들이 됐다. 이들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실무선에서 다했다"고 주장하며 각자도생에 나섰다. 권한을 누린 만큼 책임도 더 지겠다는 모습보다는 위기를 모면하려는 법기술자의 모습이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구속을 피했다.

이번 사법행정권 남용사건에서 수사받는 전직 고위법관들의 공소장에 등장하는 현직 판사가 100명에 가깝다고 한다. 이들 중 일부는 선배 고위법관들이 받는 혐의, 즉 반헌법적 재판개입 문건 작성을 지시한 직권남용죄의 상대방(피해자)이기도 하다. 동료 판사들은 문건 작성에 개입한 현직 판사들을 탄핵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판사 10여명은 법원 자체 징계위원회에 올라있다. 여의도에서는 탄핵 대상 판사 명단도 나돈다. 로완 중위는 쿠바에서 무사히 돌아왔지만, 사법부 로완 중위들의 생환은 불투명하다.

올해 3월 마무리된 역사 교과서 국정화 진상 조사에서도 로완 중위들의 활약상이 드러났다. "바르게 역사를 배우지 못하면 혼이 비정상"이라는 맥락 모를 한 마디를 신호탄으로 줄줄이 총대를 멨다. 국정화를 위한 행정예고 막판에 접수된 찬성의견서를 조사한 내용은 단연 압권이었다. 이름이 같은 찬성의견서가 수백장씩 쏟아졌고, 주소지가 같은 것도 수두룩했다. 국정화에 적극적으로 찬성한다는 의견서 중 이름을 '이완용', 주소를 '대한제국 경성부 조선총독부', 휴대전화 번호를 경술국치일인 1910년 8월 29일에서 따온 것도 있었다. 비슷한 방식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도 찬성의견서에 등장했다. 윗선의 입맛에 맞게 찬성 여론을 도출하는 임무를 받은 로완 중위들의 소심한 반항이었는지도 모른다.

밤낮없는 업무지시 카톡에도 '넵' 하고 충성을 다하는 '급여체' 사용자들에게 로완 중위는 여전히 워너비다. 시키는 대로, 군말 없이, 알아서 척척 일하는 '에이스'를 원하는 리더가 밑줄 칠 만한 허버드의 칼럼이 100년 넘게 스테디셀러다. "직장 갑질에 해당하는 폭력적인 내용"이라고 항변하면 "당신이 바로 월급 도둑"이라고 맞받아칠 내용이 칼럼 내내 이어진다. 그런데, 로완 중위 지망생들은 꼭 로완 중위가 되지 않아도 좋다는 것을 보여주는 뉴스를 요즘 너무 자주 접했다. 그리고 알게 됐다. 조직의 공동 목표가 잘못된 것이었을 때, 원인 무효가 됐을 때, 어쩔 수 없이 로완 중위가 되었다고 외친다고 해서 조직이 감싸주지 않는다는 것을. 면죄부도 없다는 것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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