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토대지진 100년…조선인 학살 문제는 외면한 일본 정부

입력 2023-09-01 17:31   수정 2023-09-01 18:08

간토대지진 100년…조선인 학살 문제는 외면한 일본 정부
日정부 관계자들, 학살에 침묵…추모행사에도 일제히 불참

(도쿄=연합뉴스) 경수현 특파원 = 간토(關東·관동)대지진 100주년인 1일 일본 정부 각료들이 오전 7시 30분을 전후로 하나둘 총리 관저로 모여들었다.
'방재의 날'로 정해진 이날 일본 정부가 규모 7.3의 지진이 발생한 상황을 가정해 중앙 정부 차원의 모의 훈련을 실시한 데 따른 것이다.
일본 지자체나 학교 등 곳곳에서도 모의 훈련이 펼쳐진 가운데 각료들은 중앙 정부 부처의 수장으로서 모범을 보이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내각을 이끄는 기시다 후미오 총리를 비롯해 각 부처 수장들은 긴급재해대책본부를 설치하고 회의실에 모여 시나리오상 큰 피해를 본 가나가와현과 화상 회의도 했다.


기시다 총리는 모의 기자회견에서 "안전한 장소에 피난하는 등 목숨을 지키기 위한 행동을 취해주기 바랍니다"라고 말하는 등 실제를 방불케 하는 진지한 모습으로 임했다.
그러나 이날 일본 정부 각료들이 100년 전 간토대지진 때 벌어진 조선인 학살 사건을 언급했다는 얘기는 들려오지 않았다.
간토대지진은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일본 수도권인 간토 지방에서 발생한 규모 7.9의 지진이다. 사망자와 행방불명자만 무려 10만5천명에 달해 일본 현대사에서 가장 큰 피해를 초래한 자연재해다.
그런 만큼 일본은 이날을 '방재의 날'로 정해놨으며 매년 방재의 날 전후 1주일간인 방재주간에는 중앙정부를 비롯해 곳곳에서 방재훈련과 행사 등을 치르고 있다.
하지만 당시 수많은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불을 질렀다'는 식의 소문이 퍼지며 일본인 자경단이나 경찰, 군인 등에게 학살당하는 일종의 제노사이드(집단 학살)가 벌어진 일 역시 빼놓을 수 없는 당시의 비극이다.
일본 정부의 중앙방재회의에서 2009년 펴낸 보고서에도 전체 사망·행방불명자의 1%에서 수%가 학살 희생자인 것으로 추정한 바 있다. 1천여명에서 수천 명의 억울한 죽음이 있었다는 추산이다.
당시 비극의 전개에는 계엄령을 선포한 일본 정부의 책임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실제 당시 내무성 경보국이 각 지방에 보낸 전보 내용에는 조선인들의 방화로 힘든 상황인 만큼 엄중하게 단속하라는 내용이 있다.
방재 훈련을 마친 뒤 이날 오전 기자회견을 한 일본 정부 대변인 마쓰노 히로카즈 관방장관이나 하야시 요시마사 외무상은 조선인 학살 문제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마쓰노 장관은 간토대지진 100년을 맞아 과거의 교훈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지자체와 긴밀히 협력하는 훈련 등을 통해 대규모 재해 발생에 대비하고 있다"며 "간토대지진의 기억을 잊지 않고 재해대책에 만전을 기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는 오후 정례 기자회견에서는 이틀 전 자신의 발언에 한국 정부가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데 대한 입장을 질문받고서도 "하나하나 코멘트하는 것은 삼가겠다"며 "어쨌든 한일은 중요한 이웃이며 앞으로도 한일 관계를 더욱 발전시켜 나가고 싶다"고만 말했다.
그는 지난달 30일 기자회견 때 간토대지진 당시 자행된 조선인 학살에 대해 "정부 조사에 한정한다면 사실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기록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반성이나 교훈 같은 단어를 전혀 언급하지 않은 바 있다.
