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청의 한반도 평화 전령사 소임 마치고 돌아가는 이백만 대사

입력 2020-11-15 09:00  

교황청의 한반도 평화 전령사 소임 마치고 돌아가는 이백만 대사
교황 지지 확보하려 동분서주…북한 방문 관련 긍정적 답변 얻기도
형식 탈피한 전방위적 평화외교…교황청과 탄탄한 신뢰 구축 일조




(로마=연합뉴스) 전성훈 특파원 = "한반도에 해빙 바람이 부는 상황에서 나름의 소임을 다하려 최선을 다했으나 돌아보면 아쉬움도 큽니다"
오는 16일(현지시간) 임기를 마치고 한국행 비행기에 오르는 이백만(64) 주교황청 대사가 지난 3년의 재임 기간을 회고하며 밝힌 소회다.
돌아보면 가슴 벅찬 순간도, 탄식이 나올 정도로 안타까운 순간도 있다고 했다.
언론인 출신으로 노무현 정부에서 청와대 홍보수석을 지낸 이 대사는 문재인 대통령 취임 후 8개월이 지난 2018년 1월 바티칸에 부임했다.
정계에서 물러난 뒤 가톨릭 사목 활동에만 전념하겠다며 '광야'로 나간 자신을 문 대통령이 주교황청 대사라는 공직으로 다시 부른 이유는 단 하나라고 스스로 생각했다.
세계 가톨릭의 총본산인 바티칸에 한반도 평화 정착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고 프란치스코 교황과 교황청의 지지를 끌어내는 것이었다.



교황을 처음 알현한 신임장 제정식 때 전례 없이 북한 방문을 화두로 꺼내고 교황으로부터 "북한이 초청하면 못 갈 이유가 무엇이냐"는 답변을 받은 것은 그 시작이었다.
마침 그가 부임한 직후 개최된 평창동계올림픽을 계기로 판문점 1차 남북정상회담과 사상 최초의 북미 정상회담이 숨 가쁘게 이어지며 한반도에 해빙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이 대사는 특유의 친화력으로 정책 결정권을 쥔 교황청 고위 인사부터 실무자까지 부지런히 만나며 한반도 평화의 중요성을 설명했다.
그의 전방위적인 평화 외교는 문재인 대통령이 교황청을 공식 방문한 2018년 10월 그 빛을 발했다.
그달 17일 성베드로대성당에서는 문 대통령 내외와 한국 사제·수녀 등 25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교황청 직제상 서열 2위인 피에트로 파롤린 추기경 집례로 '한반도 평화를 위한 미사'가 성대하게 진행됐다.



교황청이 특정 국가 정상을 초청해 해당 국가 현안과 관련한 대규모 미사를 개최한 것은 유례가 드문 일이었다. 당시 미사에 참석한 다른 외교 사절들도 놀라움을 표시했다는 후문이다.
교황은 다음 날인 18일 문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방북 요청 의사를 전달받고서 "공식적으로 초청하면 갈 수 있다"며 사실상 이를 수락했다. 한국은 물론 전 세계가 주목한 한마디였다.
이듬해 2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2차 북미정상회담이 기대했던 성과를 내지 못하면서 모든 게 원점으로 돌아갔지만, 교황청과 한반도 사이에 다리를 놓으려는 이 대사의 노력은 이후로도 쉼 없이 계속됐다.
이 대사는 "돌아보면 2차 북미정상회담이 어긋난 게 참 아쉽다"며 "교황청에서는 당시 김정은 위원장의 초청장만 받으면 곧바로 교황의 방북을 위한 실무회담에 들어갈 정도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들었다. 북미회담이 잘 끝났다면 한반도 역사는 또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현지 많은 사람은 그를 '비상한 시기'에 '비상한 방법'으로 일한 대사로 기억한다. 형식과 절차, 의전, 매뉴얼 등의 외교적 문법에서 탈피해 오직 한반도 평화라는 지향점을 두고 매진했기에 기대에 부응하는 성과를 낼 수 있었다는 평이다.
이 대사는 프란치스코 교황 재위 기간 대사로 일한 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광이불요(光而不耀)라는 고사성어로 교황의 성품을 표현했다. '밝게 빛나지만, 눈이 부시게 하지는 않는다'라는 뜻으로, 지도자의 최고 덕목으로 겸손을 강조한 것이다.
화려한 관저를 마다한 채 외부인 숙소로 쓰이는 '산타 마르타의 집'에 소박한 방 하나를 마련해 기거하고 전 세계 소외계층을 먼저 보듬는 등의 행보가 이와 맞닿아 있다고 이 대사는 강조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역대 그 어느 교황보다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애정이 깊다고 한다.
전임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이미 짜놓은 해외 순방 일정 속에 2014년 8월 휴가를 마다하고 한국을 방문한 것이나 교황청을 예방한 문 대통령과 충분한 시간을 두고 진솔한 얘기를 나누고 싶다며 관행을 깨고 점심시간을 통째로 할애해 1시간 가까이 만난 것 등은 잘 알려지지 않은 일화다.
평창동계올림픽과 남북-북미 정상회담, 제주 4·3 사건 70주년, 5·18 민주화운동 40주년, 밀양 화재 참사 등 계기가 있을 때마다 따뜻한 메시지를 한국민에 보내오기도 했다.
작년 4월 교황이 이례적으로 직접 '4·27 판문점 선언' 2주년 영상 메시지를 만들어 보낸 것도 하나의 좋은 예다.
이 대사는 "글 메시지와 영상은 또 다르다. 영상은 제작 과정이 복잡하고 시간이 오래 걸려 아주 특별한 경우 아니면 하기가 쉽지 않다"면서 "한반도 평화에 대한 염원, 그리고 한국·한국민에 대한 사랑이 그만큼 크다는 것을 방증한다"고 짚었다.



