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 프랑스 재건 이끈 국립행정학교 '에나' 역사 뒤안길로

입력 2019-04-27 07:01  

전후 프랑스 재건 이끈 국립행정학교 '에나' 역사 뒤안길로
졸업장, 성공의 보증수표…25세께 간부급 공무원으로 출발해 정·재계 고위직 꿰차
테크노크라트 산실이었지만, 불평등의 상징으로…졸업생 마크롱의 손에 폐교 수순
공무원 육성 새 교육기관 검토…"에나 폐지한다는 건 쇼일 뿐" 지적도



(파리=연합뉴스) 김용래 특파원 =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정·재계의 최고 엘리트 그룹을 양성해온 '에나'(ENA·국립행정학교) 폐교 방침을 공식화함에 따라 프랑스 현대사와 함께한 ENA가 개교 70여년 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
이 학교는 프랑스 정·관계의 상층부를 지탱하며 전후 프랑스의 재건과 발전에 크게 기여했지만, 사회의 권력·자본을 소수의 졸업생이 독식하면서 불평등을 고착화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전통적으로 비대했던 프랑스 정부의 역할이 축소돼 테크노크라트(전문관료) 그룹을 양성할 필요성이 줄면서 에나는 졸업생인 마크롱 대통령의 손에 폐교의 운명을 맞게 됐다.

◇ 2차대전 직후 드골 대통령이 설립…전후 재건 위한 테크노크라트 '산실'
마크롱 대통령은 지난 25일(현지시간) 생방송 대국민 담화에서 에나를 폐지하겠다고 선언했다.
마크롱은 '노란 조끼' 연속시위에서 나타난 엘리트 계층에 대한 서민들의 분노에 대한 대책의 하나로 그랑제콜(소수정예 특수대학) 중에서도 상징성이 큰 에나를 택했다.
마크롱 대통령이 자신이 졸업한 ENA의 폐교라는 극약처방을 들고나온 것은 이 학교가 바로 프랑스의 정치·행정 엘리트를 양성해온 대표적 그랑제콜이기 때문이다.
2차대전 직후인 1945년 샤를 드골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설립된 에나는 프랑스 동부 스트라스부르에 있으며 2년제다.
매년 100명이 거머쥐는 ENA 졸업장은 프랑스에서는 평생을 따라다니는 명예이자 훈장으로, 성공의 보증수표나 다름없었다.
에나에는 다른 일반대학이나 그랑제콜을 졸업한 학생들이 엄격한 선발 절차를 거쳐서 진학하며, 졸업생들은 프랑스 정부의 간부급 관료로 채용돼 일정 기간의 의무 복무를 거친다.
에나를 졸업하면 이르면 만 25세쯤 프랑스 주요 정부 기관의 간부급 직위로 채용되는데, 말단으로 공직을 시작한 공무원이 30년을 근무해야 겨우 진입할 수 있는 직위로 사회생활을 시작한다.
또 수년간의 의무복무 기간을 거친 뒤에는 선택지에 따라 민간 대기업이나 금융기관으로 옮겨 경제적인 윤택함도 보장됐다. 마크롱 대통령 본인이 이런 코스를 그대로 거쳤다.
파리 낭테르대에서 철학을 공부한 마크롱은 그랑제콜인 파리정치대학(시앙스포)을 거쳐 ENA에서 2002∼2004년 수학했다.
졸업 후에는 경제 부처에서 간부급 공무원으로 일하다가 투자은행 '로스차일드'로 옮겨 기업인수합병(M&A) 임원으로 일하다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에게 발탁돼 엘리제궁 경제보좌관으로 정치에 뛰어들었다.


◇ 졸업생 네트워크 탄탄…"고위직 독식" "시대변화 못따라가" 비판 직면
마크롱뿐 아니라,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 등 4명의 전·현직 프랑스 대통령, 에두아르 필리프 현 총리 등 7명의 총리가 에나 동문이다. 프랑스 최대 통신기업 오랑주와 3대 시중은행에 속하는 소시에테제네랄의 현 최고경영자도 이 학교를 졸업했다.
프랑스에서 '에나크'(enarque)로 불리는 ENA 동문은 정·관계뿐 아니라 재계에도 광범위하고 촘촘한 네트워크를 형성해 서로 끌어주고 밀어주며 권력·자본을 독과점하다시피 했다.
정·재계 고위직을 ENA 출신이 독식하는 구조가 굳어지고 입학생들도 대부분 상류층에서 배출되자, 에나는 신분과 배경에 상관없이 평등하게 테크노크라트를 육성한다는 취지를 벗어나 불평등의 상징이 되어 버렸다.
전후 프랑스를 재건하고 고도성장을 이루는데 필요했던 고급관료 양성시스템이 수명을 다했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고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프랑스 정부의 역할이 예전에 비교해 많이 축소된 데다, 경제구조가 다원화·국제화하면서 고급인력을 수혈하는 경로가 다양해져 에나 출신의 매력도 그만큼 줄었다는 것이다.
ENA가 실무보다 이론 위주의 교육과정을 고집하는 것 역시 시대변화에 뒤처진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ENA 폐교 결정에는 마크롱 대통령 본인이 이 학교에 다녔다는 개인적 경험도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마크롱의 ENA 동기들은 2004년 졸업 때 ENA의 교육 내용이 '별 볼 일 없었다'고 비판하며 동기 서명운동을 조직했다.
마크롱의 에나 동기이자 이 학교가 소재한 스트라스부르를 지역구로 둔 올리비에 벡트 의원은 최근 공영 프랑스3 방송 인터뷰에서 당시 졸업생들이 "ENA에서 우리가 전에 시앙스포(파리정치대학)에서 수학한 것과 다를 것 없는 것을 배웠을 뿐이고, 이런 값비싼 교육과정이 쓸모가 없다"는 내용의 항의서한을 ENA 학장에게 보냈다고 회고했다.
ENA 폐교 방침은 졸업생들 사이에서도 찬반이 엇갈리고 있다.
에나 동문회장인 다니엘 켈러는 프랑스앵포 라디오에서 "에나가 복잡한 정치·사회 상황의 희생양이 됐다"면서 "교육 불평등을 뜯어고치려면 피라미드의 최상층부(에나)만을 건드려서는 성공할 수 없다"고 말했다.
반면에 마크롱의 ENA 동기이자 프랑수아 올랑드 전 대통령 재임 시 엘리제궁 홍보수석을 지낸 가스파르 간체르는 BFM방송 인터뷰에서 에나가 "순응과 보수주의의 산실이었다"면서 대통령의 결정을 환영했다.
에나가 이름만 바꿔 달고 핵심 성격은 그대로 유지될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마크롱 대통령 본인도 대국민 담화에서 ENA를 폐지하는 대신 국가공무원을 육성하는 새 교육기관을 출범시키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히면서 에나의 건물과 교수진까지 없애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 '노란 조끼' 시위의 지도자 격인 크리스토프 샬랑송은 로이터통신 인터뷰에서 "에나를 폐지한다는 건 다 쇼일 뿐"이라고 말했다.
yonglae@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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