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침략 맞선 아프리카 독립의 상징…44년 장기 집권 뒤 쿠데타로 폐위돼
레게 스타 밥 말리 추종한 종교의 '살아있는 신'으로도 숭배받아

(서울=연합뉴스) 박성진 기자 = "한반도 평화와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서 이길 때까지 싸워라, 그렇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싸워라."
하일레 셀라시에(1892∼1975) 에티오피아 황제는 1951년 6·25전쟁 참전을 위해 출병하는 자국 부대에 이런 특명을 내렸다.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 대륙에서 6·25전쟁에 지상군을 파견한 유일한 국가다.
이탈리아 침공을 받아 나라를 잃은 경험이 있는 셀라시에 황제는 유엔이 군사 지원을 요청하자 내부의 반대에도 황실근위대 최정예병으로 구성된 부대를 파병했다.
셀라시에 황제는 에티오피아 말로 '혼돈에서 질서를 확립하다'와 '초전박살'의 두 가지 뜻을 가진 '강뉴'(Kagnew)를 파견 부대명으로 하사했다.
에티오피아 군인 6천37명은 1951∼1953년 화천, 철원, 김화 등 최전방 산악 격전지에서 253번의 전투를 벌여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다.
122명이 전사하고 536명이 다쳤지만, 포로를 구출하고 전사자 시신도 모두 수습해 불패의 부대로 명성을 떨쳤다.
피로 맺어진 인연으로 셀라시에 황제는 1968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아프리카 국가원수로서는 처음으로 국빈 방한했다.
셀라시에 황제는 방한 때 강원도 춘천의 에티오피아 참전 기념탑 준공식에 참석했다.
2016년 박근혜 당시 대통령은 에티오피아를 국빈 방문해 에티오피아 6·25 참전 용사들과 만나 한국을 도와준 데 대해 고마움을 표했다.

에티오피아의 마지막 황제 셀라시에는 아프리카 대륙의 최장 집권자 중 한 명이었다. 1930년 즉위해 군부 쿠데타로 폐위될 때까지 44년간 통치했다.
셀라시에 황제는 1935년 자국을 침공한 이탈리아와 맞서 싸운 아프리카 독립의 상징적 존재이다.
1936년 수도 아디스아바바가 이탈리아군에 함락되자 영국으로 망명해 망명 정부를 세우고 이탈리아와 투쟁했다. 이후 1941년 아디스아바바가 영국군과 에티오피아 망명군에 해방되면서 셀라시에는 귀국했다.
셀라시에 황제는 노예제 폐지 등 근대화를 위해 노력했으며 국제 교류에도 관심이 많았던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1963년 현 아프리카연합(AU)의 전신인 아프리카단결기구(OAU)를 창설했으며 초대 의장을 지냈다. 이런 이유로 AU 본부는 아디스아바바에 자리 잡고 있다.

반면 그는 재위 기간 기근으로 많은 국민이 굶어 죽는 상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오히려 사치스러운 생활을 일삼았을 뿐 아니라 농민 봉기와 지역 분리 움직임을 가혹하게 탄압하는 등 실정과 사생활로 비판받았다.
결국 옛소련의 지원을 받은 군부 쿠데타로 그는 1974년 실각했다.
셀라시에는 쿠데타 주역인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의 군인들에 의해 황궁에 감금돼 있다가 1년 뒤인 1975년 83세로 사망했다.
그는 살해당한 뒤 황궁 화장실 밑에 묻혀 있다가 멩기스투가 권좌에서 축출된 이듬해인 1992년 발견돼 아디스아바바의 트리니티성당에 안장됐다.
한편 셀라시에 황제는 1930년대 자메이카에서 시작된 정치·종교적 운동인 '라스타파리교'(Rastafarianism)의 살아있는 신으로 숭배받았다.
자메이카 레게 음악의 전설적 스타 밥 말리가 '셀라시에를 재림 예수로 받들며, 아프리카로 돌아가자'는 이 흑인 종교의 열렬한 추종자였다.
sungjinpar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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