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창섭 <하나대투증권 사장 csrim@hanafn.com>
며칠 후면 음력설이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 설날은 기다림과 설렘으로 다가오는 일 년 중 가장 부자가 되는 날이었다. 설 한 달 전쯤부터 객지에 나가계셨던 아버지의 귀성을 손꼽아 기다렸던 기억, 새로 산 신발을 재봉틀 위에 곱게 모셔놓고 몇 번이고 몰래 신어보고 좋아했던 모습, 어머니와 통금(通禁)이 지난 시간까지 방앗간에 길게 늘어서서 기다리다 보면 요란한 기계음 뒤에 뽑혀 나오는 먹음직스러운 가래떡, 그리고 떡판에서 구름처럼 피어오르던 하얀 김….아버지는 1년에 설, 추석 때 한두 번 다니러 오셨다. 오랜 기다림 끝에 기차역에 내리신 아버지는 중절모에 대나무로 얼금얼금 엮은 사과 광주리를 손에 든 모습이었다. 생각해보면 그때 아버지보다 지금 내 나이가 훨씬 많지만 아버지로서의 의젓함은 비교할 수도 없다.
새 옷을 얻어 입는 기회는 정말 1년에 한두 번. 맘에 드는 옷을 사달라고 철없이 조르면 어머니는 옷 가게를 몇 바퀴 돌고 나서야 겨우 흥정을 마무리하셨다. 그리고 금세 큰다며 항상 한 치수 큰 옷을 골랐다. 여덟 자식 뒷바라지에 늘 지쳐있던 어머니에게 명절은 또 얼마나 큰 부담으로 다가왔을까.
설 전날 잠든 동생 눈썹 위에 밀가루를 발라놓고 하얗게 센 눈썹에 깜짝 놀란 표정을 놀려대던 누나들의 모습은 긴 세월이 흘러도 잊히지 않는다. 목욕탕 풍경도 눈에 선하다. 1년에 설, 추석이 아니면 좀처럼 가기 어려운 동네 목욕탕은 명절 때가 되면 콩나물시루처럼 발 디딜 틈도 없었다.
1년 내내 설빔 같은 옷에 잔칫날 같은 음식, 추운 겨울에도 언제든 더운물이 펑펑 쏟아지는 등 모든 것이 너무도 풍족한 지금보다 옛 시절이 더욱 그리워지는 건 염일방일(一放一·하나를 잡으려면 다른 하나를 놓아야만 한다) 까닭 때문인가.
지금은 고향을 떠난 많은 사람들이 명절을 서울에서 보내다 보니 귀성도 점점 줄어들고, 또 어떤 사람들은 설 연휴를 해외여행으로 보내는 경우도 많은 것 같다. 나로서는 아직 엄두를 내지 못할 일이지만, 언젠가 바뀔지도 모르겠다. 옛 어른 말씀에 팔촌까지는 한 부엌에서 난다고 했는데, 이젠 친형제도 이런저런 사정으로 함께 못 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명절이 되면 고향을 떠났던 그리운 이들이 한데 모여 쌓였던 정담을 나누며 못다 한 회포를 풀곤 했었는데 그런 시간이 점점 사라져간다. 사라져가는 시간만큼 더욱 허허로워지는 사람들. 가난했어도 온 식구가 함께 모여 살던 그 시절이 좋았다는 어머니 말씀은 가끔 손님으로 찾아오는 자식을 기다리는 긴 기다림과 외로움에서 나온 한숨이었음을 어리석게도 이제야 알 것 같다.
임창섭 <하나대투증권 사장 csrim@hanaf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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