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한국정부 주최 추도식에 희생자 유족들 참석…"어렵게 살았던 이야기에 마음 북받쳐"
(도쿄=연합뉴스) 경수현 특파원 = "사도(광산)에서 고생한 이야기를 할 때는 소송을 해달라며 한을 풀어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국 정부 주최로 21일 일본 니가타현 사도섬에서 열린 '사도광산 강제동원 한국인 희생자 추도식'에 참석한 박종길(83)씨는 이처럼 자신의 이야기를 전했다.
그의 아버지는 형제들과 함께 일본에 끌려가 1945년 해방쯤 허리를 다쳐 돌아왔다고 한다.
그래서 귀국 후에는 일도 할 수 없는 상태로 병원에 다녀야 했고, 모친이 보따리 장사를 하면서 어렵게 입에 풀칠하면서 생활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자신도 14살부터 도장 파는 일을 하는 등 생업에 나섰다. 아버지는 46세에 돌아가셨다.
그는 아버지 유언에 따라 소송도 추진했지만 무산됐다며 한일 국교 정상화를 위한 대일 청구권 협정이 잘못됐다고 원망의 말도 전했다.
다만 박 씨는 "일본의 옛날 잘못은 어쩔 수 없고 앞으로나 (양국이) 잘 지냈으면 좋겠다"라고도 했다.

유족 대표로 추도사를 맡은 이칠규(65)씨는 모친과 큰누이에게서 아버지가 이야기한 사도광산의 생활을 전해 들었다면서 "결혼하고 얼마 뒤 강제로 끌려간 아버지는 돌아오기는 했지만 폐가 안 좋아 힘들어하셨고 항상 약을 달고 사셨다"고 전했다.
이로 인해 이 씨 가족도 일을 할 수 없는 아버지 대신에 어머니가 품팔이하며 어렵게 살아야 했다고 한다.
그는 "아버지를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면서도 "아버지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리다"고 말했다.

추도식에서 눈물을 훔친 한 중년 여성은 "남편의 외가 할아버지가 사도광산에서 일했다"며 어렵게 살았던 이야기가 떠올라 마음이 북받쳐 올랐다고 말했다.
옛 사도광산 조선인 기숙사 터를 둘러본 윤상환(62)씨는 할아버지가 사도광산에서 돌아가셨다며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그는 "기숙사 터에 설명도 많지 않은데 한국 사람들이 많이 와 볼 수 있도록 모형이라도 만들어놨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사도광산은 에도시대(1603∼1867)에 금광으로 유명했던 곳으로, 태평양전쟁이 본격화한 후에는 전쟁 물자를 확보하는 광산으로 주로 이용됐다. 이때 식민지 조선인들이 강제 동원돼 혹독한 환경 속에서 차별받으며 일했다.
그러나 일본은 보상은커녕 당시 조선인들의 강제노동 자체를 부정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1940∼1945년 사도광산에서 노역한 조선인 수는 1천519명으로 알려져있다.
이날 추도식에 한국 정부 대표로 참석한 이혁 주일 한국대사는 추도사를 통해 "당시 노동자들이 느꼈을 부상에 대한 두려움, 외부와 단절된 삶에서 비롯된 고립감, 기약 없는 미래가 주는 막막함은 오랜 세월을 거치며 유가족의 마음에도 깊은 아픔과 슬픔으로 남았다"며 유가족에게 위로와 애도의 뜻을 전했다.

eva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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