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4∼9월 접수 민원, 러시아 인권위 실수로 공개
장교들이 뇌물 받은 후 증거 없애려 자살 돌격에 병사 투입 의혹

(서울=연합뉴스) 임화섭 기자 = "(병사들을) 1월에 발가벗긴 채 수갑을 채워 나무에 장시간 묶어뒀으며 일부는 다음날 아침까지 방치됐다"
"다리에 감각이 없는데도 전투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수저나 포크를 들 힘도 없는데 특별군사작전에 다시 투입된다고 한다"
"동료 병사들이 그를 또 구타했고, 돼지우리 자리에 있는 구덩이에 처박아뒀다"
러시아 인권위원회가 실수로 온라인에 공개했던 민원서류에서 드러난 군인들과 그 가족들의 민원 문서들에 담긴 인권침해, 병영 부조리, 비위 실태 중 일부다.
1일(현지시간) 이를 보도한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일부 러시아군 지휘관들은 전사 위험이 큰 작전 투입에서 제외되고 싶으면 뇌물을 바치라고 병사들에게 요구하고 있다.
또 경우에 따라서는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비위 사실을 아는 병사들을 고의로 자살 공격 작전에 투입하거나 이들을 사살하라고 명령하기도 한다.
도저히 정상적으로 군복무를 할 수 없는 심각한 환자들에 대한 가혹행위도 흔하다.
러시아군은 팔다리 골절, 암 4기, 뇌전증, 심각한 시력 및 청력 손상, 두부 외상, 조현병, 뇌졸중 후유증 등에 시달리는 환자들도 최전방으로 보냈다.
우크라이나군에 생포됐다가 가까스로 풀려난 러시아군 전쟁포로가 석방 직후 곧바로 최전방 전투에 다시 투입되기도 했다.
가혹행위와 비리는 일상이다.
한 러시아군 병사는 러시아군이 점령한 우크라이나 루한스크주 크레미나 근처에서 동료 병사와 자신이 수갑이 채워져 나무에 나흘간 묶여 있을 당시 모습을 소매에 숨겨뒀던 휴대전화기로 촬영해 가족에게 보냈다.
당시 이 두 병사는 음식이나 물을 제공받지 못하고 화장실도 갈 수 없는 상태로 계속 묶여 있었다.
이들은 우크라이나군이 사수중인 지역에 가서 러시아 국기를 들고 사진을 찍어 오라는 자살 공격 작전에 참가할 수 없다고 했다는 이유로 이런 벌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아들이 보낸 영상을 받아본 어머니는 러시아 인권위원회에 민원을 제기하면서 "이들은 짐승이 아니다"라고 항의했다.
이 병사는 러시아 보안당국에 연줄이 있는 친척 덕택에 가까스로 석방됐으며 변호사를 고용해 법적 다툼을 거쳐 부대 복귀를 미루고 있다면서 부대로 복귀하는 것은 "사형집행장에 스스로 서명하는 것과 똑같다"고 말했다.
그는 "팔이나 다리가 없고 휠체어를 탄 사람들이 전방으로 보내지고 있다"며 "내 눈으로 똑똑히 모두 봤다"고 주장했다.
그는 "어떤 지휘관들은 사람들을 나무에 묶어놓고 돈을 갈취하기도 한다"며 "그들은 자신들이 처벌받을 리가 없다고 확신한다. 병사들과 함께 공격 작전에 참여하지 않고, 그런 공격 작전은 (돌아올 일이 없는) 편도 여행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한 18세 병사는 "내가 만약에 하루 이틀 안에 연락이 안 되면 영상을 공개해주세요"라며 눈물을 흘리면서 찍은 본인의 영상을 전투 투입 직전인 작년 3월 7일에 엄마에게 보냈다.
그는 지휘관의 지시로 동료 병사들로부터 1만5천 달러(2천200만 원)의 금전을 거출해 뇌물로 전달했는데, 그 후 이 지휘관이 자신을 자살 공격 작전에 투입키로 결정했다고 전했다.
이 병사는 따로 엄마에게 보낸 문자메시지에서 지휘관들 2명이 뇌물 수수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그를 고의로 작전에 투입키로 했다고 말했다.
이 병사는 영상 발송 후 행방이 알려지지 않고 있으며 현재 공식적으로 실종자로 분류돼 있다.
이 병사의 엄마는 지휘관들을 상대로 살인 혐의 수사를 개시해달라고 당국에 요구했으나 아들의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수사 개시가 불가능하다는 답변을 들었다.
지휘관들이 이런 방식으로 입막음과 증거 인멸을 위해 자살 공격 작전에 특정병사를 고의로 투입하거나 동료 병사들에게 명령해서 죽여 버리는 경우가 매우 흔하며, 이를 가리키는 데에 '옵눌레니예', 즉 '0으로 맞추기'라는 표현이 쓰인다고 NYT는 전했다.
NYT에 따르면 이런 사례들은 러시아 인권위원회가 작년 4∼9월에 접수된 민원 문서들을 실수로 온라인 열람이 가능한 상태로 한동안 방치한 것을 계기로 외부에 알려졌다.
독일 베를린에서 발간되는 러시아어 온라인 뉴스 매체 '에코'의 창립자 겸 편집인인 막심 쿠르니코프와 그의 팀이 파일을 입수한 후 NYT에 넘겨줬다.
실수로 문서가 유출된 민원 중 1천500여건이 군 관련이었으며, NYT는 사실 확인을 위해 민원인 240여명을 접촉했다.
문의에 답하지 않거나 취재를 거부하는 경우가 많긴 했지만 접촉 대상 중 75명은 민원 접수 사실을 확인했으며 그 가운데 수십명은 취재 요청에 응했다.
일부는 영상, 사진, 녹음 파일, 문자메시지, 진단서, 법원 서류, 군 내부 서류 등 증빙자료도 제시했다.
민원인의 신원은 이메일 주소, 전화번호, 그리고 공개돼 있는 정보와 대조해 확인했다고 NYT는 설명했다.
limhwasop@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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