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이야기] 정민 교수 "같지만 다른 삶 추구해야"

입력 2019-04-08 08:01  

[인문학 이야기] 정민 교수 "같지만 다른 삶 추구해야"
18세기 실학·실학자를 말하다

(서울=연합뉴스) 임동근 기자 = 18세기는 전 세계 지식의 빅뱅이 일어난 시기다. 유럽에서는 백과전서파가 활동하며 지식의 서열을 파괴했다. 조선, 청, 왜에서도 각종 저술이 나와 파급되면서 지식의 대중화가 진행됐다. 조선에서는 박지원, 박제가, 이덕무, 정약용 등 혁신적인 지식인들이 등장해 지식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다.



정민(59) 한양대 국문과 교수는 18세기 전문가다. 그의 연구 주제도 당연히 박지원, 정약용, 이덕무 등 실학자들이다. 그는 수십 년간 실학자들과 대화하고, 그들의 저작 연구에 몰두하며, 그들의 가르침을 전달하고 있다.
정 교수는 "인문학이 삶에 직접적인 해답을 주지는 않는다"며 "같지만 달라야 한다"는 상동구이(尙同求異)를 강조한다. 자기 삶의 주인으로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인문학을 통해 질문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설명한다.
최근 출간한 '체수유병집-글밭의 이삭줍기', '열여덟 살 이덕무', '잊혀진 실학자 이덕리와 동다기'를 중심으로 조선 후기 실학과 실학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 조선 후기 지식인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뭔가요.
▲ 전공이 18세기입니다. 18세기는 전 세계적으로 대단히 흥미로운 시기죠. 프랑스에서는 '백과전서'(1751)가 편찬됐어요. 디드로와 달랑베르를 편집자로 하고 몽테스키외, 볼테르, 루소 등 유럽 최고의 지식인이 집필에 참여했습니다.
이 백과사전이 신(神) 중심의 중세적 가치관을 무너뜨려 프랑스대혁명으로 이어지는 토대를 만들었습니다. 예전에는 신(God)이 최상위 서열이었는데 이 백과전서는 살구(Apricot)가 맨 앞에 오는 식이었죠. 한순간에 지식의 서열을 깨뜨려버렸어요.
이런 백과전서적인 저술이 18세기 우리나라, 중국, 일본에서도 집중적으로 나타납니다. 그야말로 18세기는 지식의 빅뱅이 일어난 시기였어요.
사회의 하부구조가 성장하면서 삶의 정보의 서열이 바뀐 거죠. 이전에 가치 있던 철학, 종교, 신학보다 실용적인 정보들이 더 중요하고 강력해졌어요. 요즘으로 치면 윤리나 도덕 교육보다 주식시장 관련 정보가 훨씬 가치 있다고 하는 것과 같은 거죠.
흔히 우리 실학이 서양 백과전서파의 영향을 받아 나타난 거라고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입니다. 백과전서파가 활동할 때 조선에서는 연암 박지원(1737∼1805)이 있었어요. 같은 시기에 거의 비슷한 사유와 비슷한 방식의 작업이 진행됐죠.
18세기 조선은 대단히 역동적이고 활력이 넘치는 시기입니다. 한번 빠져들면 좀체 헤어나올 수가 없죠.

