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토대지진 100년] ①억울하게 학살된 조선인들…'모르쇠' 日정부

입력 2023-08-31 05:05   수정 2023-08-31 16:18

[간토대지진 100년] ①억울하게 학살된 조선인들…'모르쇠' 日정부
진상규명 외면…수천명 희생에도 혐한단체는 추도비 앞 방해 집회 예고

[※ 편집자 주 = 올해는 간토(關東·관동)대지진이 발생한 지 100년이 되는 해다. 이에 따라 일본에서는 당시를 되돌아보면서 재해 대응 차원에서 교훈을 찾으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하지만 당시 혼란 속에 '우물에 독을 탔다', '방화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억울하게 학살당한 수많은 조선인의 불행은 여전히 진상 규명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다.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문제에 대한 일본 사회의 분위기를 3회에 걸쳐 짚어봤다.]

(도쿄=연합뉴스) 경수현 특파원 =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일본 수도권인 간토(關東) 지방에서 규모 7.9의 지진이 발생했다. 이로 인한 사망자와 행방불명자는 무려 10만5천명으로 2011년 동일본대지진(1만8천명)의 5.8배에 달했다.
일본 정부 통계를 보면 경제적인 피해 규모도 당시 국민총생산(GDP)의 약 37%로 2011년 동일본대지진(3%)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파괴되거나 전소된 주택만 29만채에 달했다. 일본 현대사에서 가장 큰 피해를 초래한 재해인 간토 대지진이다.


간토대지진은 일본의 방재 정책에서도 일대 전환점이 된 재해로 자리매김해있다. 지진 다음 해인 1924년에는 건축물법 시행규칙의 구조물 강도 규정이 개정됐고 이에 맞춰 지진력 관련 규정이 세계 처음으로 제정됐다. 도쿄제국대학에는 지진연구소가 설립돼 일본이 지진학으로 큰 발전을 이루는 발판을 제공했다.
일본 정부는 간토대지진이 발생한 9월 1일을 '방재의 날'로 정해놨다. 매년 방재의 날 전후 1주일은 방재주간으로 중앙정부를 비롯해 곳곳에서 방재훈련과 행사 등을 치른다. 특히 올해는 간토 대지진 100주년을 맞아 신문들에 특집기사가 실리고 다양한 전시회가 마련되는 등 어느 때보다 많은 조명을 받고 있다.
간토대지진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 있다. 당시 수많은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불을 질렀다'는 식의 유언비어가 퍼지면서 일본인 자경단이나 경찰, 군인 등에게 학살당했던 일이다. 정확한 희생자 수는 확인되지 않았다.
당시 일본 내무성 경보국은 조선인 희생자수를 231명, 조선총독부는 832명으로 각각 발표했다. 하지만 사건을 은폐하려는 엄혹한 일본 내 분위기에서도 유학생을 중심으로 이뤄진 '재일본 간토지방 이재동포 위문반'을 활용해 조사한 '독립신문'은 조선인 희생자를 6천661명으로 보도했다.
이 문제에 대한 연구로 유명한 재일사학자인 고(故) 강덕상 초대 재일한인역사자료관 관장도 조선인 추정 거주자 수와 살아남아 수용소에 모인 사람 수를 근거로 "수천 명 수준인 것은 확실하며 6천여명이라는 추산에 합리성이 없지 않아 보인다"고 말한 바 있다.
이처럼 대체로 조선인 수천 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비극적인 사건의 전개에는 일본 정부의 책임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일본 정부 차원의 진상 규명이나 사과는 여전히 이뤄지지 않고 있다.
실제 지난 6월 야당인 사회민주당 대표 후쿠시마 미즈호 참의원은 일본 국회에서 간토 대지진 당시 내무성 경보국장이 각 지방에 보낸 전보 등 서류를 제시하면서 당시 일본 정부가 유언비어를 내보냈으면서 책임을 느끼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문제의 전보는 당시 일본 경찰 중앙 조직이 조선인들의 방화로 힘든 상황이어서 계엄령을 내린 만큼 각지에서 엄중하게 단속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후쿠시마 의원은 "이게 학살의 엄청난 계기가 됐다고 생각한다"고 일본 정부의 책임을 따져 물었다. 그러나 답변에 나선 경찰청 간부 등 일본 정부 관계자들은 "사실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이 없다"고 답했다.
앞서 한 달 전 입헌민주당 소속 스기오 히데야 참의원 역시 국회에서 간토 대지진 100주년인 올해가 조선인 학살 사건을 제대로 다룰 마지막 기회라며 진상규명과 반성을 외면해온 일본 정부의 태도 변화를 요구했지만, 마찬가지로 일본 정부는 '모르쇠' 태도로 일관했다.


다만 보수 성향의 요미우리신문도 특집 기사에서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유언비어가 퍼지면서 각지의 자경단이 일본도와 도끼로 무장하고 조선인을 닥치는 대로 죽였다"고 서술하는 등 민간 차원에서는 불행한 역사를 직시하는 기류가 없지는 않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일 뿐이다.
하지만 일본 사회에 역사 수정주의가 확산한 가운데 일본 정부에서는 좀처럼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일본 정부 대변인인 마쓰노 히로카즈 관방장관은 이달 30일 기자회견에서 간토 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에 대한 정부 입장을 질문받고 "파악할 수 있는 기록이 발견되지 않았다"며 반성이나 교훈과 같은 단어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오히려 뒤로 가는 움직임마저 있다. 대표적으로 고이케 유리코 도쿄도 지사는 올해도 간토대지진 조선인 희생자 추도식에 추도문을 보내지 않겠다는 뜻을 이미 밝혔다. 과거 '원조 극우'라는 별명을 얻은 이시하라 신타로를 포함한 역대 도쿄 지사들은 도내 요코아미초(橫網町) 공원에서 열려온 추도식에 매년 추도문을 보냈다. 이 공원에는 1973년 간토대지진 조선인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비가 세워졌고 그 뒤 매년 추모식이 거행됐다. 하지만 고이케 지사는 취임 첫해인 2016년에만 추도문을 낸 뒤 2017년부터는 추도문 전달을 거부해왔다.
과거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는 등 우익 사관을 추종하는 성향을 보여온 고이케 지사는 올해 2월 도의회에서 "무엇이 명백한 사실이었는지는 역사가가 연구해 밝혀야 할 일"이라며 당시 일본 치안당국과 자경단의 조선인 학살 사실을 인정하기를 사실상 거부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사실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문제를 둘러싼 고이케 지사의 행태는 최근 일본 사회의 분위기나 일본 정부의 태도를 보면 그다지 놀랍지도 않다. 일본변호사연합회는 학살의 참상을 목격한 고(故) 문무선 씨의 요청을 받고 각종 공문서와 재판기록 등을 조사해 2003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당시 총리에게 "국가는 책임을 지고 피해자와 유족에게 사죄하고, 학살 전모와 진상을 조사해 원인을 분명히 해야 한다"고 권고서를 보냈지만 20년간 답변을 듣지 못했다.
최근 한일 정부 간 관계 개선에도 혐한 단체의 활동 등 우려를 낳는 일본 일각의 분위기도 여전하다. 조선인 학살 사건 자체를 부정하면서 추모비 철거를 주장해온 일본의 혐한 단체 '소요카제'는 올해 추도식 날에는 아예 추도비 앞에서 집회를 열겠다고 예고한 상황이다.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여러 편 찍어온 재일동포 오충공 감독은 "고인들을 모욕하는 행동"이라고 안타까운 마음을 표현했다.
evan@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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