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의 백호주의, 골드러시때 중국인과 일자리 경쟁이 '뿌리'

입력 2013-04-19 17:06   수정 2013-04-19 23:34

글로벌 이슈 따라잡기

아시아인에 잇단 폭언·폭행…이민자 출신 유명앵커도 봉변

1901년 연방정부때 아시아 차별정책 펼쳐
차별금지법 만들었지만 현재까지 기소 수 '0'
2000년대 피해 잇따라…유학·관광산업 위축



지난 13일 호주 시드니 도심에서 남부 마러브라 사이를 운행하는 397번 시내버스 안. 호주인 10대 소녀 5명이 아시아계 여성인 케이트(30)에게 “아시아의 원숭이, 집으로 돌아가라”는 욕설을 내뱉었다. 케이트가 “얌전하게 굴라”고 말하자 호주인 소녀 중 한 명이 케이트의 배를 발로 걷어찼다. 다른 승객들과 버스기사의 도움으로 가해자들은 버스에서 쫓겨났지만 케이트는 큰 충격을 받았다. 호주 일간 시드니모닝헤럴드는 17일 “호주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이민자들이 호주에서 느끼는 인종차별은 심각한 수준”이라며 “이런 현상들이 호주에 대한 우호적인 시각을 바꿀 수 있다”고 염려했다.

호주 특유의 인종차별주의를 뜻하는 ‘백호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이미 40년 전에 백호주의를 금지하는 법안이 도입됐지만, 아시아계 이민자나 유학생들을 향한 폭행 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하는 등 뿌리깊은 악습이 좀처럼 근절되지 않고 있다.


○아시아인 대상 폭행 범죄 기승

호주에서는 인종차별 범죄가 하루가 멀다하고 발생하고 있다. 케이트가 공격을 받기 불과 며칠 전에도 통근열차에 타던 흑인 청년이 인종차별을 겪었다. 멜버른의 통근열차에 오르는 27세의 남성 마흐무드 세리프 레자에게 37세의 백인 여성이 “내 나라에서 꺼져라”고 욕설을 한 것. 레자가 항의하자 여성은 가슴을 밀치며 막말을 퍼부었다.

심지어 호주 국영 ABC방송국의 유명 앵커인 말레이시아계 제레미 페르난데스도 지난 2월 버스를 타고 가다가 봉변을 당했다. 한 백인 꼬마가 페르난데스의 딸 머리를 만지려해 이를 제지하자, 그 아이의 어머니가 분개하며 그에게 인종차별적인 욕설을 퍼부었다. 버스 운전기사도 페르난데스에게 자리를 옮기라고 요구했다.

페르난데스는 방송과 트위터를 통해 “10대 때 호주에 온 후 여러 설움을 겪었지만 어린 딸 앞에서 15분 동안 인종차별적 설교를 들은 것은 충격”이라며 “호주에서 인종차별 범죄가 비일비재하게 벌어지지만 피해자들은 이를 알릴 기회가 없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호주 당국이 정확한 통계를 내놓지는 않고 있지만, 아시아계 이민자 수가 해마다 꾸준히 늘면서 인종차별 범죄도 갈수록 늘어나고 있을 것이라는 견해가 많다.

○뿌리깊은 ‘백호주의’가 주된 원인

호주에서 자주 발생하는 인종차별 범죄의 배후에는 백호주의로 불리는 ‘화이트 오스트레일리아 정책(White Australia Policy)’이 자리잡고 있다. 이는 1850년 골드러시로 저임금 중국인 노동자가 대량 유입돼 임금경쟁이 일어나자 백인 노동자들이 유색인종을 배척하기 위해 논의가 시작됐다. 1901년 연방정부가 수립된 이후 법제화되면서 본격적으로 백인 외의 인종 특히 중국인, 일본인, 한국인 등 아시아 인종을 배격하는 도구로 활용됐다.

예컨대 백호주의가 시행되는 동안 호주로 이민을 가려는 희망자들은 어학 시험 등을 치러야 했다. 서양인들은 사실상 시험에서 제외됐고 동양인만이 영어 시험을 통과해야 했다. 심지어 영어를 아는 동양인들에겐 그리스어 시험이 주어졌을 정도로 아시아인들을 향한 노골적인 차별 정책이 시행됐다.

백호주의로 피해를 입은 건 호주도 마찬가지였다. 아시아계 이민에 대한 진입장벽이 높아지면서 국토면적에 비해 인구가 적은 호주는 노동력 부족 등의 문제를 겪었다. 1973년에 들어서면서 백호주의 정책은 기능을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호주 정부는 거꾸로 인종차별을 금지하는 내용의 법안을 도입해 인종차별을 불법으로 규정하기에 이른다. 호주에서는 누구나 ‘인종차별금지법’(1975) 또는 ‘인종혐오금지법’(1995)에 따라 인권위에 관련 사항을 제소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지난해 8월에는 ‘나부터 인종차별을 하지 말자’는 국가 차원의 인종차별주의 반대 캠페인을 벌어기도 했다.

외견상 인종차별의 제도적 장치가 마련돼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사정이 다르다. 시드니모닝헤럴드에 따르면 호주의 최대 주(州)인 뉴사우스웨일스에서는 1989년 인종적 동기에 의한 욕설이나 비방, 폭행 등을 처벌하는 인종차별금지법이 제정됐으나 지금까지 기소된 경우는 단 한 건도 없었다. “1998년 이후 총 27건의 인종차별금지법 위반 사례가 인종차별금지위원회에 접수됐으나 기소까지 이어진 적은 없었다”고 시드니모닝헤럴드는 꼬집었다.

○호주 경제에도 부정적 영향 미쳐

반(反)아시아 정서가 확산되면서, 2~3년 전부터 호주를 찾는 아사아인이 줄어드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주로 아시아인 비중이 높은 유학생이 감소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호주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호주 유학산업 규모는 2011년 155억1000만달러에 비해 4.8% 감소한 147억6800만달러를 기록했다. 2010년 173억5000만달러에 비하면 15% 가까이 줄었다. 호주의 유학생시장 규모는 석탄과 철광석, 금 수출에 이어 단일 수출 품목으로 네 번째로 크다. 그만큼 호주 경제에 상당한 타격을 주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한국인 폭행 사실이 알려지면서 한국 관광객들도 호주를 꺼리고 있다. 호주 관광청 집계를 보면 호주를 방문한 한국인 관광객 수는 2010년 21만4000명에서 2011년 19만8000명으로 줄어들었으며, 지난해도 전년 대비 소폭 감소한 19만6800명을 기록했다. 2009년 3만5000명이던 한국인 유학생도 지난해 2만6000명으로 감소했다. 매트 와드 시드니모닝헤럴드 수석 칼럼리스트는 “한번 손상된 명성이 회복되지 않고 있다”고 분석했다.

호주 정부는 인종차별 범죄가 호주 전체에 대한 이미지 추락으로 이어질까 전전긍긍하고 있다. 샘 개러비츠 주한 호주대사는 “호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에서도 가장 안전한 5개국 중 하나로 2011년 강도범죄 신고 건수 조사에서도 OECD 36개국 중 7번째로 치안이 좋은 것으로 나타났다”며 “호주범죄연구소에 따르면 호주 내 외국인 유학생이 폭력범죄나 강도 피해를 당하는 비율이 호주인에 비해 높지 않다”고 강조했다.

강영연 기자 yyka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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