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ㆍ1운동.임정 百주년](42) 상하이 임정 주춧돌 놓은 신규식

입력 2019-03-08 06:00  

[3ㆍ1운동.임정 百주년](42) 상하이 임정 주춧돌 놓은 신규식
임정 분열되자 곡기 끊고 "정부, 정부" 외치며 눈 감아
망명 초기 중국 혁명가와 머물던 상하이 난창루 거처 옛 모습 간직한 채 남아 있어


(상하이=연합뉴스) 차대운 특파원 = 1907년 8월 1일. 서울 숭례문 일대에서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군인들과 일본군 사이에 격렬한 시가전이 벌어졌다.
헤이그 밀사 사건을 빌미로 일본이 고종을 퇴위시킨 직후 대한제국 군대까지 강제 해산시키자 대한제국 군인들이 분기탱천해 무장해제를 거부하고 탄알이 떨어질 때까지 최후의 저항에 나선 것이었다.
압도적 화력을 앞세운 일본군의 기관총탄이 쏟아져 100여명이 전사하고 수백명이 포로가 될 정도로 대한제국군의 마지막 전투는 장렬했다.
이곳에는 1905년 을사늑약에 분개해 음독자살을 시도했다가 한쪽 눈의 시력을 잃은 대한제국군의 청년 장교 신규식(1878∼1922년)도 있었다.
'구한'(舊韓)을 보위하던 대한제국군 청년 장교는 훗날 중국 상하이에서 임시정부의 주춧돌을 놓으면서 군주가 아닌 국민이 주인 되는 '신한'(新韓)을 꿈꾸는 독립운동가로 거듭나게 된다.
강제로 군복을 벗고 나서 신규식은 중동야학교 교장을 맡고, 퇴직 장교들을 규합해 국산품을 거래하는 광업회사(廣業會社)를 세워 운영하는 등 민족의 실력 양성 운동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1910년 우리나라의 국권을 완전히 일본에 빼앗기게 되자 그는 또 다시 음독자살을 시도한다. 다행히 대종교 지도자 나철에 발견돼 목숨을 건졌다.
신규식은 이듬해인 1911년 망명길에 올라 중국 상하이로 향했다.
당시만 해도 한국 독립운동 중심지는 한반도와 지리적으로 연결된 중국 간도나 러시아 연해주였다.
그는 쑨원(孫文·1866∼1925)을 중심으로 한 중국 공화주의 혁명 운동의 향배에 주목하고 다른 독립운동가들의 발걸음이 닿지 않던 미지의 세계인 상하이로 향했던 것이다.
육군무관학교 입학 전 관립한어(중국어)학교에서 수학해 중국어가 유창했던 그는 중국의 혁명이 곧 한국의 독립해방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확신 속에서 쑹자오런(宋敎仁), 천치메이(陳其美) 등 중국동맹회 회원들과 친분을 쌓았다.
그는 1911년 한국 지사로는 처음으로 중국의 '앙시앙 레짐'인 청나라를 무너뜨린 신해혁명에 직접 참가했다.
이처럼 중국의 혁명 운동가들과 피로 맺은 우의는 훗날 그가 참여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국에서 여러 형태의 지원을 받게 되는 큰 정치적 자산이 됐다.
최근 찾아간 상하이시 중심지인 황푸(黃浦)구 난창루(南昌路)에는 신규식이 망명 초기 머무르던 집이 옛 모습을 간직한 채 남아 있었다.

신규식은 당시 가깝게 지낸 천치메이와 한 집에서 머물렀다. 바로 옆에는 중국의 혁명가 천두슈(陳獨秀)가 머무르면서 계몽 잡지인 '신청년'(新靑年)을 찍던 집도 남아 있었는데 이를 통해 신규식과 중국 혁명 운동가들 간의 관계가 가까웠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상하이에서 먼저 자리를 잡은 신규식은 1913년 청년 교육 기관인 박달학원을 설립하는 등 상하이에서 민족의 독립 기반 확대를 위해 노력했다.
신규식은 고국을 등지고 상하이를 찾은 많은 청년에게 거처와 교육 기회를 제공하면서 적극적인 후원자 역할을 자청했다.
그의 소개로 훗날 광복군 참모장 겸 2지대장을 지낸 이범석 장군 같은 한인 청년들이 이 무렵 중국 내 여러 군사학교에 들어가 훗날 무장 독립운동의 중추인물로 성장하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신규식은 1913년에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이끌어갈 비밀 결사 조직인 동제사(同濟社)를 주도적으로 꾸렸다.
훗날 임시정부 2대 대통령을 지낸 박은식이 총재, 신규식이 이사장을 맡은 가운데 많을 때는 300여명의 회원이 활동한 것으로 학계에서는 추정하고 있다.
신규식은 비록 전면에 등장하지는 않지만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과정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 '막후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3·1운동이 일어나기 2년 전인 1917년 신규식과 조소앙 등은 핀란드, 폴란드 등지의 독립 선언에 자극받아 한민족의 독립과 단결을 선언하고 통일된 정부 조직의 필요성을 역설한 '대동단결선언'을 발표한다.

대동단결선언 발기자들은 "융희황제(순종)의 삼보(三寶·주권)를 포기한 (1910년) 8월 29일은 나와 동지들이 삼보를 계승한 8월 29일이며, 구한(舊韓)의 마지막 날은 신한(新韓)의 최초의 하루"라고 선언했는데 학계에서는 이를 독립운동가들이 국민주권론을 본격적으로 표방하기 시작한 계기가 된 것으로 본다.
이어 1919년 파리강화회의를 계기로 민족자결주의 열기가 고조되자 신규식은 영어에 능통한 김규식을 한국 대표로 파리에 보내는 한편 조소앙, 선우혁 등을 일본과 국내에 잠입시켜 일본 유학생들과 민족 지도자들에게 대대적인 시위를 일으켜 줄 것을 종용하는 등 막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신규식은 1919년 4월 상하이에서 임시정부가 탄생하게 되는 데 중요한 산파 역할을 했지만 훗날 임정의 분열 속에서 그는 1922년 국무총리직에서 사퇴한 뒤 병든 몸으로 곡기를 스스로 끊고 43세를 일기로 독립운동 진영의 단결을 호소하면서 생을 마치게 된다.
20여일 동안 모든 음식과 약을 먹기를 거부했던 그가 마지막 남긴 말은 "정부! 정부!"라는 두 마디 외침이었다고 한다.

한국 독립운동사를 연구하는 중국 학자인 쑨커즈(孫科志) 푸단(復旦)대 역사학과 교수는 "신규식 선생은 좌우 사상 차이 없이 모든 한인이 단결해 독립을 이루자는 강한 의지를 갖고 있던 분으로 한국 독립운동과 임시정부 역사에서 큰 역할을 한 인물"이라며 "특히 주권재민의 사상을 구체화한 민주 공화 사상의 선구자"라고 평가했다.
cha@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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