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훈의 골프산책] 이정은의 성공을 이끈 남다른 목표의식과 집념

입력 2019-06-06 07:06  

[권훈의 골프산책] 이정은의 성공을 이끈 남다른 목표의식과 집념




(서울=연합뉴스) 권훈 기자= 레슨프로, 수학여행,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투어 신인왕, 그리고 콜라와 라면.
한국인으로 9번째 US여자오픈 챔피언에 오른 이정은(23)의 골프 인생을 압축해 설명해주는 네 가지다.
이정은은 '레슨 프로'가 되려고 골프채를 잡았다. 세계 최고의 선수가 되겠다는 포부를 안고 시작하는 다른 선수와 달랐다.
"공부에는 흥미가 없었다. 공부를 해봐야 할 게 없을 것 같았다. 레슨프로가 되면 먹고는 산다고 하길래 골프를 했다"는 게 이정은이 밝힌 골프 입문 동기다.
이정은은 고등학생 때 수학여행을 다녀왔다. 고등학생 엘리트 스포츠 선수가 수학여행을 간다는 건 예전이나 지금이나 상상도 못 할 일이다.
이정은은 "프로 선수가 되겠다는 목표가 없었기에 학교 수업도 빠짐없이 다 들었다"면서 "수학여행도 빠질 이유가 없었다"고 술회했다.
이정은이 다닌 순천 청암고는 골프부도 없었다. 중학교 3학년 때 골프를 시작한 이정은은 골프부가 있는 고등학교에 특기생으로 진학하기가 어려웠다.
'레슨프로'가 목표인 여고생이 학교 수업은 물론 수학여행까지 다녔으니 경쟁이 치열하기로 세계 최고인 한국 주니어 골프 무대에서 존재감이 있을 리 만무했다.
반전은 고교 2학년 때인 2013년 베어크리크배 아마추어 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면서 일어났다.
국가대표 에이스 이소영과 박소혜, 성은정, 그리고 국가대표 상비군 지한솔, 이효린 등이 출전한 이 대회에서 이정은은 2위를 6타차로 따돌리고 정상에 올랐다.
한 선수는 "이정은이라는 이름은 그때 처음 들어봤다"고 회상했다.
이정은은 이 대회 우승을 계기로 '엘리트 선수'의 길을 걷게 됐다. 그는 "까마득하게만 보이던 국가대표 선수들을 제치고 우승하니 내가 골프에 소질이 있나 보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레슨프로'가 아닌 '프로 선수'로 목표를 바꾼 이정은은 골프에 모든 걸 걸고 매진하기 시작했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라면 어떤 어려움도 이겨내는 이정은의 집념은 이때부터 빛을 냈다. 이정은은 혹독한 훈련을 묵묵히 견뎠다.
박현순 전 국가대표 코치는 "다들 하루면 나가떨어지는 힘든 훈련을 두달 동안 불평 한마디 없이 해내더라"면서 "한번 목표를 정하면 절대 포기하지 않을 아이란 걸 그때 알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초등학생 때부터 엘리트의 길을 걸어온 또래들과 격차는 여전히 컸다.
이정은은 2015년 처음 국가대표에 뽑혔다. 한국체육대학 1학년 때였다. 여자 주니어 엘리트 선수들은 이르면 중학생 때, 늦어도 고교생 때 태극마크를 단다.
당시 이정은과 국가대표 한솥밥을 먹었던 동료는 모두 동생들이었다.
광주 유니버시아드에서 금메달을 땄지만 이정은은 '일류'의 반열에 오르지 못했다.
엘리트 여자 선수 대부분은 대학 입학 전에 프로로 전향하기에 유니버시아드 금메달은 한국 골프 '시장'에서는 평가가 박하다.
2015년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투어 시드전에서 이정은은 30등을 했다. 시드를 받는데는 문제가 없었지만 '미래의 골프 여왕'치고는 초라하기만 한 성적이었다.
시드전이 끝나면 열리는 타이틀 스폰서 계약 시장에서도 이정은은 찬밥이었다.
여자 프로 선수를 가장 활발하게 영입하는 중견 건설사도 이정은을 외면했다. 그때 선수 영입을 맡은 한 건설사 임원은 "제안이 왔지만 이력을 살펴보고 거절했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 생각하면 땅을 치고 후회할 일"이라도 덧붙였다.
이정은은 2016년 KLPGA투어 신인왕에 올랐다.
