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中격리생활기] ③ 신종코로나 속 '미드 체르노빌'의 재발견

입력 2020-02-04 22:15   수정 2020-02-04 23:32

[특파원 中격리생활기] ③ 신종코로나 속 '미드 체르노빌'의 재발견
진실 감추는 국가 고발한 드라마…분노 삭이며 '정주행'하는 중국인들
신종 코로나 남긴 깊은 상흔, 중국 현대사에 어떤 변곡점 될까


(상하이=연합뉴스) 차대운 특파원 = 지금은 4일 밤입니다. 이곳 '우한(武漢) 체류 이력자' 집중 관찰 시설에 들어온 지 엿새째 되는 날입니다.
계속 같은 공간에서 머무르다 보니 스마트폰 속의 달력을 열어보지 않으면 오늘이 며칠째인지 기억이 희미해져 갑니다.
영화나 소설 속에서 무인도나 감옥 같은 데 고립된 주인공이 어떤 마음으로 하루가 지날 때마다 벽에다가 하나씩 선을 더 긋는지 조금은 알 수도 있을 듯합니다.
사실 밖으로 나가지 못하지만 이곳에서의 일상은 여느 때와 크게는 다르지 않습니다.
중국 매체들이 쏟아내는 뉴스들을 종일 모니터링해가면서 필요한 정보들을 걸러 내고, 전화를 돌려 가면서 취재원들로부터 새로운 소식들을 모읍니다.
그렇게 하루 너덧개의 기사를 아등바등 써내 본사로 보내놓고 나면 어느덧 해는 저물어 있습니다.
좀처럼 잠이 오지 않는 밤. 평소 못 보던 드라마나 보자고 마음먹습니다. 미국 영화전문 유선방송 HBO의 '체르노빌'을 첫 편부터 보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이 드라마를 고른 이유는 요즘 중국 인터넷에서 '체르노빌'을 봤다는 사람들이 하도 많아서입니다.
내리 다섯 편을 모두 봤습니다. 그야말로 정주행한 거죠.
그러고 나니 왜 많은 중국인이 '체르노빌'에 열광하는지 그 마음을 조금은 알듯했습니다.
3일 송고된 "신종코로나에 성난 중국 민심…'미드 체르노빌' 보며 체제 비판" 기사는 이렇게 해서 쓰게 된 겁니다.

드라마 '체르노빌'은 원전 폭발 사건 초기 상황을 은폐·축소하고 주민들을 대피시키기는커녕 일대를 봉쇄해 수많은 주민을 위기로 몰아넣은 무책임한 간부들, 원자로의 근본적인 설계 결함을 은폐한 국가, 진상을 추적하고 폭로하는 과학자들, 목숨을 걸고 추가 폭발을 막기 위해 나선 여러 사람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확산 사태 속에서 많은 중국인이 드라마 속 옛 소련 간부들의 모습에 자기 나라 간부들의 모습을 투영하는 듯합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드라마에서 체르노빌 원자로 노심이 폭발한 대재난이 발생한 직후 발전소 간부들은 모여 회의를 엽니다.

