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시선] 베를린영화제의 정치학과 홍상수

입력 2024-02-28 07:09  

[특파원 시선] 베를린영화제의 정치학과 홍상수


(베를린=연합뉴스) 김계연 특파원 = 지난 24일 저녁(현지시간) 제74회 베를린영화제 시상식 무대에서 미국의 다큐멘터리 연출자 벤 러셀은 "대량 학살에 반대한다"고 발언했다. 팔레스타인 저항의 상징인 체크무늬 스카프 '케피예'를 어깨에 두른 채였다.
다큐멘터리 분야 최고상은 '다른 땅은 없다'(No Other Land)에 돌아갔다. 팔레스타인 활동가 바셀 아드라와 이스라엘 저널리스트 유발 아브라함의 만남과 연대를 기록한 작품이다.
아드라는 아브라함과 함께 시상대에 올라 "수많은 팔레스타인 시민이 이스라엘에 학살당하는 와중에 자축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에 무기 공급을 중단하라고 독일 정부에 촉구했다.
다큐멘터리 심사를 맡은 프랑스 영화감독 베레나 파라벨은 '즉시 휴전'이라고 적힌 종이를 등에 붙이고 나왔다. 상패를 주고 수상자들과 포옹하는 과정에서 이 메시지가 카메라에 잡혔다.
시상식 이튿날 저녁에는 영화제 인스타그램 계정이 해킹당했다. 팔레스타인 어린이들 사진과 함께 '가자지구에서 학살을 멈춰라', '강에서 바다까지' 등의 메시지가 올라왔다. '강에서 바다까지'는 요르단강 서안지구와 지중해 연안 가자지구로 나뉜 팔레스타인의 정치적 구호로 쓰이는 문구다. 요르단강과 지중해 사이는 이스라엘 영토다.

독일 정치권은 발칵 뒤집혔다. 클라우디아 로스 문화부 장관은 "베를린영화제가 증오와 선동, 반유대주의, 인종주의, 인류에 대한 모든 형태의 적대행위에서 자유로운 장소임을 어떻게 보장할 수 있는지 명확히 하겠다"며 시상식에서 나온 발언들을 조사하겠다고 말했다.
영화제 측은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메시지를 반유대주의로 규정하고 수사를 의뢰했다. 그러면서 "수상자들의 일방적 발언은 영화제의 입장과 무관하다"고 해명했다. 베를린영화제는 연방정부로부터 한해 1천260만유로(약 182억원)를 지원받는다.
세월호 다큐멘터리 '다이빙벨'을 둘러싼 10년 전 부산영화제 사태를 떠올리게 하는 이런 광경은 어느 정도 예견됐다.
나치의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를 원죄로 삼는 독일은 지난해 10월7일 하마스의 이스라엘 급습 이후 한때 팔레스타인 지지 집회를 원천 봉쇄했다.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은 팔레스타인 작가 아다니아 쉬블리에게 상을 주려다가 취소했다.
프랑스 작가 아니 에르노를 비롯한 각국 문화예술인들은 '독일 보이콧' 운동을 벌이고 있다. 이들은 "독일의 '기억문화'가 억압적 도그마(독단적 신념)로 작용해 대항해야 할 억압에 반대로 힘을 실어주고 있다. 독일처럼 이스라엘과의 무조건적 동맹을 존재 이유로, 공공·문화생활의 전제로 삼는 나라는 없다"고 주장한다. 반유대주의 차단과 표현의 자유 사이에서 줄타기하던 독일 사회의 갈등이 베를린영화제에서 폭발한 모양새다.

우크라이나와 가자지구에서 동시에 벌어지는 전쟁이 아니라도 베를린영화제는 원래부터 정치·사회적 색채가 뚜렷했다.
세계 3대 영화제라고 하는 이들도 있지만 화려함이나 대중성은 칸·베네치아 영화제에 한참 못 미친다. 스타들이 많이 찾지도 않을뿐더러 추워서 옷맵시를 뽐내기도 어렵다. 이 때문에 영화제 기간을 옮겨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베를린영화제는 화려함의 빈자리를 정치·사회적 성찰과 진지함으로 채워왔다.
올해는 우크라이나 작가를 경쟁 부문 심사위원으로 초청하고 팔레스타인·이스라엘 합작 다큐멘터리에 상을 줬다. 최우수 작품상인 황금곰상은 2년 연속 다큐멘터리가 가져갔다. 올해 황금곰상 수상작인 '다호메이'(Dahomey)는 프랑스의 다호메이 왕국(현재의 베냉) 식민 지배와 문화재 약탈·반환을 기록한 영화다. 프랑스와 독일은 아프리카 식민 지배 역사를 공유한다.
이런 정체성에 비춰보면 홍상수 감독을 향한 베를린영화제의 애정은 기이하게도 느껴진다. 홍 감독의 영화는 인간의 자기모순과 비루함을 꼬집지만, 사회에 대해서는 불가지론 또는 회의주의를 줄곧 지켜왔다.
홍 감독은 2022년 베를린영화제 기자회견에서 "우리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아는 게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더 많이 알기를 원하고 더 많이 아는 척할 뿐"이라고 말했다. 올해는 연출 의도를 묻는 기자들에게 "나도 내가 뭘 하는지 알 수 없다"는 대답을 내놨다.

칸영화제가 대중성을 겸비한 봉준호·박찬욱 감독에게 트로피를 안기는 동안 베를린영화제는 한국에서 관객 1만명도 동원하지 못하는 홍 감독을 꾸준히 찾았다. 그러나 단지 '영화제의 정치학'으로 치부할 일은 아니다.
올해 심사위원대상을 받은 홍 감독의 '여행자의 필요'에서 가장 뜨거운 반응을 얻은 장면은 인물들 대화 중 다소 뜬금없는 강아지 클로즈업이었다. 외국 관객들은 홍 감독의 작품을 코미디가 가미된 영화 매체에 대한 담론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각국 전문가 8명으로 구성된 영화매체 스크린데일리 심사위원단은 경쟁 부문 20편 중 '여행자의 필요'에 세 번째로 높은 평점을 줬다.
홍 감독은 시상 무대에 올라 카를로 샤트리안 예술감독을 찾았다. 그는 샤트리안이 집행위원장을 맡았던 2015년 로카르노영화제에서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로 최고상인 황금표범상을 받았다. 샤트리안은 2019년 베를린영화제로 자리를 옮긴 뒤 이듬해부터 5년 연속 홍 감독을 초청했다.
베를린영화제는 시상식의 반유대주의 발언 논란과 무관하게 이미 집행부 교체가 결정돼 있다. 런던영화제에서 일했던 미국 출신 트리샤 터틀이 내년부터 영화제를 이끈다. 개혁 요구에 부딪힌 베를린영화제가 어떻게 바뀔지, 홍 감독의 다음 작품은 어떻게 평가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dada@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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