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정치지도자·안보당국, 전쟁 가능성 주기적으로 거론
유럽 곳곳서 러 회색지대 전술 의심…유럽, 軍훈련 늘리고 국방비 대폭 증액

(서울=연합뉴스) 김용래 기자 = 유럽 정치지도자들과 안보 당국자들이 자국민들에게 러시아와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기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는 지난 13일 집권당 행사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우크라이나 전략을 1938년 히틀러가 체코슬로바키아의 독일어권 지역이던 주데텐란트를 점령한 것에 빗대 "우크라이나가 무너지면 1938년 주데텐란트로는 충분치 않았던 것처럼 푸틴도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마르크 뤼터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사무총장도 최근 "분쟁이 문 앞에 와 있다"면서 "우리 조부모와 증조부모들이 감내해야 했던 규모의 전쟁에 대비가 돼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러시아가 나토 국가들을 상대로 향후 5년 내로 군사력을 사용할 준비를 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파비앵 만동 프랑스군 합참의장도 지난달 18일 러시아와의 무력 충돌 가능성에 대비해야 한다면서 "우리가 자식들을 잃을 각오가 돼 있지 않으면, 또는 방위생산을 우선하기 위해 경제적 고통을 감수할 준비가 안 돼 있다면 우리나라는 흔들릴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유럽 주요 당국자들이 러시아와의 전쟁 가능성을 주기적으로 경고하는 것은 10여년 전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던 얘기다.
미국의 일간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이를 두고 15일(현지시간) 두 차례의 세계대전 끝에 경제와 안보를 재건한 유럽 대륙으로선 심대하고 중대한 심리적 변화라고 평가했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우크라이나 전쟁의 종전 협상을 서두르는 상황이 유럽 국가들의 불안감을 증폭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유럽 주요국들은 우크라이나가 트럼프 행정부의 종전협상안을 울며 겨자 먹기로 수용하게 되면 향후 푸틴의 입지가 더 강화되고,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재침공 가능성에 더 취약해질 수 있다는 우려를 하고 있다.
특히, 유럽 안보당국은 휴전이 이뤄지면 러시아가 군사적 능력과 자산을 유럽을 겨냥하는 데 집중할 수 있게 되고, 이는 유럽 동부에서 러시아의 침공 가능성이 더 커지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고립주의 노선을 보이는 것은 유럽의 불안감을 더 키우는 요소다. 트럼프 행정부는 최근 발표한 국가안보전략(NSS)에서 전 정부들과 달리 러시아를 직접적 위협으로 규정하지도 않았다.
이에 따라 유럽에선 러시아의 공격이 현실화할 경우 미국이 군사적 개입을 하지 않을 수 있다는 우려가 확산하는 기류다.
영국 해외정보기관 비밀정보국(MI6)의 신임 국장 블레이즈 메트러웰리는 이날 러시아의 안보 위협과 관련해 "그동안 내가 알았던 것보다 더 위험하다"면서 대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처럼 유럽 국가들에서 이렇게 앞다퉈 러시아와의 전쟁 가능성이 거론되는 것은 매우 중대한 변화다.
1·2차 세계대전으로 인류 역사상 최악의 희생을 치렀던 유럽에선 2차대전 종전 후 마셜플랜 등 미국의 강력한 지원으로 경제를 재건하고 나토와 유럽연합(EU)을 조직하면서 오랜 시간 평화와 번영을 누려왔다.
그러나 유럽 정치지도자들의 심각한 경각심과 대중들의 인식에는 아직 간극이 크다.
지난해 갤럽이 유럽 국가들에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전쟁 발발 시 국가를 위해 싸울 뜻이 있냐는 물음에 응답자의 3분의 1가량만이 그렇다고 답했다. 이 질문에 대한 긍정률이 41%인 미국과 대조적이다.
유럽 안보 당국자들은 러시아가 이미 유럽 국가 곳곳에 침투해 은밀히 '회색지대' 전술을 펼치고 있다고 본다.

전쟁과 평화가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회색지대에서 러시아가 이미 비군사적인 수단이나 심리전 수단을 동원해 경제와 인프라에 타격을 주고 혼란을 유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독일 정부는 지난 12일 러시아가 지난 2월 독일 연방의회 총선 당시 가짜뉴스를 뿌려 선거에 개입했다고 발표하고, 지난해 8월 독일 항공관제 당국을 겨냥한 사이버 공격도 러시아의 소행으로 규정했다.
유럽의 주요 공항들에선 정체불명의 드론이 출몰해 항공편 운항이 지연되고 공항이 폐쇄되는 일이 잇따르고 있고, 해저케이블 절단이나 철도 폭발 등도 수시로 일어나고 있다.
유럽 안보 당국들은 러시아의 이런 회색지대 전술을 향후 나토와의 군사적 분쟁 발생 시 동부전선으로의 병력 전개를 지연시키고 보급로를 교란하기 위한 목적으로 의심한다.
이와 관련해 메트러웰리 영국 MI6 국장은 사보타주, 사이버 공격, 정보 조작, 러시아 대리 세력이 주요 기반 시설에 날린 것으로 의심되는 드론 등 하이브리드전의 위험을 지적하면서 "전선은 모든 곳에 있다"고 지적했다.
유럽 주요국들은 러시아의 안보 위협이 점증하자 대비책을 강화하고 있다.
프랑스는 독일, 벨기에, 네덜란드에 이어 청년 자원입대 제도를 부활한다는 방침이다.
독일은 러시아와의 교전 가능성에 대비해 전선으로 병력을 신속 전개하는 훈련을 강화했고, 영국은 러시아의 위협에 집중하기 위해 유럽 이외 지역에서의 군사 훈련을 줄이고 있다.
유럽 국가들은 군비 지출도 적극적으로 늘리고 있다.
나토의 유럽 회원국들은 국방비 지출을 현 국내총생산(GDP) 2% 수준에서 2035년까지 3.5%로 늘리기로 합의했다. 또 러시아의 하이브리드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기반 시설 강화 등의 안보 조치에 1.5%를 추가로 지출하기로 했다.
특히 독일은 향후 10년간 군사·인프라 확충에 1조 달러 이상을 지출해 유럽 최대 규모의 재래식 군사력을 구축한다는 방침이다.
yongla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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