그러고는 사고가 잘 수습되고 있다는 허황된 결론을 내리고, 부정적인 소문이 퍼지는 것을 막는다면서 체르노빌 발전소 인근 지역을 봉쇄해 버립니다.
많은 중국 누리꾼들은 이런 모습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확산 초기 우한에서 있었던 일과 소름 끼치게 닮았다고 지적합니다.
급기야 많은 이들이 전에는 찾아보기 어려웠던 노골적인 체제 비판도 서슴지 않습니다.
'Lr***'라는 아이디를 쓰는 누리꾼은 시나닷컴 웨이보(微博·중국판 트위터)에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이 한마디만 하려고 한다. 1986년 체르노빌 사고가 났고 소련은 1991년 해체됐다."
체르노빌 사건으로 터진 소련 국민들의 분노가 여러 다른 요인들과 결합해 체제 붕괴로까지 이어졌던 점을 상기시키는 대담한 언행을 한 것입니다.
저는 이 내용을 보자마자 바로 캡처해 스마트폰에 저장해 놓습니다. 중국에서 '민감한' 인터넷 표현은 언제 검열로 사라질지 모릅니다. 필요한 정보를 볼 때마다 바로 저장해 놓는 것이 기자들의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많은 중국인, 특히 수천만명의 후베이성 주민들이 국가로부터 받은 상흔 역시 주목해볼 만합니다.
후베이성의 성도(省都) 우한의 인구는 1천100만명. 지난 23일 봉쇄 조처가 내려지기 전 500만명이 떠났지만 여전히 수백만 명의 시민들이 남아 있습니다.
이들은 '사람 간 감염은 없다', '질병 확산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있다'는 정부의 말을 믿다가 갑자기 내려진 봉쇄령에 '유령 도시'에 갇혔습니다.
나라 전체로 질병 확산 방지하기 위해 의료, 생활 지원 등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후베이성 사람들에게 희생을 요구한 것과 다름없습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확산이 가장 심각한 우한에는 수천 명의 외부 의료진이 투입됐지만 여전히 병원의 수용 능력은 부족하기만 합니다.
환자들이 병원을 떠돌다가 입원조차 하지 못하고 거리에서 쓰러져가고 있다는 고발이 잇따릅니다.
우한 지역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사망률은 5.15%. 다른 지역 평균인 1.18%보다 4배나 높습니다. 단순한 통계 수치 이면에서는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해, 살릴 수 있는데도 목숨을 잃은 환자와 그 가족들의 들리지 않는 절규가 울리고 있습니다.
심지어 이 통계 수치조차도 의심받습니다. 병원 문턱을 밟지도 못한 환자들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확진 환자나 사망자로 분류되지도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 당국은 쉽게 믿기 어려운 기간인 10일 만에 1천병상 규모의 훠선산(火神山) 병원을 우한에 급조하기도 한 겁니다.
우한을 비롯한 후베이성 여러 지역에서 정든 고향을 뒤로하고 중국의 다른 지역으로 간 후베이성 사람들도 큰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중국 각 지역에서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를 퍼뜨릴 수 있다면서 '우한인', '후베이인'을 기피하는 분위기가 역력합니다. 많은 후베이성 사람들이 신분증에 적힌 고향의 이름 때문에 호텔에서 쫓겨나고 심지어 린치에 가까운 공격을 당하기도 합니다.
여러 지방 정부들은 '잠재적인 감염자'로 여기는 후베이성 사람들을 격리 시설로 보내기 위해 1인당 수십만원씩의 현상금을 내걸기도 했습니다.
단 이틀 우한 땅을 밟았기에 여기 와 있는 저처럼 후베이성에서 왔다는 이유로 현재 중국 전역의 '자율 관찰 시설'에 격리 수용 중인 후베이성 사람은 수만명, 어쩌면 그 이상에 달할 수도 있습니다.
국민들이 국가에 느끼는 실망감은 사실 남의 일만은 아닙니다.
지난 정부 때 벌어진 세월호 사건은 '진정한 국가의 역할이 무엇인가'라는 무거운 질문을 우리에게 남겼습니다. 더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몰래 먼저 서울을 빠져나가고 남은 시민들이 피난 갈 수 있는 유일한 한강 다리를 폭격해 끊어 놓은 지도자도 있었습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는 아직도 커져만 가고 있습니다.
이 사태는 많은 중국인에게 2003년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사태 이상의 상처를 남길 것으로 보입니다.
원래 보통의 중국 사람들은 정치보다는 '밥'에 관심이 많습니다. 하지만 집권 중국공산당과 정부의 난맥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신종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를 겪으며 중국인들은 묻고 있습니다 .'국가는 왜 존재하는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말입니다.
이런 심상치 않은 기류는 마오쩌둥(毛澤東·1893∼1976)시대 이후 가장 강력한 권력을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는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에게 심각한 도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우려를 인식한 듯 시 주석은 3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 사태가 중국 국가 통치 체계에 큰 시험대가 될 것이라며 위중함을 강조했습니다.
중국 정부도 하루가 멀다 하고 전례 없이 강력한 조치들은 내놓고 있습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확산 사태는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이 사건이 앞으로 현대 중국사의 궤적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는 눈여겨 지켜볼 일입니다.
cha@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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