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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서스 100년] ① 일제강점기부터 다문화시대까지…숫자에 담긴 근현대사

입력 2025-09-22 07:00   수정 2025-09-22 07:42

[센서스 100년] ① 일제강점기부터 다문화시대까지…숫자에 담긴 근현대사
1925년 일제 조선총독부 주도로 시작…1949년 우리 손으로 첫 조사
1970년대까지 산아제한 정책…이젠 저출생·고령화 고착화



[※ 편집자 주 = 대한민국 모든 인구, 가구, 주택의 규모 및 특성을 파악하는 '2025 인구주택총조사'가 10월 22일부터 11월 18일까지 진행됩니다. 인구총조사(센서스)는 주요 정책의 기초자료로 쓰이는 국가 제1의 통계조사로, 일제강점기인 1925년 '간이 국세조사'라는 명칭으로 시작돼 1960년 주택 부문을 아우르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췄고 2015년 등록센서스 방식으로 한단계 더 진화했습니다. 연합뉴스는 한 달 앞으로 다가온 인구주택총조사의 지난 100년 역사와 의미를 되짚어보는 기획기사 3편을 일괄 송고합니다.]

(세종=연합뉴스) 이대희 기자 = 한반도에서 인구총조사(센서스)가 시작된 지 올해로 꼭 100년이 됐다.
인구총조사 숫자 속에는 일제강점기, 해방, 한국전쟁, 산업화와 민주화 등 대한민국의 굴곡진 현대사가 고스란히 갈무리돼 있다.
저출생·고령화에 이어 다문화 시대로 향하는 지금, 센서스는 사회 변화를 비추는 거울이자 나아갈 방향을 알리는 나침반 역할을 하고 있다.

◇ 3·1운동으로 5년 미뤄진 조선총독부 첫 센서스
22일 통계청에 따르면 한반도에서 모든 인구를 빠짐없이 조사하는 근대적인 의미의 '센서스'는 1925년 처음 시행됐다.
하지만 이는 우리의 의지가 아닌 일본 제국주의 압제의 연장선상이었다. 우리 스스로 첫 단추를 끼지는 못했던 셈이다.
하지만 당시 센서스가 미뤄진 사정을 보면 우리가 호락호락하게 무단통치를 받아들이지는 않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애초 일제는 1920년 일본 본토와 식민지 전체를 대상으로 한 조사를 계획했다. 하지만 1919년 3·1운동이 한반도 전체로 번지며 조선총독부는 조사를 위한 행정력을 모으기가 어려워졌다.
결국 본토와 대만·사할린에서만 예정대로 했고 한반도에서는 5년 뒤에야 첫 조사를 할 수 있었다. 이후엔 5년(1944년만 예외)마다 조사가 진행됐다.
처음으로 집계된 한반도 인구는 1천952만3천명이었고 1930년엔 2천105만8천명으로 2천만명을 넘었다. 1944년에는 2천590만명으로, 14년 만에 인구가 32.7%나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숫자에는 식민 통치의 아픈 역사가 투영됐다.
1925∼1930년 전체 이민자 중 15∼34세의 비중은 62%로 높았다. 한반도 미성년자들이 북쪽의 탄광과 공장으로 동원됐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1945년 해방을 맞이한 뒤 1948년 8월 15일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고, 그 해에 총인구조사 시행령이 제정돼 이듬해인 1949년에서야 우리 손으로 한 첫 조사가 시행됐다.
이 때 대한민국 인구는 2천18만9천명으로 급감했다. 한반도가 38선을 경계로 남북으로 나뉘며 조사 대상이 남한으로 한정됐기 때문이다.
1955년 조사에서 인구는 2천152만6천명으로 소폭 증가하는 데 그쳤다. 일제강점기에 만주 등으로 이주했던 인구가 귀환했지만, 20∼30대 남성의 비중이 크게 낮아졌다. 1950∼1953년 민족의 비극인 한국전쟁이 할퀸 자국이다.