이에 대해 외교부 임수석 대변인은 다음날인 31일 정례 브리핑에서 "우리 정부는 그간 다양한 계기에 일본에 대해 과거를 직시할 것을 촉구한 바 있다"며 한국 정부 차원에서 필요한 조치를 지속해서 검토할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한마디로 간토대지진 100주년인 이날 일본 정부가 조선인 학살 문제에 대해 보여준 모습은 그동안의 '모르쇠' 자세 그대로였다.
일본 정부는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에 대해 줄곧 "사실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이 없다"면서 발뺌해왔고 진상 규명 의지를 보여주지 않았다.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이하 민단) 도쿄본부가 주일 한국대사관과 재외동포청 후원을 받아 예년에 열던 추념식보다 훨씬 큰 규모로 이날 도쿄 지요다구 국제포럼에서 개최한 '제100주년 관동대진재 한국인 순난자 추념식'에는 과거와는 달리 한일 정치인들이 대거 참석했지만, 일본 정부를 공식 대표한 인사는 역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추념식에는 한국 측에서 한일의원연맹 회장인 국민의힘 정진석 의원과 간사장인 더불어민주당 윤호중 의원, 간사인 국민의힘 배현진 의원이 참석했다.
일본 측에서는 하토야마 유키오 전 총리, 야마구치 나쓰오 공명당 대표, 후쿠시마 미즈호 사회민주당 대표, 오사카 세이지 입헌민주당 대표대행, 누카가 후쿠시로 전 일한의원연맹 회장, 다케다 료타 일한의원연맹 간사장 등이 행사장을 찾았다.
대표적인 친한파인 하토야마 전 총리는 "나쁜 일을 한 것에 대해서는 정부가 정직하게 책임을 다해야 하고, 도쿄도와 가나가와현 등도 책임을 져야 한다"며 "그것을 할 수 없다는 것이 유감스럽다"고 말했다.
그러나 도쿄 시내 요코아미초 공원에서 50년간 해마다 열려온 '간토대지진 조선인 희생자 추도식'에 고이케 유리코 도쿄도지사는 올해도 끝내 추도문을 보내지 않았다.
양심적인 일본인들과 재일교포 등으로 구성된 추도식 실행위원회는 1973년 이 공원에 추도비를 세우고 매년 추도식을 열어왔다.
이 추도식에는 과거 '원조 극우'라는 별명을 가진 이시하라 신타로를 포함한 역대 도쿄도 지사들이 추도문을 보내왔지만, 고이케 지사는 취임 첫해인 2016년에만 추도문을 낸 뒤 2017년부터는 추도문 전달을 거부해왔다.
과거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는 등 우익 사관을 추종하는 성향을 보여온 고이케 지사는 올해 2월 도의회에서 "무엇이 명백한 사실이었는지는 역사가가 연구해 밝혀야 할 일"이라며 당시 일본 치안당국과 자경단의 조선인 학살 사실을 인정하기를 사실상 거부하는 모습을 보인 바 있다.
이는 뜻이 있는 일본 시민 사회나 언론과도 다른 모습이다. 예컨대 진보 또는 중도성향의 아사히·마이니치·도쿄신문은 이날 간토대지진 100주년 특집 기사를 다루면서 조선인 학살 문제도 함께 조명했다. 똑같은 과오를 저질러서는 안 된다는 반성의 의지를 반영한 것이다.


마이니치는 일본 역사 최악의 재난을 교훈으로 삼자는 사설을 다루면서 당시 자행된 조선인 학살 사건은 "결코 잊지 말아야 할 부(負)의 역사"라며 유언비어의 위험은 현재도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도쿄신문은 이날 요코아미초 공원 추모비 앞에서 혐한 단체 '소요카제'가 집회를 열기로 했지만 도쿄도가 제대로 대응하지 않고 있다는 내용의 비판적인 기사를 다루면서 "도지사의 자세가 직원들에게 전달되면서 새로운 차별을 부추기고 있다"는 한 재일교포의 반응을 전했다.
evan@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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