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살얼음 평화' 찾은 칠레 한인들…"대지진 때보다 더 불안했죠"

입력 2019-11-19 07:49  

[르포] '살얼음 평화' 찾은 칠레 한인들…"대지진 때보다 더 불안했죠"
한인 의류상가 밀집한 파트로나토, 시위 여파에서 서서히 벗어나
"이번 일로 칠레 사회가 한 발 더 앞으로 나아가길" 기대도



(산티아고=연합뉴스) 고미혜 특파원 = 칠레 수도 산티아고의 파트로나토에 있는 의류 상점들은 18일(현지시간) 낮 모두 문을 열었다.
셔터를 반쯤 내린 곳도 있지만 대체로 문을 활짝 열어두었고, 커다란 가방을 들고 가게를 드나드는 손님도 간간이 있었다.
예전보다 활기는 덜했지만 칠레에서 한 달째 이어지는 시위 여파에서는 어느 정도 벗어난 듯한 모습이었다.
의류와 잡화, 부자재 도매점이 몰려있는 이곳은 산티아고에 거주하는 2천여 명 한인 중 상당수가 생업을 유지하는 곳이다.
수도 산티아고에서 지금도 매일 시위대가 모여 경찰과 대치하는 이탈리아 광장과는 불과 걸어서 15분 거리다.
의류점을 하는 왕재경 씨는 "처음 시위가 시작되고 방화, 약탈이 있을 때는 가게 문을 못 열었다. 이후엔 문을 열었다가도 시위가 심해지면 닫는 일을 반복했는데 문만 열었다뿐이지 손님이 전혀 안 왔다"고 했다.
그는 "지난주부터는 조금씩 장사를 하기 시작했다"며 "물론 시위 전과 비교하면 아직도 매출은 3분의 1 수준"이라고 씁쓸하게 말했다.
이탈리아 광장과 가깝긴 하지만 시위대가 주로 행진하는 방향과는 반대라 시위대가 이곳까지 넘어온 적은 없다.

그러나 시위대가 언제 넘어올지 모른다는 불안함이 있는 데다 밤이 되면 혼란을 틈탄 방화와 약탈 시도도 이어져 한인들도 항상 긴장 상태였다. 젊은 한인들이 일종의 자경단을 조직해 밤에 상가를 지키기도 했다.
역시 의류점을 하는 김미영 씨는 "비상사태 때는 2∼3시에 일찌감치 문을 닫았는데 아예 손님이 없었다"며 "비상사태가 끝난 후에도 열흘 동안은 사람이 없다가 지난주부터 사람이 좀 다니기 시작했다"고 했다.
김씨는 "이번 일이 터지기 전부터 경기가 너무 안 좋았는데 일이 터지고 나서 10월 말∼11월 초 여름 옷이 막 들어올 시기의 장사를 놓쳤다"고 안타까워했다.
칠레에 오래 터를 잡고 살아온 한인들에겐 중남미에서 가장 안정적인 곳으로 꼽히는 칠레에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이 매우 놀라웠다고 했다.
43년째 살면서 한국 식품점을 운영하는 서순옥 씨는 "2010년 대지진도 겪었지만 그때보다 지금이 더 불안했다"며 "칠레에 있는 내 모든 삶과 가족, 사업이 한꺼번에 무너져 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1988년 넘어온 이민 1.5세인 왕재경 씨는 "처음 왔을 때가 피노체트 집권 말기였는데 그때도 주변에선 칠레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국가가 되는 것이 아니냐는 막연한 불안감이 있었던 것 같다"며 "그때 이후로 불안을 느낀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왕씨는 "같은 중남미에 살면서도 에콰도르나 볼리비아 등 다른 나라들의 혼란 얘기를 들을 때는 남 얘기로만 생각했다"며 "칠레에선 이런 일이 있을지는 상상도 못했다"고 덧붙였다.

지난 15일 칠레 정치권이 새 헌법 제정과 관련한 국민투표를 하기로 합의하면서 시위도 일단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언제 다시 깨질지 모르는 살얼음 같은 평화다.
왕씨는 "새 헌법 제정은 상징적 의미가 큰 성과지만 시민들이 요구하는 구체적인 문제들이 해결되기까진 시간이 더 걸릴 것"이라며 "지금도 언제 또 상황이 변할지 모르는 상태"라고 말했다.
그러나 칠레를 제2의 조국 삼아 살아가는 이들은 이번 일로 칠레가 한 걸음 더 나아가리라는 기대도 품었다.
대학생 자녀가 연일 시위에 나간다는 왕씨는 "칠레에 극빈층은 줄었을지 몰라도 중산층에 들어가지 못하는 차상위계층은 늘면서 빈부격차가 큰 상태"라며 "언젠가는 겪어야 할 일이었는데 이번 시위로 사회 개혁이 몇 년은 앞당겨질 수 있다"고 기대했다.
서순옥 씨도 "이번 일로 손해를 봤지만 그건 모두 다 마찬가지였다"며 "다 회복되리라 믿는다. 내가 봐온 칠레는 이 일을 해결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낙관했다.
김미영 씨는 "시위 사태를 겪으며 칠레가 아무래도 좀 나아질 것"이라면서도 "다만 공공시설 기물 파손이 세금 부담으로 이어지고 일자리를 잃은 이들도 많아 경제적 타격은 불가피할 것 같다"고 우려하기도 했다.

mihye@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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