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원 제일감리교회·양양 만세고개…사라지는 유적지 아쉬움

(춘천=연합뉴스) 양지웅 기자 = 강원도는 3·1 만세운동이 다른 지역에 비해 비교적 늦게 일어났지만, 규모와 기세는 다른 지역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3월 10일 철원을 시작으로 3월 말부터 4월 초순까지 가장 격렬하게 일어나다 5월 9일 양양을 마지막으로 잦아들었다.
강원도에서 만세운동이 가장 먼저 일어난 곳은 철원지역이다.
이곳에서는 1919년 3월 10·11·18일에 철원읍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1919년 3월 10일 철원읍 교회의 박연서 목사를 중심으로 교회 청년들이 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같은 해 8월에는 감옥에서 풀려난 김상덕, 박연서 목사가 주축이 돼 항일단체인 '철원애국단'을 조직했다.
이들은 국내 독립운동 상황을 상하이 임시정부에 보고하고 임시정부에서 전달받은 문서를 국내에 배포하는 활동을 벌이다 1920년 일본 경찰에게 체포됨으로써 해산됐다.
철원애국단이 주요 활동을 벌였고 만세운동의 함성이 뜨겁게 타올랐던 '철원제일감리교회'는 현재 근대문화유산 23호로 지정되어 있다.

양양의 만세운동은 1919년 4월 4일 양양 장날부터 시작해 남녀노소, 종파와 신분의 구별 없이 하나가 돼 불길처럼 번져나갔다.
그 규모가 도내 최대일 뿐 아니라 격렬함이 전국적으로도 손꼽힐 정도로 전개됐다.
뜨거운 양양 만세운동은 일본 경찰의 무자비한 탄압에서 시작했다.
1919년 3월 양양면 임천리에서 만세 시위운동을 준비하던 지도자 22명을 일제가 체포하고 태극기 374장을 압수하자 4월 4일 양양읍 장날을 기해 군민 1천6백여 명이 봉기해 만세를 외쳤다.
시위대는 곧 수천 명으로 빠르게 늘었고, 양양경찰서를 포위해 체포된 애국지사들을 탈출시키려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일제 경찰의 총탄에 농민 5명이 순국하고 수많은 부상자가 나왔다.
5일에는 강현면 농민 5백여 명이 물치 장터에 모여 독립 만세운동을 전개했으며, 도천면 농민 5백 명은 대포리 주재소 앞에서 만세운동을 벌였다.
여기에 강현면 농민들이 합류해 시위대 1천 명이 주재소를 에워싸고 일제 경찰에게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고 요구하자 경찰서장이 "돌아가겠다"고 굴복했고, 이들은 다음날 양양읍에 모이기로 하고 해산했다.
6일, 7일 이틀 사이에는 농민 1천500여 명이 양양경찰서를 습격해 애국자들의 석방을 요구했고, 7일 밤에는 의병 출신 박춘실이 이끄는 서면 농민 1백여 명이 면사무소를 습격해 파괴했다.
4월 9일에는 현북면 농민 6백여 명이 독립 만세운동을 일으켜 기사문리의 일제 경찰관 주재소를 포위, 천지가 진동하는 만세를 외쳤다.
이때 언덕 밑 계곡에서 미리 잠복하고 있던 일제 수비대와 경찰의 무차별 발포에 현장에서 9명이 순국하고 30여 명이 부상했다.

양양군은 2000년 3월 1일 만세고개 인근에 태극기를 본뜬 기념탑을 세우고 당시 순국하거나 다친 사람들의 명단을 새겨 3·1 만세운동 유적지로 조성했다.
양양 옛 관아 터인 군의회 건물 옆에 자리한 현산공원에도 만세운동을 기리기 위한 기념비가 조성돼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강원지역에는 독립투사들의 얼이 깃든 항일 유적지가 사라지고 있다.
춘천 만세운동이 시작된 '요선시장'은 항일운동과 관련한 역사적 흔적을 찾기 힘들며, 홍천 지역 기독교 계열 인사들의 독립운동 근거지였던 요선동 춘천여자관(교회)은 흔적조차 없다.
1936년 근덕면민 200여 명이 모여 일제에 항거하는 투쟁을 벌였던 삼척시 근덕면 교가리 '느티나무터'는 안내 표지도 없는 실정이다.
yangdoo@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관련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