◇ 1960년대 현대화된 센서스…산업화에 산아제한 투영
한국의 센서스 조사 방식은 1960년에 비로소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췄다. 처음으로 주택 총조사를 함께했으며 신속한 자료수집과 결과 집계를 위해 '표본조사' 기법이 적용됐다.
센서스에 나타난 1960년대 이후 인구 변화의 특징은 산업화와 산아제한이다.
전쟁이 끝나며 인구가 불어나 1960년 2천498만9천명으로 2천500만명에 근접했다. 1970년에는 3천88만2천명으로 3천만명을 넘어섰다.
1970년부터는 '베이비붐' 세대(1955∼1974년생)가 생산연령인구(15∼64세)에 진입하기 시작하면서 한국 경제의 주축으로 자리 잡게 된다.
당시는 경제 개발을 통한 국민소득 증가가 국가적 목표였던 시대였다. 국민 1인당 소득 수치의 분모인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경제개발 목표 달성의 걸림돌로 여겨졌다.
결국 정부는 '하나만 낳아 잘 키워보자'는 가족계획사업을 본격화하며 인구를 줄이고자 했다. 지금의 저출생·고령화의 씨앗이었다.
합계출산율은 1960년 6.0명에서 1970년 4.53명, 1975년 3.43명으로 급격히 낮아졌다. 출생아 수 자체도 1971년을 정점으로 감소로 전환했다.
다산다사(多産多死)로 유지되던 '피라미드' 구조 인구 형태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삶의 질 개선과 의료기술의 발전으로 기대수명이 빠르게 늘며 피라미드 하부가 상대적으로 축소됐다.
결국 1980년대부터 한국의 인구구조는 저출생의 특징인 '종형' 구조로 나아가게 된다.
1985년 인구는 4천44만8천명으로 4천만명을 넘어섰지만, 1983년 합계출산율은 인구대체수준(현 수준 인구가 유지되는 수준)인 2.1명 이하로 떨어졌다.
특히 이 시기에는 '한 자녀 낳기 운동'에 남아선호 사상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성비가 어그러졌다. 1990년 성비는 116.5로, 여아 100명당 남아 116.5명이 태어났다는 의미다.
결국 정부는 1996년 산아제한 정책을 공식적으로 폐기했지만, 출생률 급락세를 되돌릴 수는 없었다.


◇ 2000년대 변화상…출산율 급추락에 외국인 인구 비중 늘어
한국은 2000년 65세 이상 노년층 비중이 7%를 넘는 '고령화사회'로 진입했다.
외환위기를 거치며 청년세대의 구직 문은 좁아졌다. 경제적인 어려움과 가치관 변화, 남녀 성비 불균형 등으로 만혼이나 비혼이 늘어나게 됐다. 합계출산율은 2005년 1.09명까지 떨어졌다.
한국의 인구는 2015년 5천106만9천명으로 5천만명을 넘어섰다.
2020년에는 고령인구가 14%를 넘어서는 '고령사회'가 됐다. 동시에 사망자 수가 출생아 수를 초과하는 인구 자연감소가 시작됐다. 인구구조는 '항아리형'으로 나아갔다.
영국 인구분야 석학인 데이비드 콜먼 옥스퍼드대 교수는 2006년 "한국이 1호 인구소멸 국가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같은 경고가 현실화하기 시작한 셈이다.
2020년 생산연령인구는 조사 역사상 처음으로 전 조사에 비해 감소(3천750만명→3천729만명)하며 경제 성장에 적신호가 켜지기도 했다.
생산연령인구의 감소로 외국인 근로자 유입이 촉진됐으며, 외국인 인구 증가로 이어졌다. 한국의 인구 구조가 단일민족에서 다문화로 변화하는 신호탄이었다.
1995년 전 인구의 0.12%인 5만5천명 수준이었던 외국인 인구는 불과 5년 만인 2000년 0.33%인 15만여명으로 늘었다. 2015년에는 136만여명으로 전체 인구의 2.67%까지 늘었다.
귀화자가 포함된 가구를 뜻하는 다문화 가구 수는 2022년 기준 40만가구에 육박하고 있다.
센서스가 숫자로 꾸준히 경고한 저출생·고령화에 따른 인구 감소, 다문화 전환이 한국 사회가 풀어야 할 가장 중대한 과제가 됐다.
2vs2@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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