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2년 키이우에서] 방공호에서도 수업은 이어진다…"친구들과 있으면 편안해요"

입력 2024-02-22 09:30  

[전쟁2년 키이우에서] 방공호에서도 수업은 이어진다…"친구들과 있으면 편안해요"
사립학교 키스쿨 방문…공습 사이렌 울리자 방공호서 70분, 천진난만 점심시간
러 침공으로 개전 초기 문닫다 몇개월만에 다시 가동…여전한 폭격 흔적
어두운 계단 내려가니 오렌지 빛깔 환한 방공호 나타나…"학부모들도 학교를 더 안전하게 생각"


(키이우=연합뉴스) 김동호 특파원 = "아이들이 곧 방공호로 내려갈 거예요."
21일(현지시간) 키이우 서쪽 외곽 아파트 단지 사이에 위치한 '키 스쿨'(Key School)에 도착하자마자 학교 관계자가 이렇게 설명해왔다.
안내를 받아 학교 건물 안으로 걸어 들어가려는 찰나인 이날 낮 12시 12분 공습경보 사이렌이 울린 것이다.
미처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한 기자가 휴대전화를 확인하자 경보를 알리는 키이우 군 당국의 메시지가 들어와 있었다.
1층 교장실 문을 열면 복도 건너편에서 곧장 건물 지하실로 이어졌다.
어두운 계단을 몇발짝 걸어 내려가자 환하고 따뜻한 오렌지 빛깔의 조명이 가득 채워진 방공호가 눈에 들어왔다. 지하실 방공호라고 하면 으레 연상되는 어두운 공간이 아니었다.

고등학생들이 저마다 책을 펴고 앉은 넓은 홀을 지나 중학생들이 앉아 몰래 휴대전화를 꺼내보고 있는 공간 등이 차례로 이어졌다.
기자를 발견한 저학년생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영어로 "이름이 뭐예요?", "몇 살이에요?" 등의 질문을 쏟아 냈다.
학교 관계자는 불이 꺼진 침실 문을 열더니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이번에는 2층 침대에 누워 낮잠을 청하던 유치원생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날아왔다.
교장 나탈리야 오피마흐는 "공습 사이렌이 울려도 지하 방공호에서 수업 시간이 계속 이어진다"며 "이제 학부모들이 집보다 학교를 더 안전하게 생각해주고 있다"고 말했다.

개교한 지 올해로 29년째 되는 사립학교 키 스쿨에는 전쟁 발발 만 2년이 된 현재 두살배기 유치원생부터 17세 고등학생까지 모두 학생 240명이 다니고 있다. 총정원 300명에 60명이 비어 있다.
2022년 2월 24일 러시아군이 전면 침공해오면서 우크라이나의 다른 학교들처럼 이곳도 한동안 문을 닫아야 했다.
전쟁이 터지고 3주쯤 지난 그해 3월 12에는 교정 주변에 총 6차례의 포격이 발생했다. 당시 충격으로 학교의 모든 유리창이 깨졌고, 화장실과 시청각실 벽면 일부가 무너졌다. 운동장이 내려다보이던 아파트 한 쪽은 완전히 파괴됐다.

오피마흐 교장은 서둘러 다시 학교를 열어 피란으로 여기저기 흩어진 학생들을 불러 모으고 싶은 욕심이 컸지만, 교직원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먼저 두 차례에 걸쳐 방공호를 마련하고 공조 시스템과 응급 의료장비까지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정부가 조금이라도 지원해줬겠다면 좋았겠지만, 학교에 남아있던 돈과 일부 외부 지원을 합친 100만 흐리우냐(약 3천400만원)로 진행하는 게 최선이었다.
오피마흐 교장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낼 수만 있다면 키이우로 돌아오겠다는 학부모가 많았다"며 "우크라이나 안팎 피란처에서 겪는 교육 문제가 너무 크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우여곡절을 거쳐 전쟁이 터진 지 3개월여 만인 2022년 6월 1일 유치원부터 다시 가동됐다. 여름에는 초등학생을 위한 캠프 프로그램이 열렸고, 같은 해 9월 1일 마침내 전학년을 대상으로 개학할 수 있었다.
이날 공습경보가 내려진 지 약 20분 지났을 무렵 방공호 복도에 음식 냄새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척척 줄을 서자 영양사들이 일회용기에 밀밥과 고기, 국을 퍼서 배식했다.
저학년 아이들과 대화하던 기자의 관심을 끌고 싶었던 듯 한 남자 중학생이 개구진 목소리로 "알라후 아크바르"(신은 가장 위대하다)라고 소리쳤다. 고개를 돌려 한국말로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했더니 곁에 앉은 학생들이 웃으며 따라 했다.

리사(14)는 공습경보가 무섭지 않으냐는 질문에 "친구들과 함께 있으니 편안하다"며 "전쟁이 나고 처음 몇달 동안 너무 많은 것을 겪었지만, 지금은 전쟁 이전처럼 느껴진다"고 말했다.
올해 졸업을 앞뒀다는 한 남학생(17)은 "한국 만화를 좋아해 찾아 읽는다"며 옆에 앉은 친구에게 "그거 제목이 뭐였더라" 하고 한참을 얘기했다.
다른 남학생은 "대학에 진학해 소프트웨어공학을 전공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구글이나 마이크로소프트(MS)에 취직할 것이냐고 묻자 "그러면 좋겠다"며 웃어 보였다.

아이들은 밝은 표정으로 미래의 꿈을 이야기했지만, 각자 마음 한켠에는 전쟁과 관련한 복잡한 감정과 고민이 또아리를 틀고 있는 듯했다.
타냐(14)는 "우리가 계속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는 군인들에게 감사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며 "과거 분단을 겪은 한국에도 여러 문제가 있는 것으로 아는데, 모든 일이 잘 풀렸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어느덧 주변을 살펴보니 경보가 해제돼 전교생이 1층으로 올라간 뒤였다. 공습경보는 오후 1시 21분까지 약 70분 이어졌다.
기자는 오피마흐 교장과 점심식사를 함께 한 뒤 건물 밖으로 나섰다. 마지막으로 한 바퀴 둘러본 교정에는 몇군데 미처 손보지 못한 폭격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dk@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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