그는 교황의 이러한 애정을 한국민에게 잘 전달하려는 노력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한국을 위한 교황의 친필 메시지를 받아 전한 것도 이 대사가 처음이다.
지금 그 어느 때보다 탄탄하게 구축된 양국 간 신뢰 관계 역시 이 대사의 활발한 물밑 외교와 한국에 대한 교황의 각별한 애정, 두 요소가 조화롭게 어우러지지 않았다면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평가도 있다.
이 대사는 국가 차원의 외교 활동 외에 바티칸과 이탈리아에 체류하는 사제·수도사·수녀를 포함한 교민 지원에도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첩첩산중의 외진 수도·수녀원이라도 한국인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찾아가 대화를 나누고 필요한 물품을 지원했다.
올 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이탈리아 전역에 고강도 봉쇄가 발효돼 모든 사람의 발이 묶였을 땐 한식 도시락 170여 개를 준비해 손수 배달하고 고충을 듣기도 했다.
바티칸 성베드로광장 인근 현지 노숙인들도 그가 챙기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을 위해 도시락 봉사를 하는 한인 수녀·수도사들을 물심양면 지원하고 직접 광장에 나가 배식 활동을 했다.



현지 한 사제는 "교황님과 대한민국 간 가교 역할은 물론이고 노숙인 밥차에 재로마 수도자·성직자 돌봄까지 정말 '역대급 대사'셨다"면서 "영사 업무가 없는 주교황청 대사관의 주 업무가 무엇인지 몸소 실천하신 분"이라고 말했다.
이 대사에게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는 일들도 있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1차 남북정상회담 직후인 2018년 5월 바티칸에서 개최될 예정이던 남북 합동 태권도 시범 공연이 무산된 것이다.
교황청 주도로 추진된 이 행사는 남북한 간 화해·협력 분위기를 재확인하는 이벤트로 큰 관심을 모았다. 교황이 직접 참관하기로 돼 있던 터라 의미는 더욱 컸다.
하지만 행사는 예정된 날을 닷새 가량 앞두고 전격적으로 취소됐다. 1차 북미정상회담을 앞두고 양국 간 치열한 '밀고 당기기'가 전개된 영향 탓으로 짐작할 뿐 정확한 이유는 알지 못한다.



행사 당일 저녁 남북 태권도 시범단을 관저로 초청해 300인분가량의 대규모 '불고기 파티'를 한다는 계획도 세웠으나 물거품이 됐다.
이 대사는 "교황 앞에서 남북이 하나 된 모습을 보일 수 있는 너무 의미가 큰 행사여서 모두 흥분과 기대 속에 행사를 준비했던 기억이 난다"며 "행사가 무산된 뒤 공황 장애가 올 정도로 충격이 컸다"고 회고했다.
김대건 신부(1821∼1846)에 이어 한국인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신부(1821∼1861)에 대한 시복(諡福)이 좌절된 것 역시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이 대사는 한국에서 한동안 휴식기를 가진 뒤 다시 가톨릭 사목 활동에 전념할 계획이라고 했다.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는 셈이다.
그는 "분에 넘치는 직분과 역할을 맡았으나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큰 과오 없이 무사히 임기를 마칠 수 있었다"면서 "이제 야인으로 돌아가 감사하는 마음으로 다시 주님과 함께 기도하는 삶을 살 것"이라고 말했다.
lucho@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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