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무신 소년', '헌혈 여고생'…39년 전 멈춘 '학생들의 시계'

입력 2019-05-12 08:31  

'고무신 소년', '헌혈 여고생'…39년 전 멈춘 '학생들의 시계'
초등 4학년에서 고 3까지, 18명의 어린 생명…하늘도 슬퍼할 원통한 죽음
출신학교마다 헌혈·추모공간 조성·계기 수업 등 '5·18 기억하기'


(광주=연합뉴스) 손상원 기자 = 다시 돌아온 5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5·18 민주화운동 학생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학교들의 활동이 분주해졌다.
학생들은 39년 전 계엄군에 속절없이 희생된 선배들의 멈춰선 시계를 마음으로나마 다시 돌리려 5·18 정신 계승·실천을 외치고 있다.
◇ 계엄군 총격에 원통하게 떨어져 나간 꽃잎들
12일 광주시교육청에 따르면 각종 문헌, 증언, 자료 등을 토대로 파악한 5·18 학생 사망자는 모두 16개 학교, 18명인 것으로 추정된다.
계엄군에 의해 다발성 타박상이나 총상으로 숨졌으며 한때 매장됐거나 시신 일부가 없는 상태로 발견된 사례도 있다.
첫 학생 희생자는 1980년 5월 20일 광주 동구 동명동 동문 다리 인근에서 '데모꾼 연락병'으로 지목돼 계엄군에 끌려간 당시 동신중 3학년 박기현 학생인 것으로 시교육청은 보고 있다.
진압봉 등으로 심한 구타를 당해 다음날 다발성 타박상으로 숨진 채 전남대병원에서 발견됐다.
시민을 향한 집중 사격이 있었던 21일에는 무등중 3학년 김완봉, 전남여상(당시 춘태여상) 3학년 박금희, 숭의중 2학년 박창권, 대동고 3학년 전영진, 동성고(당시 광주상고) 2학년 이성귀, 송원고 2학년 김기운 등 학생 6명이 총상으로 희생됐다.
박금희 학생은 시민 부상자가 쏟아져 나온다는 소식에 지나가는 차를 잡아타고 기독병원에서 헌혈하고 나오다가 총에 맞았다.
안타까운 사연은 고은 시인의 '만인보'에도 기록됐다.
다른 학생들은 금남로에 있던 전남도청 인근에서 총상을 입었다.
김기운 학생은 무명열사로 시립공원 묘지 3 묘역에 묻혀 있다가 2001년 10월 유전자 감식을 통해 가족을 찾았다.
무명열사 묘지는 일부 폄훼 세력이 '북한군 묘지'로 불렀던 곳이다.

숭의고 1학년 양창근 학생은 22일 공용버스터미널 앞에서 머리에 총을 맞았다.
23일에는 지원동 주남마을에서 광주일고 부설 방송통신고 3학년 황호걸 학생, 송원여상 3학년 박현숙 학생이 숨졌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방통고에 진학했던 황 군은 도청 지하실에서 시신에 묻은 피와 오물을 닦다가 관이 부족해 화순으로 구하러 가던 중 매복해 있던 군인들의 집중 사격을 받았다.
황 군은 구한말 의병대장 황병학 선생의 손자로 알려졌다.
박현숙 학생은 집에 쌀이 떨어져 동생에게 밥을 해주지 못해 안쓰러워했다는 기록이 있다.
총에 맞고는 "물, 물, 물"이라고 말하다가 의식을 잃었다는 생존자의 증언이 남았다.
24일에는 남구 진월동 저수지에서 물놀이하던 전남중 1학년 방광범 학생이 사망했다.
같은 마을에 사는 효덕초 4학년 전재수 학생은 동산에서 놀다가 숨졌다.
총소리에 놀라 친구들과 뿔뿔이 도망치던 전 군은 며칠 전 생일 선물로 받은 고무신이 벗겨져 주우러 돌아섰다가 총에 맞았다.
고무신을 목숨처럼 귀하게 여겼던 어린아이는 영정사진조차 없다.
비문에 새겨진 "고이 잠들어라"는 아버지의 마지막 인사에는 어떤 말로도 형언할 수 없는 단장의 슬픔이 압축됐다.
같은 날 살레시오고 2학년 김평용 학생은 남구 송암동에서, 조대부중 3학년 김부열 학생은 지원동 부엉산에서 사망했다.
당시 101 사격장에 암매장됐던 김평용 학생을 부모, 담임 교사, 시청 직원이 함께 찾아냈다.
총을 들고 계엄군과 싸우다 숨진 김부열 학생은 시신이 훼손된 상태였다.
27일은 계엄군이 이른바 '상무 충정작전'을 진행한 최후 항전의 날이었다.
서광여중 3학년 김명숙, 동성고 1학년 문재학·안종필, 조대부고 3학년 박성용 학생이 희생됐다.
친구 집에 가다가 전남대 용봉천 주변에서 좌측 골반에 총을 맞은 김명숙 학생의 집에 들어온 군인은 "엉덩이에 맞았으니 괜찮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문재학, 안종필 학생은 전남도청에서 숨졌다.
안종필 학생은 며칠 전 맞춘 교복 영수증과 돈 500원을 유품으로 남겼다.
박성용 학생은 "친구가 광주공원에 갔는데 아무래도 죽은 것 같다"며 자취하는 친구를 걱정하다가 26일 집을 나섰다가 돌아오지 못했다.
◇ "내 나이 선배들 죽음 헛되지 않도록"…학교마다 기념사업
39년이 지나도록 초·중·고교생에 멈춰있는 희생자들의 모교는 매년 추모사업으로 억울한 죽음을 기억하려 한다.
전남여상 3학년 학생 약 80명은 지난 10일 기독병원에서 헌혈 행사를 했다.

1980년 같은 곳에서 헌혈하고 나오다가 숨진 '박금희 언니'의 나눔 정신을 기리기 위해서다.
'고무신 소년' 전재수 학생의 효덕초교는 교내에 추모공간을 조성하고 우체통을 만들어 학생들이 적은 편지를 담는다.
3명의 희생자가 나온 동성고는 국립 5·18 민주묘지 등에서 5·18 발자취 찾기 등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추모 글쓰기·미술 대회를 열어왔다.
서광중은 5·18 묘역 참배, 전문 강사 초청 강의, 법정·영창 상황극 등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무등중은 추모비 건립, 주먹밥 만들기 행사, 5·18 만화 그리기 등 동아리 활동으로 학생들이 5·18을 이해하도록 했다.
숭의중은 도서관에 5·18 관련 코너를 마련하고 글짓기 대회, 학생 희생자 추모식, 묘지 참배, 역사 탐방 등을 추진해왔다.
전남중도 기념비 제작, 주먹밥 나눔 행사, 오카리나 연주대회 등으로 정신 계승에 노력했다.
대동고는 1989년 총동문회 주관으로 추모비를 설립했으며 2006년에는 학교 이전과 함께 추모비를 옮기고 알림석도 세웠다.
송원여상은 학생 민주인권평화 동아리를 운영하고 노란 장미로 추모의 화환을 만드는 기념행사도 추진했다.
광주시교육청 관계자는 "학교마다 5월이면 39년 전 같은 나이대였던 학생 희생자와 공감하고 민주주의를 생각하려는 노력이 확산하고 있다"며 "지난 3월 전두환 씨가 광주 법정에 선 날 초등학생들이 '전두환 물러가라'를 외쳤다는 이유로 학교 앞에서 기자회견을 한 일부 단체의 모습을 보니 학생 희생자들의 사연이 중첩돼 많은 생각이 들더라"고 말했다.

sangwon700@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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