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문일답] 손봉숙 동티모르 독립투표 유엔 선관위원

입력 2019-08-12 07:00  

[일문일답] 손봉숙 동티모르 독립투표 유엔 선관위원
한국 최초 여성 중앙선관위원…"17년 만에 동티모르 방문"

(자카르타=연합뉴스) 성혜미 특파원 = "동티모르 독립 전 과정을 지켜본 것은 한 편의 휴먼드라마를 본 것과 같았습니다"
손봉숙(75) 한국여성정치연구소 이사장은 12일 연합뉴스와 전화 인터뷰에서 감정에 북받친 목소리로 이같이 말했다.



손 이사장은 이달 30일 동티모르 수도 딜리에서 열리는 독립투표 20주년 기념식에 한국을 대표해 참석한다.
그는 이화여대와 미국 프린스턴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한 뒤 평생 여성과 정치 분야 시민사회단체에서 활동했다. 새천년민주당 비례대표 1번으로 17대 국회의원도 지냈다.
손 이사장은 동티모르의 독립투표 유엔 선거관리위원(1999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 유엔 선관위원장(2001년), 독립축하 대한민국 특사단(2002년)으로 동티모르와 끈끈한 인연을 쌓았다.
다음은 손 이사장과 일문일답.




-- 동티모르는 언제, 어떤 목적으로 방문했나
▲ 총 세 차례 다녀왔다. 1999년 7월13일부터 2개월간 유엔이 임명한 선관위원으로서 동티모르 독립투표를 감독했고, 2001년 5월16일부터 4개월간 동티모르 제헌 국회의원선거 선관위원장을 맡았다. 2002년 5월에는 동티모르민주공화국 선포식에 대한민국 특사단으로 2박 3일 방문했다.

-- 지난 17년 동안 왜 한 번도 가지 않았나
▲ 마음먹으면 갈 수 있었겠지만, 빈손으로 가기가 그랬다. 2002년 '동티모르의 탄생'이라는 책을 출판해 모은 3천 달러를 초대 대통령인 사나나 구스마오의 아내가 운영하는 여성운동 재단에 보냈다.

-- 어떤 계기로 동티모르 독립투표 선관위원이 됐나
▲ 1997년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중앙선거관리위원으로 임명됐다. 선관위원으로서 1999년 5월 28일 멕시코시티에서 열린 국제학술대회에 참가했다. 당시 "한국의 경우 민주 선거는 대통령 의지에 달려있다"고 발표했는데, 용감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를 본 유엔 선거국 고위관리가 며칠 뒤 "동티모르 유엔선관위원이 돼 달라"고 팩스를 보냈다. 아시아 사람이고, 여성이라는 점이 작용한 것 같다.

-- 동티모르는 매우 위험했다. 어떻게 단신으로 갔나
▲ 알아보니 여성 인권이 유린당하고 있었다. 현지 여성들은 포르투갈에 이어 인도네시아 식민지배를 받으며 강간당하는 사건이 너무 많았다. 여성운동을 하던 사람으로서 지나칠 수 없었다. 딸은 '너무 위험하다'고 반대했으나 남편(안청시 전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이 '한 나라의 독립과정을 지켜볼 기회는 흔치 않다'고 지지해줬다.

-- 동티모르 선관위원 임명을 외교부도 몰랐다고
▲ 외교부를 거치지 않고 유엔 선거국에서 바로 연락받고 결정한 사안이다. 내가 영문이름 중 '숙'이라는 글자를 'Scuk'로 독특하게 쓴다. 유엔의 임명발표 후 외교부에서 처음에는 "그런 사람 없다"고 했다더라. 혼자 가방 싸서 서울∼싱가포르∼발리∼딜리(동티모르 수도) 코스로 비행기를 갈아타고 갔다. 아는 게 너무 없어서 두려움도 있었다.

-- 독립투표 선관위원으로서 어떤 일을 했나.
▲ 유엔이 주민들에게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선거가 왜 필요한지 시민교육을 했다. 나는 매일 헬기를 타고 다니며 주민들의 유권자등록 등 선거 준비가 공정하게 되고 있는지 감독하고 애로를 들었다. 선관위원이라서 밖으로 표현은 못 했지만, 동티모르가 독립하는 것을 보고 싶다는 열망에 가득 찼었다.

