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 숨은영웅] 60년 뒤 봉인해제된 8240 부대원이었다…"김일성도 자다 벌떡"

입력 2023-07-19 06:25  

[한국전 숨은영웅] 60년 뒤 봉인해제된 8240 부대원이었다…"김일성도 자다 벌떡"
北 출신, 평양 탈환한 유엔군 따라 입대…강화도서 첩보 수집·포로 구출 작전
2014년 받은 美국방 감사장 복사해 서류철에 간직…美 이민 후 의학 활동 전념



(록빌[미 메릴랜드주]=연합뉴스) 김동현 특파원 = 한국전쟁 당시 미군은 북한에서 피난 온 주민들로 구성된 비정규군을 운영해 적진을 교란했다.
미군 공식 문건에 북한 유격대(North Korean Partisan)로 지칭된 이들은 국군이 아닌 미8군 제8240 부대 소속으로 한때 2만명이 넘었다.
이들은 북한과 가까운 동·서해안 섬을 기지로 삼아 적진에 침투해 첩보 수집, 보급로 타격, 포로 구출 등 특수작전을 수행했다.
기자가 지난달 16일(현지시간) 미국 메릴랜드주 자택에서 만난 김인수(91)씨도 그 중 한명이다. 1951∼1954년 강화도에서 제8240 부대원으로 복무했다.
김씨는 "한국에서는 잘 모를 텐데 우리 특수부대가 아니었으면 서해 5도는 벌써 이북에 넘어갔을 것"이라며 "사령부인 강화에만 4천명 이상이 있었는데 거기서 살아나온 사람이 많지 않다"고 말했다.
평양에서 자란 김씨는 기독교인으로, 전쟁이 발발하자 공산당의 종교 탄압을 피해 몸을 숨겼고 1950년 10월 평양을 탈환한 유엔군에 합류했다.
그는 "유엔군에서 영어 하는 사람이 필요했는데 저는 의학을 공부했고 조부님이 영어를 해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고 말했다.
유엔군을 위한 통역과 정보 수집을 하던 그는 유엔군의 후퇴로 남쪽으로 피난했다가 1951년 8240부대에 입대했다.





8240부대는 켈로(KLO·Korean Liaison Office)부대로도 한국에서 알려지기도 했지만, 그는 자신이 KLO가 아닌 TLO(Tactical Liaison Office) 소속으로 전술 정보 수집이 주 임무였다고 설명했다.
적군의 이동 경로와 무장, 지형 등에 대한 정보를 모았고, 의학을 공부한 덕분에 야전병원에서 환자를 보는 일을 많이 했다.
그는 "난 죽이는 게 싫어서 사람을 직접 쏘고 그런 것은 없다. 그러나 내가 제공한 정보 때문에 많은 사람이 포로로 있던 적진에서 나올 수 있었다"고 말했다.
비정규군으로의 삶은 쉽지 않았다.
그는 "우리는 처음에 제대로 된 무기를 받지 못해서 인민군 부대를 습격해 무기와 군수물자를 노획해서 싸웠다. 그토록 정신적으로 무장된 사람들이라 김일성이 8240이라고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났다고 한다"고 말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작전으로는 강화도를 마주한 북한 개풍 상륙을 떠올렸다. 중공군에 포위된 미군 부대가 탈출할 수 있도록 개성까지 진격해 적의 시선을 돌리는 게 목표였다고 한다. 일종의 미끼였던 셈이다.
김씨는 "강화 일대 어선을 총동원해서 무장도 제대로 못 한 대원들을 백명씩 태우고 대낮인 아침 10시에 공격을 명령했다. 집중 사격이 들어왔는데 (적군) 참호에 가보니 부상병을 철사로 묶어놓고 총을 쏘게 만들어놨다. 그 총에 맞아 죽은 부대원이 얼마인지 셀 수 없다"고 회상했다.
그는 자신이 살아남은 게 "축복 같다"면서 "살아서 증언하라는 소명이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살려고 산 게 아니고 싸우다 보니까 어떻게 살았다"고 말했다.





정전협정이 체결된 뒤 8240 부대원들은 한국군으로 배속됐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북한 출신으로 미군에서 활동한 그들에 대한 정보가 없었고, 미군은 8240부대의 활동을 수십년간 비밀에 부쳐 부대원들은 어디에서도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다가 정전 후 약 60년이 지나서야 양국에서 이들의 공로를 인정하기 시작했다.
김씨는 2014년 8월 5일 척 헤이글 당시 국방부 장관 명의로 받은 감사장을 복사해 서류철에 간직하고 있었다.
김씨는 "8240 부대원들이 여태까지 받을 수 있는 대우를 못 받고 살았다. 돈 한 푼 못 받고 희생 제물로 바쳐졌다"고 말했다. 미국 시민권자인 그는 뒤늦게나마 8240부대 복무를 인정받아 치료비 지원 등 참전용사 대우를 받고 있지만 많은 이들이 이미 숨졌다며 안타까움을 표현했다.
한국군 의무부대에서 복무 기간을 채우고 제대한 그는 1965년 미국으로 이민, 사실상 빈손으로 제2의 삶을 시작했다.
그는 "한의사인 조부님의 영향을 받아서 현대의학을 좋아했고, 당시 박정희가 대통령이 됐는데 나는 강압적인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라 미국으로 갔다"며 "뉴욕까지 오니까 15불이 남았는데 아파트 월세가 9불, 커피 한잔이 25전(센트) 할 때였다"고 회상했다.
그는 결핵환자 요양원에서 피 검사하는 일을 하다가 보스턴의 병원 연구실에 취업했고, 이후 워싱턴DC에서 동·서양의 의학을 접목한 병원을 45년 운영했다고 한다.
두 번의 뇌졸중과 한 번의 심근경색, 폐암과 전립선암을 겪었지만, 다리가 불편한 것을 제외하면 건장한 모습으로 아직도 의학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다.
그는 "사람은 세상에 태어나서 좋은 일을 하다 가야지 죽이는 것만 연구하다 가면 안 된다"며 "내가 얼마나 더 살지 모르지만, 사는 날까지는 사람을 괴롭히는 질병을 어떻게 고칠 수 있는지를 연구하겠다"고 말했다.



bluekey@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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