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피
4,840.74
(43.19
0.90%)
코스닥
954.59
(3.43
0.36%)
버튼
가상화폐 시세 관련기사 보기
정보제공 : 빗썸 닫기

[3·1운동 유적지를 가다] ⑨경남 도화선 함안 칠북 연개장터

입력 2019-02-23 06:00  

[3·1운동 유적지를 가다] ⑨경남 도화선 함안 칠북 연개장터
경남 만세운동, 합천 삼가장터 등 21개 지역서 170여 차례 열려
거지·초등생·기생도 "독립 만세"…헌병주재소 습격·수탈 장부 소각




(창원=연합뉴스)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경찰서에 다가와 도끼, 낫 등을 가지고 청사로 뛰어들었다. 이를 제지해도 듣지 않고 점점 광폭화해 공포(탄)를 쐈지만, 더 사나워져 실탄을 발사해 폭민을 격퇴하고 진정시켰다. 이 발포로 폭민 중 즉사한 사람이 4명, 부상자는 4명이었다"
일제가 민족말살정책을 펼치던 1936년 경상남도경찰부에서 기록한 '고등경찰관계적록 1919-1935'에 실린 내용 가운데 일부다.
1919년 3월 20일 당시 합천면에서 치열하게 벌어진 만세운동의 한 장면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경남의 3·1 운동은 전국 다른 지역에 비해 늦은 3월 중순께 불이 붙었지만, 투쟁은 가장 늦게까지 극렬하게 이어졌다.
당시 경남 21개 지역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은 170여 차례로 파악되고 있다.
경남 최초 만세운동으로는 함안 칠북 연개장터의 3·9 시위가 꼽힌다.
이 의거는 서울 3·1 독립 시위를 보고 돌아온 14명의 지역유지가 주축이 됐다.
9일 낮 12시 연개장터에는 1천여명이 모여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고, 군중들은 태극기를 들고 해가 질 때까지 마을을 돈 뒤 해산했다.
함안지역 만세운동은 연개장터를 시작으로 12일과 17일 대산 평림, 18일 칠서 이룡 등에 이어 4월까지 연쇄적으로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민중들은 일제의 강제 진압에 대항해 헌병주재소·군청·등기소 등을 습격해 파괴하고 각종 수탈 장부를 불태우기도 했다.



영화 '암살'로 알려진 독립운동가 약산 김원봉의 고향 밀양에서도 만세운동은 뜨거웠다.
고종의 장례식을 보려고 서울에 갔다가 시위운동을 목격하고 돌아온 윤치형·윤세주 등은 전홍표를 찾아가 자문하고 시위를 준비했다.
3월 13일 밀양면에서는 오후 1시께부터 본격 시위가 진행됐다.
시위 참가자는 1천여명으로 일제가 기록하고 있지만, 당시 밀양 인구가 현재보다 많은 10만8천여명인 점 등을 고려하면 2천∼3천명은 참여한 것으로 연구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밀양에서는 이후 4월 10일까지 여러 날에 걸쳐 만세운동이 이어졌다.
단장면 장날이던 4월 4일에는 농민 복장을 한 표충사 승려 7∼8명이 '조선독립 만세'라고 쓴 대나무 깃발을 시장에 세웠다.
군중들은 장터를 돌며 '독립 만세'를 외쳤고, 헌병주재소에는 돌을 던졌다.
10일에는 청도면 인산리 일본인촌으로 50여명이 몰려가 "물러가라"며 만세운동을 펼쳤다.



