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마항쟁 40년] ② 진상규명 보고서는 아직도 '미완성'

입력 2019-07-17 09:01   수정 2019-07-17 10:12

[부마항쟁 40년] ② 진상규명 보고서는 아직도 '미완성'
10·26 이후 곧바로 전두환 집권 등 수십년간 '4대 민주항쟁' 대우 못 받아
2000년대 들어 진상규명 요구 시작, 관련 보고서 부실 논란 등 과제 산적



(부산=연합뉴스) 김재홍 기자 = 부마항쟁은 4·19 혁명, 5·18 민주화운동, 6·10 민주항쟁에 이어 우리나라 4대 민주항쟁으로 꼽힌다.
유신정권 막을 내리게 한 결정적 사건이었지만, 사실상 수십년간 그에 상응하는 대우는 받지 못했다.
1999년 김대중 대통령이 부산 민주공원 개원식에서 처음으로 '부마민주항쟁'이라는 표현을 쓰기 전까지 부마항쟁은 '부마사건'으로 불렸다.
대체 이유가 뭘까?
부마항쟁 이후 상황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부마항쟁은 그 자체로서 큰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직접적인 박정희 정권 종결을 끌어내지 못했다.
유신정권에 이어 들어선 전두환 정권은 그 수장만 바뀌었을 뿐 기본적인 틀이 상당히 유사한, 사실상 간판만 바뀐 군사정권이었다.

10·26 사건 당시 제주지역을 제외한 전국에 발령된 계엄령이 금방 해제되기는커녕 오히려 5·18 광주민중항쟁 당시 제주 지역까지 확대됐다.
이런 분위기가 부마항쟁에 대한 언급 자체를 반강제적으로 막아버린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사망하면서 동정론이 생겨난 것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 결과 부마항쟁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본격적인 활동은 2000년대에 들어서야 시작됐다.
2005년 5월 3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이 통과되자 그해 12월 1일 항일 독립운동, 일제강점기 이후 해외동포사, 광복 이후 반민주적 또는 반인권적 인권유린과 폭력, 학살, 의문사 사건 등을 조사해 그 진실을 밝힐 '진실화해위원회'가 출범했다.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는 2006년 11월 이 위원회에 부마항쟁 진상규명을 신청한다.
2009년 12월부터 6개월간 이뤄진 조사 끝에, 2010년 5월 시위 진압 및 수사 과정에서 불법 구금 및 가혹행위가 있었으며, 국가가 피해자를 확인하고 그들의 명예회복과 피해구제를 위한 조처를 하라는 권고가 나온다.
2010년 7월부터 관련 단체와 관계자를 주축으로 '부마민주항쟁 특별법' 제정이 추진됐으나 18대 국회 임기가 2012년 5월 만료되면서 자연적으로 소멸했다.
2013년이 돼서야 '부마민주항쟁 관련자의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부마항쟁보상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해 부마항쟁 진상규명을 위한 법적 근거가 마련된다.

그러나 부마항쟁보상법은 많은 한계를 안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부마항쟁보상법 제 2조에 따르면 항쟁 기간은 1979년 10월 16일부터 20일까지다.
실제로는 그해 8월부터 시위가 준비된 데다 항쟁 기간 하루 전인 10월 15일에도 시위 시도가 있었고, 10월 20일 이후에도 부산과 마산은 물론 경남 일대에서 산발적인 시위가 진행됐다.
항쟁 기간 전후 시위에 참여했다가 공권력 피해를 본 참여자는 법적으로 그 어떤 보상과 명예회복도 받을 수 없는 셈이다.
특별법이 아닌 일반법으로 분류되는 부마항쟁보상법은 '생활지원금' 지급 대상자 관련 규정에서도 허점이 드러났다.
'30일 이상 구금된 자'라는 규정이 그렇다.
당국은 10·26 사건 이후 부마항쟁 과정에서 구금한 피해자를 실질적으로 처벌하기 어려웠고, 그로 인해 즉결심판 등 이유로 30일 이내에 구금에서 풀려난 경우가 있었다.
'재직기간 1년'이라는 조항도 비슷하다.
당시 특히 경남 마산지역 공장 노동자들 이직이 잦을 수 있는 상황에서 관련자 기준을 지나치게 좁힌 것으로 보인다.
'5·18 보상법'이 단 하루라도 구금당했거나 취직 직후 해직됐어도 대상자로 지정할 수 있다고 규정한 것과 상당히 대조적이다.
유공자 예우는 처음 법안이 발의될 당시에는 제안이 돼 있었으나 최종 통과 과정에서 특별법이 일반법으로 변경되면서 삭제됐다.

전문가들은 무엇보다도 '국무총리 소속 부마민주항쟁 진상규명 및 관련자 명예회복심의위원회(진상규명위원회)' 구성과 활동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진상규명위원회는 시행령 공포 이후 1년이 훌쩍 지난 2014년 10월 첫 임기를 시작했다.
위원수는 20명이던 '제주 4·3 사건'보다 적은 12명에 불과했고, 위원 중에는 한 행사에서 5·16 군사 쿠데타를 찬양하는 발언을 했거나, 교학사 역사 교과서를 지지한 인사가 포함되기도 했다.
부마항쟁보상법 한계 속에 정부 추산 부마항쟁 참여자는 1천560명인데 진상규명위원회에 관련자로 신청한 사람은 10%를 조금 넘는 수준에 불과하다.
진상조사를 전담하는 공무원이 턱없이 모자란 상황에서 진상규명위원회가 당시 핵심 사료를 가지고 있을 국정원이나 육군본부 등에서 받은 문건조차 거의 없다.
해당 기관은 '자료가 없다'라는 이유로 공개나 제공을 거부하고, 진상규명위원회도 해당 기관 방문 등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다 보니 부마항쟁 당시 확인된 유일한 사망자였던 유치진(당시 51세) 씨 가족은 진상규명위원회로부터 관련자 인정을 받지 못하고 끝내 관련자 신청을 철회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유 씨는 경남 마산에서 시위가 격렬했던 1979년 10월 18일 밤 집을 나간 뒤 10여 일 만에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왔다.

설상가상으로 진상규명위원회가 출범 3년 만인 2018년 2월 23일 진행한 '부마민주항쟁 진상조사 결과 보고회'는 그 취지를 무색게 했다.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회장을 역임한 정성기 경남대 교수는 당시 부산시의회 2층 대회의실에서 열린 보고회에서 사망자 관련 부분을 지적하며 "'진상조사'가 아니라 부마항쟁법 정신에 반하고 민주주의에 도전하는 '진상 은폐보고'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 밖에도 전문가들은 부마항쟁 배경에 대한 서술의 심각한 부실, '부마사태'와 '부마사태의 진압·수사'의 사회 역사적 결과에 대한 전면적 누락, 보고서 결론의 심각한 부실성 등을 지적했다.
진상규명위원회는 지난해 보고서(안)를 채택을 연기했다가 조건부로 채택하고, 유치준 씨 사망 원인 등 부실 조사 논란이 된 부분을 새롭게 조사하기로 했다.
진상규명위원회 관계자는 "위원회 실무회의는 한 달에 한 번 개최하고 있다"며 "유 씨 사망 사건 재조사 결과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pitbull@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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