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ㆍ1운동.임정 百주년](50) 상하이 외인묘지에 남겨진 지사들

입력 2019-03-20 06:00   수정 2019-03-20 06:34

[3ㆍ1운동.임정 百주년](50) 상하이 외인묘지에 남겨진 지사들
연고권 가진 후손 없어 김태연·이덕삼 지사 유해 아직 상하이에
김 지사 유해는 4월 초 98년만에 고국으로…정부 "이 지사 유해 봉환 최선 다할 것"


(상하이=연합뉴스) 차대운 특파원 = 1945년 대한민국이 일제의 지배에서 벗어나 감격의 해방을 맞이한 지 어언 74년의 세월이 지났다.
하지만 갈망하던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 독립투사 중에는 아직도 중국 상하이의 차가운 땅속에 머물러 있는 이들이 있다.
19일 상하이 창닝(長寧)구의 외국인 공동묘지인 만국공묘(萬國公墓)를 찾아갔다.
쑨원의 부인 쑹칭링(宋慶齡·1890∼1981) 능원 가장자리에 자리 잡은 공동묘지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2대 대통령을 지낸 박은식을 비롯해 신규식, 노백린, 김인전, 안태국 같은 저명한 독립지사들의 이름이 한자 또는 한글로 적힌 묘비가 먼저 눈에 띄었다.
임시정부의 중추 인사이던 이들은 대한민국이 독립을 이루기 전 상하이에서 숨을 거뒀다.
1992년 한중 수교 직후인 1993년 이들의 유해는 고국으로 봉환돼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현재 이들의 묘비에는 유해가 대한민국으로 옮겨졌다는 문구가 적혀 있다.
그러나 그 곁엔 아무런 설명 없이 'TAI Y KIM', 'LI YOUNG SON'이라는 영문 이름만 덩그러니 적힌 묘비도 있었다.

실제로 유해가 있는 이 두 무덤의 주인은 김태연 지사(1891∼1921년)와 이덕삼 지사(1905∼1926년)다.
김 지사는 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 의원이자 무장 항일투쟁 단체인 구국모험단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3·1운동 직후인 1919년 5월 상하이로 망명해 독립운동에 뛰어든 그는 몽양 여운형 등과 함께 상해대한인거류민단을 조직해 한인들의 자치 활동을 이끌었다.
1920년에는 구국모험단 참모부장을 맡아 군자금 모집, 폭탄 등 무기 구입, 일본 관청 파괴 및 일본 관리 암살 등 무장 투쟁을 전개하기도 했다.

김 지사는 1921년 상해의 한인 자녀들의 교육 기관인 인성학교의 교장을 맡아 동포들을 위한 교육 사업에도 나서는 등 열정적인 애국 활동을 벌였지만 그해 병으로 별세했다.
이 지사는 널리 알려지지 못했지만 불꽃 같은 독립운동을 펼치다가 스물한 살 꽃 같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청년이었다.
10대 때인 중학생 시절부터 비밀 연락관 역할을 하며 임시정부가 발행한 독립신문을 국내에 몰래 전파하던 이 지사는 일경에게 붙잡혀 옥고를 치르고 나서 1926년 상하이로 망명하는 데 성공했다.
한인 무장단체인 병인의용대(丙寅義勇隊)에 가입한 그가 상하이 중심가에서 일본 경찰들과 총격전을 벌이며 다리를 다친 일화도 전해진다.
그는 1926년 순종의 인산일에 맞춰 거사를 계획하고 동료들과 권총과 폭탄을 소지한 채 상하이에서 배를 타고 국내에 잠입하려다가 현지 경찰에 체포돼 일본 총영사관에 신병이 넘겨진 뒤 숨졌다.
그의 사인을 두고는 자결했다는 기록과 일본 경찰의 고문으로 숨졌다는 기록이 함께 있다.
이덕삼 지사의 묘비명에 적힌 'LI YOUNG SON'(이영선)이라는 이름은 그가 생전 쓰던 여러 개의 가명 중 하나다.
김 지사와 이 지사 모두 우리 정부로부터 건국훈장을 추서 받은 독립 유공자이다. 유독 이들의 유해가 지금껏 봉환되지 못한 것은 이들이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해 중국 측에 유해 송환을 직접 요청할 직계 후손이 없었기 때문이다.
중국 정부와 묘역 관리 당국은 우리 정부의 요청 외에도 유해 연고권이 있는 후손의 요청이 있어야 이장을 허용할 수 있다는 원칙을 고수해왔다.
다행스럽게도 김태연 지사의 유해가 사후 98년 만에 조만간 국내로 봉환될 수 있게 됐다.
우리 정부가 그간 물밑에서 중국 정부를 꾸준히 설득하는 노력을 벌여온 가운데 김 지사 친지의 일부 후손이 직접 나서면서 유해 봉환이 성사될 수 있었다.
우리 정부는 김 지사가 몸담았던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일 직전인 내달 초 만국공묘에 있는 김 지사의 유해를 발굴해 국립묘지에 모실 예정이다.
이 지사의 경우에는 국내에서 연락이 닿는 후손이나 친지가 없어 여전히 유해 봉환에 어려움이 많다. 하지만 우리 정부는 이 지사의 유해 역시 조국으로 돌아올 수 있게 중국 정부 설득에 총력을 기울인다는 방침이다.
역사학자들은 독립운동가들의 안식처였던 상하이 만국공묘가 이국땅에 동료들의 주검을 땅에 묻고 앞으로 나아가야 했던 임시정부 독립지사들의 슬픔을 보여주는 장소라고 지적한다.
임시정부 인사들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동료 독립운동가들이 숨지면 장례식을 성대하게 치렀다.

이는 조국의 해방을 보지 못하고 한 많은 생을 마감한 동료에 대한 마지막 예우였다. 또 동료의 차가운 주검 앞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생을 마감하는 날까지 고난의 행군을 계속해 나가겠다는 결의를 다지는 의식이기도 했다.
1919년 부터 1945년까지 임시정부의 깃발을 내리지 않았던 김구는 회고록 백범일지에서 '대륙에 묻힌 영혼'이라는 별도의 장을 할애해 중국에서 숨겨간 동료들의 업적을 기록하면서 그들의 장례식 장면을 묘사하기도 했다.
cha@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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