진주에서는 당시 멸시와 천대를 받던 걸인과 기생도 만세운동에 나섰다.
3월 18일 진주 걸인 100여명은 옛 경남도청 앞에서 "나라가 독립하지 못하면 우리 동포가 모두 빈곤의 구렁에 빠져 거지가 될 것"이라며 태극기를 흔들면서 거리를 누볐다.
다음날인 19일에는 한금화 등 기생 50여명이 남강변과 촉석루를 행진하며 만세운동에 동참했다.
기생 한금화는 일본 경찰에 붙잡혀 구금당했을 때 손가락을 깨물어 흰 명주 자락에 '기쁘다. 삼천리강산에 다시 무궁화 피누나'라는 혈서를 쓴 것으로 전해진다.
사단법인 진주문화사랑모임회는 1996년 2월 진주 걸인·기생 독립 만세운동을 재현하는 행사를 민간 차원에서 처음으로 시행한 뒤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
사천에서는 3월 21일 사천공립보통학교(현 사천초등학교) 졸업식 뒤 열린 축구시합 때 첫 골이 터지는 순간 학생들이 가슴에 품고 있던 태극기를 일제히 흔들며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 사건 이후 학생 의거를 주도한 황순주, 박기현, 김종철 등은 혹독한 옥살이를 치러야만 했다.



창원의 만세운동으로는 마산합포구 진동·진북·진전 등 3개 면에서 일어난 4·3 삼진 의거가 대표적이다.
앞선 3월 28일 진동면 고현 의거에 뒤이은 만세 시위였다.
4월 3일 삼진 주민 수천 명은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진동장터로 진입했다.
당시 일본 헌병이 발포해 시위에 앞장선 김수동과 변갑섭 등 8명이 숨지고 22명이 다쳤다.
지역민들은 숨진 8명(팔의사)을 기리려고 의거 당시 주민들과 일본 헌병이 대치한 진동 사동교 옆에 1963년 '팔의사 창의탑'을 세웠다.
정부는 팔의사에게 각각 1968년과 1991년 대통령표창과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합천에서는 3월 18일부터 4월 27일까지 발생한 총 17차례 시위 가운데 10차례가 폭력 투쟁으로 분류되는 등 만세운동이 극렬했다.
3월 18일 삼가면 삼가장터에는 300∼400명이, 같은 달 23일 상백면에는 당시 칠순이던 공사겸 주도로 4천여명 군중이 모였다.
상백면에서는 면사무소에 불을 질러 모두 태웠고, 전주를 파괴해 통신을 차단하기도 했다.



특히 23일 상백면에 모인 군중들은 다시 삼가장터로 몰려왔고, 가회면·생비량면 등 인근 각지 군중까지 모여 시위 인원은 1만2천∼1만3천명에 달한 것으로 전해졌다.
경남지역 만세 시위 가운데 최대 규모로 알려졌다.
당일 일제가 만세운동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군경으로부터 총격을 받은 군중 13명이 그 자리에서 숨졌고 30여명이 다쳤다.
일제 군경 보고서 등은 당일 시위를 '악성 소요'로 기록하며 '사망자 5명'으로 축소 보고하는 등 만행을 은폐하기까지 했다.
합천 삼가장터에는 군민 모금 등으로 2005년 3·1 만세운동 기념탑이 세워져 당시의 치열했던 시위를 기념하고 있다.
조찬용 삼가장터 3·1 만세운동 기념사업회장은 "합천 삼가장터 만세운동은 유관순의 아우내장터 만세 시위보다 더 규모가 컸다"며 "만세운동의 역사가 후세에 잘 전달될 수 있도록 계승사업에 각종 지원이 체계적으로 뒷받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학구 최병길 이정훈 박정헌 김선경 기자)
ksk@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관련뉴스

    top
    • 마이핀
    • 와우캐시
    • 고객센터
    • 페이스 북
    • 유튜브
    • 카카오페이지

    마이핀

    와우캐시

    와우넷에서 실제 현금과
    동일하게 사용되는 사이버머니
    캐시충전
    서비스 상품
    월정액 서비스
    GOLD 한국경제 TV 실시간 방송
    GOLD PLUS 골드서비스 + VOD 주식강좌
    파트너 방송 파트너방송 + 녹화방송 + 회원전용게시판
    +SMS증권정보 + 골드플러스 서비스

    고객센터

    강연회·행사 더보기

    7일간 등록된 일정이 없습니다.

    이벤트

    7일간 등록된 일정이 없습니다.

    공지사항 더보기

    open
    핀(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