-- 특히 연암 박지원과 다산 정약용에 대한 관심이 깊은 것 같습니다.
▲ 연암과 다산은 학문적으로나 인생에서나 제 멘토입니다. 연암은 진짜 막강합니다. 그의 콘텐츠는 세계 어디에 내놔도 훌륭합니다. 만약 연암의 저작을 번역해 움베르토 에코에게 보여주면 "200년 전 조선에 이런 사람이 있었단 말이야?" 하고 깜짝 놀랄 거란 상상을 혼자 많이 했어요.
연암은 기존의 사유를 전복시켰죠. 누구나 당연한 것으로 믿었던 가치를 거부하고 시대의 금기를 건드렸어요. 그는 기호학의 핵심을 꿰뚫었습니다. 그래서 연암은 무서워요. 연암의 강력한 사유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큰 영향을 주고 있죠.
다산 정약용(1762∼1836)은 연암에 비교하면 족집게 선생 같아요. 매뉴얼화를 잘한 정리의 귀재이고, 어려운 것을 쉽게 설명한 천재죠.
대학원생 논문 작성에 도움을 주려고 '다산선생 지식경영법'(2006)이란 책을 냈습니다. 그런데 정작 대학원생들은 사보지 않고, 기업의 CEO들이 더 많이 사봤어요. 맨날 피터 드러커 같은 사람의 책만 보며 쫓다가 우리 것을 보니까 정신이 번쩍 들고, 속이 시원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죠.
다산은 핵심가치를 먼저 찾습니다. 이후 뒷받침할 자료를 찾고, 목차를 만들고 카드로 분류를 했죠. 다산의 이런 방법론은 범주만 바꾸면 많은 것에 적용할 수 있어요. 개인적으로 연암을 훨씬 좋아하지만, 다산은 정말 배울 게 많은 스승입니다.
우리 젊은이들이 연암에게서 사유의 힘을 배우고 다산에게서 정리의 방법을 배운다면 천하무적이 될 거예요.

-- 교수님 연구 과정이 다산의 방법론과 비슷해 보입니다.
▲ 다산의 방법론이 저에게 영향을 많이 준 것은 분명해요. 거꾸로 다산을 연구하면서 "어떻게 내가 한 방식하고 이렇게 비슷할까?"라는 생각도 했어요. 논문을 쓰면서 진행했던 과정들이 다산이 했던 작업방식과 거의 비슷했죠.
그래서 다산을 연구하다 보면 같이 만나 대화하는 느낌이 들 정도였어요. 다산의 방법론을 좀 더 현대적 감각의 매뉴얼로 보여주면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될 걸로 생각합니다.

-- 연암 소설 속 허생이 그립다고 했는데, 이유가 무엇인가요.
▲ 요즘 이념이나 북한에 대한 생각이 첨예하게 달라 정치권이 서로 싸우고 국민도 분열돼 있잖아요. 18세기 북학, 북벌의 문제도 다를 게 없습니다.
우리는 병자호란 때 힘이 약해 남한산성에서 청나라에 유린을 당했죠. 분하고 억울한 마음이 컸겠죠. 설욕하겠다며 북벌을 주장했지만, 내실이 없는 상태에서 쳐들어가면 결과가 뻔했겠죠.
허생이 볼 때 북벌은 허구예요. 허생이 인재들을 뽑아 굴욕을 갚을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지만 이완 대장은 거부합니다.
해야 할 일은 하지 않고 할 수 없는 것, 해서는 안 될 것만 하겠다는 위선, 허위, 허세가 우리를 얼마나 피곤하게 합니까. 복수하려면 청을 넘어서야 하죠.
그러자면 청의 좋은 점과 앞선 것을 배워서 내재화해야 하는데, 맨날 되지도 않은 것만 하면 안 된다는 거죠.
이건 지금 북한, 중국, 미국, 일본과의 문제도 크게 보아 다를 게 없다는 생각입니다. 우리는 항상 남의 다리만 긁고 있어요. 해결책을 엉뚱한 곳에서 찾고 있죠. 이것은 결국 잘못된 질문과 전제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죠. 객관적으로 돌아봐야지 정파의 입장만 내세워서는 국론이 분열되고 혼란만 커집니다.

