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정부기관 총동원한 '나토+나치 vs 러시아' 정치 선동

(서울=연합뉴스) 전명훈 기자 = 우크라이나 최전방에서 러시아군이 1년째 헛발질 중이지만,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자국 내 입지는 강력히 다져지고 있다고 뉴욕타임스(NYT)가 19일(현지시간) 보도했다.
NYT는 이날 "전쟁 1년째, 갈망하던 대로 러시아를 주무르는 푸틴"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푸틴 대통령은 전쟁 1년간, 주변에서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선을 훌쩍 넘어 자기가 상상하던 대로 러시아를 개조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러시아 정부와 사실상 정부 소유인 국영 방송이 전방위·고강도 전치 선동을 벌인 결과로 해석된다.
크렘린궁은 작년 2월 24일 침공 때부터 전쟁 정당화를 위한 서사를 개발했다. 나치를 지원하는 서방 국가들이 러시아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는 주장이다.
이미 2014년 나치가 우크라이나 정권을 거머쥐었으며, 푸틴 대통령의 '특수 군사작전'은 서방의 폭력으로부터 이 전쟁을 멈추는 것이 유일한 목적이라는 내용이었다.
방송국은 물론이고 정부 기관들이 이런 정치 선동을 대거 퍼 날랐다. 이를 위해 국영방송은 예능 방송을 줄이고 뉴스와 정치 대담 쇼를 대폭 늘린 상태다.
푸틴 대통령 본인도 주어진 기회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전쟁 지지세 결집을 위한 국내용 연설에서 푸틴 대통령은 자신이 마치 러시아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성전'(聖戰)을 치르고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서방이 진보적 젠더 개념이나 동성애를 받아들이도록 러시아에 강요하고 있어 여기에 맞서고 있다는 것이다.
러시아의 독립 여론조사기관 레바다 센터의 데니스 볼코프 국장은 "이런 프레임 덕에 러시아인들은 전쟁을 훨씬 수월하게 받아들인다"며 "'서방은 우리와 적대적이다, 여긴 우리 군, 저긴 적군이다' 이런 프레임에서는 당연히 한 쪽 편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이런 생각은 러시아 시민들의 삶 곳곳에 스며들었다고 NYT는 전했다.
최근 러시아에서는 어린이들이 빈 깡통에다 양초를 만들어 최전방 군인에게 보내는 캠페인이 인기를 얻고 있다. 이런 일을 왜 해야 하는지 질문이라도 했다간, 단체 채팅방에서 '나치, 서방의 하수인' 등으로 비난받기 일쑤라고 한다.

러시아 학교들은 정기적으로 국기 게양 행사를 열고 있다. 애국 교육 과정도 필수과목으로 가르치고 있다.
박물관 전시도 정치 선동의 도구로 활용된다.
구소련군의 2차대전 승리를 기념하는 '전승 박물관'에서 가장 최근에 문을 연 전시 제목은 이른바 '나토지즘'(NATOzism)이다. 2차대전 때의 나치, 나치즘(Nazism)이 소련의 적이었던 것처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를 국가의 위협으로 규정하려는 시도다.
같은 박물관의 다른 전시는 "매일의 나치즘"이라는 제목이다. 이 전시관에는 전쟁 초기 마리우폴에서 러시아군에 맞서 필사의 항전을 벌인 '아조우 연대'의 물품이 전시됐다.
아조우 연대는 몇 년 전까지 극단적 백인우월주의·신나치주의 성향으로 비판받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러시아는 일부 아조우 연대의 사례를 확대해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인을 상대로 '제노사이드'(집단학살)를 벌이고 있다는 근거로 활용하고 있다.
전승 박물관에는 전투모를 쓴 초등학생 무리가 견학을 오기도 한다. NYT는 당시 인솔자가 어린이들을 병사들로 부르며 "왼발! 왼발! 하나, 둘, 셋!" 하며 행진 구령을 외쳤다고 전했다.
전쟁이 예상보다 길어지자 그동안 그나마 정권에 반대 목소리를 내던 인사들의 설 자리는 오히려 더욱 좁아졌다.
전쟁과 관련해 자유로운 발언을 막는 법안이 전쟁 중에 다수 제정됐다. 경찰은 이런 법을 근거로 전쟁에 반대하는 페이스북 게시글 하나하나까지 철저한 단속을 벌이고 있다. 그 결과 상당수는 감옥에 가거나, 아예 러시아를 떠났다.
이런 상황을 반기는 것은 전쟁 옹호론자들이다.
극단적 보수주의 성향의 러시아 기업인 콘스탄틴 말로페예프는 이날 NYT 통화에서 "러시아의 진보 진영은 완전히 사망했다. 얼마나 다행인지"라며 "전쟁이 길어질수록 러시아 사회가 진보진영이나 서방의 독극물로부터 정화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상황에 대해 시베리아에서 사립학교를 이끄는 세르게이 체르니쇼프 교장은 NYT에 "전체적으로 사회가 경로를 벗어났다. 선악의 개념이 뒤집혔다"고 한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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