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ㆍ1운동.임정 百주년](64)'임정의 아들' 김자동의 90년

입력 2019-04-09 06:00   수정 2019-04-09 07:59

[3ㆍ1운동.임정 百주년](64)'임정의 아들' 김자동의 90년
상하이 임정서 출생·성장…언론인·사업가 거쳐 임정기념사업회장 맡아
얄타회담 전문 실은 뉴욕타임스 기사 특종보도…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 번역
"(독립운동 하던)어른들이 힘들었지, 나는 재미있기만 했어…남북 평화가 마지막 바람"


(서울=연합뉴스) 김지헌 기자 = 기력은 쇠했어도 기억은 또렷했다.
보청기 가까이서 높은 언성으로 질문을 몇 번씩 반복하게 할지언정 두 시간 가까이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숱한 사람 이름, 지명, 사건을 생생히 떠올렸다.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김자동(90) 회장이 최근 연합뉴스 인터뷰에서 풀어놓은 얘기는 임시정부, 한국전쟁 전후, 산업화 시기를 아우르는 한국 근현대사 그 자체였다.
1929년 중국 상하이 프랑스 조계지의 임시정부 청사에서 태어난 김 회장은 "'100주년이 됐나 보다' 하는 것이지 나이도 있는 제가 100년이라고 즐거워할 일도 없다"는 말로 '임정 100주년'의 소회를 대신했다. 김 회장의 부모는 독립운동가인 김의한 선생과 '임정의 안주인'으로 불렸던 정정화 선생이고, 할아버지는 3·1 운동 이후 태동한 독립운동 단체 대동단의 총재를 지낸 김가진 선생이다.
담담한 소감을 내놓은 김 회장은 엄혹했던 그 시절에 대한 기억을 묻자 "어른들이 어려웠지, 나는 재미있기만 했다"며 웃었다.
김 회장은 "어머니가 시장 갈 적에 따라가서 엿이라도 얻어먹는 재미가 있었고, 피난 가는 배에선 애들끼리 숨바꼭질하고 놀았다"며 "지리와 여행에 관심이 컸는데 피난 다니면서 묘족, 광족 등 중국 소수민족을 보는 것도 매우 즐거웠다"고 떠올렸다.
같이 숨바꼭질하던 친구 중 독립운동가 엄항섭(1898-1962) 선생의 아들 엄기동 씨와 가장 친했다고 한다.
김 회장은 "엄기동은 6·25 때 (북한) 의용군으로 갔는데 끌려갔는지 자원했는지 모르겠다"면서 "2006년 평양에 갔을 때 수소문해보니 인민군 명단에는 없다고 했다"며 전쟁통에 기약 없이 사라진 옛 친구에 대한 그리움을 감추지 않았다.
임정 시절을 떠올리면 이동녕(1869-1940), 이시영(1869-1953) 선생이 가장 많이 생각난다고 했다.
그는 "김구, 조소앙, 엄항섭 같은 다른 분들은 내가 다 아저씨라고 불렀는데 그 두 분은 할아버지라고 불렀다"며 "자기 생각은 안 하고 항상 다른 사람들을 먼저 생각하는, 가장 존경받을 만한 분들이었고 나를 귀여워해 주셨다"고 말했다.


인터뷰가 있었던 지난달 29일 김 회장은 당일 오전 정부가 주최한 3·1운동 및 임시정부 100주년 기념 국제 학술포럼 행사장에 다녀왔다.
불편한 무릎 탓에 양손에 지팡이를 쥐어야 해 외부 일정을 꺼리는데도 이날은 어려운 걸음을 마다하지 않았다고 한다.
김 회장은 시카고대 석좌교수인 커밍스의 저서 '한국전쟁의 기원'을 출판사의 의뢰로 번역해 국내에 처음 소개한 인물이다.
김 회장은 "행사장에서 브루스 커밍스와 박노자 교수를 만났다"며 "귀가 안 좋아서 얘기는 제대로 못 나눴지만, 커밍스는 내가 자기 책을 번역했다는 사실을 안다고 했다. 박노자는 한국을 제대로 알아보려고 내 책 '임시정부의 품 안에서'를 읽었다더라"고 전했다.
보성중학교와 서울대 법대를 나온 그는 전후 조선일보 기자로 활동하면서 얄타회담 전문을 실은 뉴욕타임스 기사를 국내 최초로 특종 보도했고 민영 뉴스통신사인 동양통신에서 외신기자로도 근무한 저널리스트였다.
김 회장은 "학교도 제대로 못 다녔으니 공부할 시간은 없었다"면서도 "시사 문제에 관심이 많아 시사잡지를 열심히 읽은 게 공부가 됐다"고 소싯적을 돌아봤다.
그 습관은 구순에 이른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김 회장의 서울 종로구 사무실 책상에는 국내 일간지와 영자지는 물론 뉴욕타임스도 놓여 있었다.
그는 "대개 제목만 보고 마니까 금방 읽는다"면서도 "늙으면 치매에 걸리는데 신문을 읽으니 그 내용이 기억은 안 나도 치매 예방에 도움이 된다"고 웃음 지었다.
어린 시절 피난 다니면서 역마살이 낀 탓인지, 김 회장의 삶은 지구적 규모로 파란만장하게 펼쳐졌다.
"(정부의) 간섭이 많아서 썩 재미가 없었다"는 기자 생활을 그만 두고 베트남으로 건너가 호찌민 근처에서 사업을 하다가 당시로써는 거액인 10만 달러를 한 번의 거래로 벌기도 했다.
사업이 잘 나가던 1968년 설을 맞아 잠시 쉬러 홍콩에 건너간 덕택에 베트콩의 '구정 대공세' 참화를 피할 수 있었고 이후 베트남 사업을 접었다고 한다.
김 회장은 "중국 칭다오 근처에서 방직기계를 만드는 사업도 했고, 중국 개방 이후엔 중국의 28개 성과 5개 자치구를 모두 가 봤다"며 "지구 전체로는 100개 국가 정도를 방문했다"고 했다.
얄타회담 전문 보도를 실은 뉴욕타임스를 선뜻 건네줬던 당시 주한미국대사관 담당자와도 세상에 대한 관심 덕에 친해질 수 있었다고 한다.
김 회장은 "그 사람이 핀란드계였는데 그때 한국에는 핀란드 역사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그 사람에게 '당신들도 아시아 계통 사람 아니냐'고 했더니 그렇다면서 깜짝 놀라더라"고 떠올렸다.


이제는 걸음마저 쉽지 않은 김 회장의 마지막 남은 바람은 남과 북이 다시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이다.
김 회장은 "북미 하노이 회담이 결과는 못 냈어도 헤어지면서 서로 비난하는 얘기가 없었던 것, 교류를 끊지 않고 있다는 것, 누구 때문이니 하는 얘기가 안 나오는 것이 참 다행스럽다"고 말했다.
그는 "어떡하든 남북 간 평화가 정착해서 교류가 많아지면 통일의 기회가 올 것이라 믿는다"며 "지금이라도 사업을 할 수 있다면, 나이가 이렇게 많지만, 평양에 지사를 차리고 왔다 갔다 하면서 사업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소원을 말했다.
jk@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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