신인왕에 오르고도 이정은은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우승 없는 '반쪽 신인왕'이라는 평가가 따랐다.
그런데 신인왕 타이틀이 이정은의 집요한 목표 의식의 산물이었다.
이정은은 "시즌 초반을 넘기고 나니 잘하면 신인왕을 탈 수 있겠다 싶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이정은은 신인왕을 따겠다고 작심하면서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신인왕 타이틀 경쟁에는 '한방'도 중요하지만 시즌 내내 랭킹 포인트를 따는 '꾸준함'이 더 요긴하다.
이정은은 "포인트를 따려면 컷을 통과해야 한다. 컷 통과를 하려면 안전한 플레이를 해야 했다"고 털어놨다.
이정은은 루키 시즌 내내 '한방'보다는 컷 통과에 집중했고 결국 신인왕이라는 달콤한 열매를 수확했다.
이정은은 또 한번 목표를 '상향 조정'했다.
KLPGA투어 2년차 목표는 상금랭킹 10위 이내 진입이었다.
시즌을 앞두고 100㎏ 역기를 어깨에 메고 근육을 키웠고 좀 더 다듬어야겠다던 쇼트게임과 퍼트를 연마했다.
겨울 훈련 때 강훈련을 하는 선수는 많지만 이정은의 훈련은 다섯 손가락 안에 들 만큼 강도와 밀도가 높았다.
이런 노력은 2년차에 전관왕라는 열매를 맺었다.
'목표'를 초과 달성한 이정은에게도 여지 없이 '번아웃 증후군'이 찾아왔다는 사실도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골프 여왕'이 됐는데도 "하나도 행복하지 않다"는 투정을 주변에 털어놓던 이정은이 다시 신발끈을 조이게 된 계기는 신지애와 만남이었다.
한국, 미국에 이어 일본 상금왕을 목표로 삼고 달리던 신지애의 철저한 자기 관리를 바로 옆에서 목격한 이정은은 "나는 아직 한참 멀었다"는 반성을 했다고 한다.
이정은은 지난해 8월 한화 클래식 1라운드에서 보기없이 4언더파를 친 뒤 "콜라 한잔을 마시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좋아하던 콜라를 끊다시피 했다고 밝혔다. 그는 "노보기 라운드를 하면 나 자신에게 상으로 콜라 한잔을 허용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한번 목표를 정하면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이정은의 진면목은 이 '콜라 한잔'으로 다시 한번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정은은 '번아웃 증후군' 초기 증세를 보란 듯이 털어냈고 상금왕 2연패를 달성했다.
LPGA투어에서 첫 우승을 차지한 뒤 "라면을 먹겠다"고 말한 것도 이정은이 '미국에서 성공하겠다'는 목표에 얼마나 치열하게 매달렸는지를 웅변으로 말해준다.
이정은은 "밥보다 라면을 더 좋아했다"면서도 "우승하기 전까지는 먹지 않겠다고 나 자신과 약속했다"고 말했다.
길다고 하기 어려운 골프 인생에서 이정은은 자신의 능력과 처지를 냉정하게 직시한 뒤 가능성이 있는 목표에 집중해왔다.
'레슨 프로'를 타진하다 전국 대회 우승을 계기로 '프로 선수'의 꿈이 보이자 그는 혹독한 훈련으로 꿈을 이뤘다.
초라하게 시작한 프로 무대에서 '신인왕 가능성'을 보자 치밀하게 준비해 끝내 타이틀을 손에 넣었다.
'상금랭킹 10위'라는 소박하지만 현실적인 목표를 세우고선 전관왕에 올랐고, 잠시 흔들렸던 마음을 다잡아 상금왕 2연패를 이뤘다.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 속에서 발을 내디딘 미국 무대에서도 '성공하겠다'는 목표를 정하자 앞만 보고 달린 끝에 메이저대회 우승이라는 성과를 거뒀다.
LPGA투어에서 고작 9번째 대회 만에, 그것도 최다 상금이 걸린 메이저대회 US여자오픈을 제패한 이정은의 다음 목표는 아직 공개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게 어떤 목표든 꼭 이루고 말 것이라는 게 이정은을 아는 사람들의 일치된 견해다.
khoon@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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