-- 독립투표에 앞서 가장 감동적이었던 순간은.
▲ 독립을 찬성한다는 티를 내면 친 인도네시아 민병대가 가만두지 않았다. 그래서 주민들이 속마음을 티 내지 않았는데, 투표 직전 딜리 광장에 독립파의 대대적 집회가 있었다. 수천 명의 군중이 굴러다닐 수 있는 모든 차량의 지붕 위에 올라가 "비바 동티모르", "비바 사나나(구스마오)"를 외쳤다. 나뭇가지를 흔들며 춤과 노래를 부르는데 그 환희와 열정을 잊지 못한다.

-- 주민 98.6%가 투표해 78.5%가 독립을 찬성했다. 예상한 수치인가.
▲ 유엔 선관위원 세 명이 찬성률을 두고 내기를 했다. 한 명은 62%, 다른 한 명은 82.5%라 하고 내가 76%로 예상해 가장 근접했다. 셋 중에 가장 어린 내가 주로 현장을 돌아다녔기에 예상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투표소에는 새벽부터 엄청난 줄이 늘어섰다. 땡볕에 아이를 업은 여성한테 괜찮냐고 했더니 "(인니 식민지배) 24년도 기다렸는데 하루를 못 기다리겠느냐"고 말해 감동받았다.

-- 독립 가결 발표 후 동티모르를 탈출하게 된 연유는
▲ 친 인도네시아 민병대가 무력으로 선거 결과를 뒤집겠다고 공격했다. 나를 포함해 선관위원들이 탄 차에도 총을 쐈다. 시내 유엔본부로 간신히 돌아와 비스킷을 먹으며 버텼다. 인도네시아 정부가 자카르타에서 공동기자회견을 하자고 해 특별기를 타고 동티모르를 빠져나왔다. 전 세계 기자들 앞에서 독립 가결을 발표한 뒤 한국으로 돌아왔다.

-- 동티모르 제헌의원 선거관리위원장을 맡은 계기는
▲ 2001년 유엔 선거국에서 동티모르 제헌의원 선관위원으로 와달라고 연락이 왔다. 많이 망설였지만, 1999년 도망치듯 탈출했던 게 마음에 걸렸고 남편도 응원해 다시 가게 됐다. 유엔이 임명한 선관위원이 나와 인도인·호주인, 동티모르 남녀 1명씩 총 5명이었다. 나만 1999년 독립투표 경험이 있어 위원장을 맡았다. 초대 국회의원 88명의 당선증에 일일이 내 손으로 서명해 수여했다.

-- 독립축하 대한민국 특사단에 당초 빠졌던 이유는
▲ 동티모르민주공화국 선포식이 2002년 5월 20일 수도 딜리에서 열렸다. 신문을 보니 이홍구 총리와 박경서 인권대사가 간다고 기사가 났더라. 정부는 내가 동티모르에서 뭘 하고 왔는지 제대로 몰랐던 것 같다. 강원용 목사가 김대중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손봉숙이 가야 한다'고 말해 추가됐다. 평생에 그런 근사한 행사를 본 적이 없다. 올림픽, 월드컵도 비교가 안 된다.




-- 동티모르 독립 전 과정에 참여한 소감은
▲ 한 편의 휴먼드라마를 본 것과 같다. 독립에 대한 그들의 열망을 보며 많이 울고 웃었다. 동티모르는 남의 나라가 아니었다. 일제에 압박받고 독립운동하고 나라를 건설하는 그 모든 과정이 한국과 다르지 않았다. 그저 좀 빠르고 늦은 것 정도의 차이라고나 할까. 작고 힘없는 나라이지만 적어도 누가 수탈만 안 해도 먹고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 8월 30일 독립투표 20주년 행사에 참석하는 감회는
▲ 세월이 이렇게 빠르다. 독립된 나라에 사는 동티모르 사람들이 행복한지 궁금하다. 길 가는 사람을 붙잡고 "힘들더라도 독립된 나라에 사는 게 좋으냐"고 물어보고 싶다. 정말 정말 잘 살길 바라는 마음이다. 고생에 대한 보상을 받았으면 한다. 자연밖에 없는 나라인데 에코 관광이라도 했으면 한다.

-- 한국이 동티모르를 어떤 마음으로 도왔으면 하나
▲ 우리도 과거에 미국으로, 다른 선진국으로 가서 배워왔다. 동티모르 청년들이 한국에 와서 일하는 게 꿈이라고 하는데, (한국인들이) 악질 고용주가 되지 말고 인간적으로 대우해서 잘 먹고 살 수 있게 도와줬으면 한다. 한발 앞서간 독립국으로서 작은 나라를 도와줄 수 있으면 좋겠다.
noanoa@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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