-- '체수유병집'에서 사실과 진실에 관한 이야기를 했는데, 어떻게 다른가요.
▲ 양제해(1770∼1814) 모반 사건이 있어요. '조선왕조실록',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양제해가 1813년에 제주도 자치 국가 건설을 꿈꾸며 일으켰다가 미수에 그친 역모 사건으로 기록돼 있죠.
사실 양제해는 제주도 아전들의 가혹한 수탈과 착취에 맞서 분연히 일어선 인물이었어요. 아전들이 자신들의 비리가 드러날 것을 염려해 양제해를 무고해 역모로 뒤집어씌워 죽인 거죠. 양제해의 입장에서 보면 기가 막힐 일이죠.
우리는 진실을 외면한 사실들 속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누군가 어떤 사실을 말하면 다 맞는 것 같지만 그 안에는 진실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껍데기만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최근 연예인 몰카 사건 같은 것이 나오는 거죠. 사람들은 TV에서 그들의 화려한 삶만 볼 수 있지 그 이면은 몰라요. 그러면서 그들을 선망합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사실과 속에 담긴 진실은 다른데, 사회가 건강하지 않으면 진실과 사실의 거리가 점점 멀어집니다. 허상만 보는 거지요. 우리 사회는 이 둘의 거리가 상당히 멀어져 있어요.
요즘 언론에 회자되는 성접대 추문이나 여배우 자살 사건 등도 한목소리로 그것을 증명하고 있죠. 진실은 사라지고 껍데기만 보는 사회라는 거죠.
정치도 언론도 진실을 알면서 가짜 사실로 자꾸 덮으려고 합니다. 사실의 이름으로 진실을 덮어버리는 폭력이 되풀이되고 있어요.
저는 인문학자로서 옛글을 통해 사실을 넘어 진실에 접근하는 경로를 찾아보려고 합니다.



-- '열여덟살 이덕무' 속 이덕무는 나이에 비해 조숙한 것 같습니다.
▲ 이덕무의 글을 읽으면 반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그의 글에는 묘한 것이 있어요. 사람을 아련하게 만들면서 삶에 대해 각성하게 하죠. 짠하고 따뜻하면서도 미묘한 부분을 건드리는 힘이 있습니다.
이제 60살을 앞둔 제가 18살 이덕무의 글을 보고 감동하면서 과연 인간이 발전하는 존재인지 의심이 들었어요. 문화가 진보를 거듭했지만 삶은 본질적으로 달라진 것이 없었죠. 사유와 생각의 힘은 나이와 시대를 뛰어넘는 것 같아요.
'세정석담'(歲精惜譚)에서는 소설을 배격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이고, '매훈'(妹訓)에서는 누이를 위해 여성이 갖춰야 할 덕목을 말하고 있죠. 어떻게 보면 고리타분하고 지금 시대와 맞지 않은 것으로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프랑스에서 연구년을 보내고 있을 때 최순실 재판이 있었어요. 그걸 보면서 인성교육을 제대로만 받았다면 자기 자식을 위해 저렇게까지 하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죠. 이덕무가 누이에게 준 가르침도 시대의 눈금을 조금만 조절해서 읽으면 틀린 말이 없습니다.

-- 이덕무가 소설을 배격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 요즘 같으면 야동이나 음란만화를 보지 말라는 정도의 톤으로 읽으면 됩니다. 음란한 것을 자꾸 보면 공부에 대한 생각이 사라지고 딴생각만 나니까 그러지 말라는 거죠.
당시 소설을 보면 명나라 때 나온 '금병매'도 묘사가 굉장히 야한데, 청나라 때 나온 소설들은 음란성이 점점 심해져 거의 포르노물에 가까워집니다.
성현의 글을 공부해야 할 젊은이들이 그런 음란물에 빠져서, 중국에 가면 그런 것이나 사오려 하고, 광적으로 빠져서 서로 돌려보고 한 거죠.
소설에 대한 이덕무의 비판을 고리타분한 모범생의 말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만 볼 수 없는 점이 많아요.

-- 이덕무가 가르치는 핵심은 무엇인가요.
▲ 이덕무의 키워드는 '한가로움'입니다. 비우고 내려놔야 한다고 그는 말하죠. 이덕무는 목표만을 향해 앞뒤 안 보고 달려가는 것으로는 인생이 채워지지 않는다고 얘기해요. 인생을 여유롭고 풍요롭게 하려면 더 내려놓고 더 고요해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방법이 득한(得閑), 한가로움을 얻는 것입니다. 미로득한방시한(未老得閑方是閑)이란 말이 있어요. 아직 늙지 않았을 때 얻는 한가로움이라야 진짜 한가로움이란 뜻이죠. 다 늙어 한가로운 것은 할 일이 없는 거지, 진정한 한가로움은 아니란 거예요.
바쁜 와중에 하루 30분씩이라도 자신과 내면을 위해 한가로운 시간을 가지라는 거죠. 어디로 가는지, 이곳이 어딘지, 내가 누군지를 묻고 관찰하기 위해서는 내려놓고 멈추는 시간이 필요한 거죠. 아무리 바빠도 나를 잃으면 안 됩니다.
이덕무는 정말 열심히 산 사람이었어요. 자신의 삶을 위해 눈물겨울 정도로 열심히 살았죠. 적극적으로 만든 한가로움이라야 삶의 중심을 잡아줄 수 있습니다.

-- 이덕무는 마음속에 한 점 시기하는 마음마저 걷어낼 수 있어야 멋진 남자라고 했습니다. 교수님이 생각하는 멋진 사람은 어떤 모습인가요.
▲ 멋진 사람은 주체적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사는 사람이죠. 그러자면 자기에 대해 공부를 많이 해야 해요. 우리는 열심히 살고 한 번도 바쁘지 않은 적이 없는데 왜 이렇게 바쁘게 사는지에 대해선 한 번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이 들어 갑자기 모든 것이 허망해지는 거예요.
우리 교육은 성과 위주죠. 바꿔야 할 것은 바꾸지 않고, 바꾸지 말아야 할 것은 열심히 바꿉니다. 죽어라고 열심히 해서 하지 않느니만 못한 결과를 만들죠. 무한경쟁은 승자독식의 사회를 만듭니다. 이런 것이 요즘 문제가 된 연예인 같은 괴물을 만들었죠.
인문학은 바로 이런 것에 대해 '왜?'라는 질문을 던져야 해요. 맨날 똑같은 지점만 보고 똑같은 방식으로 생각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에게 질문을 바꿔 새로운 시야를 보여줘야 합니다.
요즘 일간지에 매주 '다산독본'을 연재하고 있는데 거기에서 다산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요. 흔히 다산이라면 완벽한 무결점의 인간으로 생각하죠. 하지만 그게 아니에요. 젊었을 때는 저돌적인 싸움꾼이기도 했고, 어떤 때는 상대를 협박하기도 했고, 자기 목적을 위해 직진하는 투사형 인간이기도 했죠.
그렇게 치열한 전투 속에서 처절하게 패배하고 좌절한 뒤 강진에 갔을 때 비로소 우리가 아는 다산이 나오는 거죠. 다산의 장점은 물론 단점도 그대로 보여줘야 그의 딜레마, 고민, 고충, 나아가 그가 살았던 그 시대를 이해할 수 있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 사실을 다루는 태도라고 생각해요. 우상화하는 대신 인간으로서의 다산을 보자. 인문학은 이런 것을 묻고 답해야 합니다. 똑같은 방식으로 말하지 말고, 본 것만 보지 말고, 뒤집어서 보고 흔들어서 봐야 하죠.

-- "세상은 날마다 변하는데 막상 변한 것은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 우리를 둘러싼 물질 환경은 계속 바뀌죠. 하지만 희로애락, 생로병사로 이어지는 삶의 본질은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조선 시대 부모들은 자식들의 과거급제에, 지금은 대학입시에 목을 매죠. 좋은 집안과 결혼시키려고 난리를 치는 것도 예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20년 전 제 컴퓨터 하드디스크 용량이 20MB(메가바이트)였어요. 당시 컴퓨터를 가져온 직원이 이거면 평생 논문을 써도 문제없을 거라고 말하던 생각이 납니다. 지금 용량이 그 몇만 배가 됐지만 우리 삶이 바뀐 것은 하나도 없어요.
속도가 빨라졌지만 삶이 본질적으로 빨라진 것은 아니죠. 우리는 계속 변화하는 환경 속에 놓여 있어도, 보편적 가치는 변하지 않아요.
공부는 붙들어야 할 것과 놔야 할 것이 무엇인지 판단하는 능력을 기르는 거예요. 인문학은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지를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저건 뭐지? 왜 그렇지? 어떻게 할까? 등 제대로 질문하는 법을 배우는 학문이에요. 바로 사유의 힘을 기르는 거죠.

-- "같지만 달라야 한다"는 상동구이(尙同求異)를 강조하는데요.
▲ 상동구이는 똑같이 되려면 똑같이 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똑같이 되려면 다르게 해야 한다는 거고, 다르게 할 때만 똑같이 될 수 있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 20대 청년이 이웃 노인이 90세 넘게 장수하는 것을 보고 자기도 오래 살겠다고 노인을 관찰하기 시작합니다. 노인은 맨날 죽만 먹고, 온종일 운동도 하지 않고, 절반은 잠을 자요. 그렇게 똑같이 하면 반년도 못 돼 폭삭 늙어버립니다.
청년이 얻으려 한 것은 노인의 건강인데 똑같이 했더니 노인의 늙음을 얻은 거죠. 건강을 얻으려면 저 노인이 나만 했을 때 어떻게 했나를 알아보고, 평생의 습관 속에서 배워야 할 것이 있는지를 봐야 하죠.
누가 유명 프랜차이즈를 하거나 특정 주식에 투자해서 돈을 벌었다고 해서 똑같이 따라 하면 안 되죠. 한때 안동찜닭이 무척 유행했는데 지금은 거의 볼 수 없잖아요.
따라 하지 말고 안동찜닭이 왜 인기가 높을까를 분석해야 하는 거죠. 안동찜닭에는 누구나 잘 먹고, 값이 싸며, 한국 사람의 입맛에 맞는다는 요소가 있어요. 그러면 무작정 찜닭집을 개업할 것이 아니라 이 같은 요소를 갖춘 다른 아이템을 개발해야 성공할 수 있는 거죠.
연암이 "비슷한 것은 가짜"라고 했듯이 남과 똑같이 하려 하면 망합니다. 비슷해지려고 하지 말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야 해요. 서태지 시대에 그의 방식이 있었다면 지금 BTS의 시대에 서태지를 흉내 내선 안 되죠.
국방도 마찬가지예요. 주적(主敵)에 따라 군사훈련체계가 바뀌어야 하죠. 조선 초기에는 말을 타는 여진족이, 임진왜란 때는 조총을 사용하는 일본이, 병자호란 이후에는 말을 타는 청이 주적이었죠.
임진왜란 때 신립 장군은 탄금대에 배수진을 쳤다가 몰살당했습니다. 여진족과 싸워서는 한 번도 패하지 않은 명장이었지만 조총을 가진 왜와는 싸워보지도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패하고 말았죠. 신립은 능력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바꿀 줄을 몰랐던 거예요. 적이 달라지면 그에 따라 전술도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죠. 탄금대 전투야말로 상동구이의 반면교사입니다.
오늘날 북한 문제도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상황에 따라 대응이 유연해야 해요. 지금 보면 원칙만 있고 그런 유연성이 없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순수한 열정을 떠나 미국, 중국, 일본과 계속 엇박자가 나고 있어요. 그러다가 고립무원의 외톨이가 될까 걱정입니다. 더 유연해져야 해요.
요즘 우리 정치권을 보면 어느 한쪽만 옳다고 주장하며, 편견이 너무 폭력적으로 행사되고 있어요. 조선 시대에도 당쟁은 치열했습니다. 폐단도 컸지요. 그런 정쟁을 에너지로 만드는 시대는 치세가 되고, 흙탕물 싸움이 되면 난세가 됩니다. 붕당이나 정쟁은 언제나 있지만 긍정적인 에너지로 만들어야 하죠. 통찰력과 안목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 최근 '잊혀진 실학자 이덕리와 동다기'를 냈습니다. 이덕리는 생소한 인물인데요.
▲ 이덕리(1725∼1797)는 시문집 '강심'(江心)과 국방 관련 저작인 '상두지'(桑土志)를 남긴 실학자입니다. '강심'에 실린 '기다'(記茶, 기존 '동다기'로 알려짐)와 '상두지'는 이제껏 다산의 저작으로 알려졌었죠.
이덕리를 찾은 건 2006년이었어요. 그런데 제가 찾은 이덕리는 동명이인의 다른 이덕리였죠. '새로 쓰는 조선의 차 문화'(2011)라는 책을 낼 때도 그 사실을 몰랐어요. 다행히 2013년 진짜 이덕리를 올바로 찾았습니다. 잘못된 것을 제 손으로 고칠 수 있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이덕리에겐 덕사(1721∼1776)란 형이 있었는데 정조 즉위 직후 사도세자 추존 상소를 올렸다가 이튿날 능지처참을 당합니다. 정치적 승부수를 던졌는데 타이밍이 너무 빨랐던 거죠.
이 일로 명망 높던 전의 이씨 집안이 풍비박산하고, 이덕리는 진도로 유배돼 19년을 보냅니다. 그는 진도 민가의 골방에서 이름을 감춘 채 '강심'과 '상두지'를 저술하죠. 이후 영암으로 옮겨져 2년을 더 살다가 73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강심에는 '기다'와 '기연다'가 수록돼 있는데 흥미롭습니다. 기다는 농한기 유휴 인력을 활용해 차를 생산하고 국가 전매를 통해 국부를 창출하자고 주장한 것이고, 기연다는 엄청난 재화가 담배 연기로 사라지는 현실에서 국가적인 금연 정책을 실시하자는 것이에요. 안목이 뛰어났던 거죠.
'상두지'에는 각종 전술과 전략 병기에 대한 설명이 자세히 나옵니다. 청을 주적으로 저들의 기병 공격에 대해 어떻게 효율적인 방어체계를 갖출 것인지에 대한 청사진을 제시했는데, 그 하드웨어의 구성과 실현을 위한 로드맵이 대단히 놀랍습니다.
이런 사람이 이제야 세상에 드러나게 된 것은 기적에 가깝습니다. 학자로서 이덕리를 만난 것은 굉장한 행운입니다.

-- 공부의 목적을 어디에 두고 있나요.
▲ 삶의 주체성을 확보하는 거죠. 옛사람들과 계속 대화를 하고 있는데, 이것을 상우천고(尙友千古)라고 합니다. 옛사람을 벗으로 숭상한다는 말이죠. 옛사람은 죽고 없어 일방적일 것 같지만 신기하게 대화가 됩니다. 다산의 글을 보면 안타까운 속내가 보이고, 연암의 글을 읽으면 답답한 그 시대가 보입니다. 이덕무의 글에는 깊은 연민과 위로가 나타납니다.
옛사람과의 대화는 결국 저 자신과의 대화에요. 옛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삶을 버티고 갱신시키며 발전시키는 힘을 얻죠. 삶을 대하는 바른 태도,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의 구분을 배웁니다.

-- 앞으로 계획이 궁금합니다.
▲ 출간하고 싶은 책도 많고, 국문학사 작업도 해야 하는데 건강이 뒷받침되면 좋겠습니다. 제가 즐거워서 하는 공부가 사회에 어떤 의미를 던질 수 있으면 행복한 일이겠죠. 제 삶까지 붙들 수 있으면 더없이 고마운 일입니다.
또 한가지는 현장과의 만남이죠. 자료가 어디 있다고 하면 살 수는 없어도 직접 가서 사진을 찍어서 연구에 활용합니다. 현장에서 만난 자료를 삶의 질문들과 연결해가는 것이 앞으로도 계속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주요 저서 = '한시미학산책', '다산선생 지식경영법', '우리 한시 삼백수', '한서 이불과 논어 병풍', '다산의 제자 교육법', '다산 증언첩', '나는 나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9년 4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dklim@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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