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서양화가 조범제 "겸재의 진경산수, 기필코 서양화체로 완성할 터"

입력 2013-05-20 09:39  

[김성률 편집국장] 짧은 봄이 무르익어 다소 덥다고 느껴지는 오후, 최근 경기도 연천 임진강 주변에서 서울 한복판 강남으로 작업실을 옮긴 조범제 화백을 만나러 가는 길에는 벌써 이마에 땀이 흘렀다. 조 화백에 대해서 사전에 알고 있는 지식이라고는 그가 독립운동가의 자손이며 누드, 풍경, 정물화의 대가라는 것이었다. 그의 작품들은 아름답고 몽환적인 점묘화법으로 표현되어 독창적이라는 것이 세간의 평가이기도 하다.

독립운동가의 자손과 누드, 자못 잘 연결되지 않는 두 개의 단어를 머리 속에서 조합하며 5층 그의 작업실에 들어섰을 때 하얗게 세어 긴 머리카락을 올백으로 넘기고 콧수염과 턱수염을 허옇게 길러 마치 길을 떠나는 선지자의 모습을 한 그가 일어서면서 인사를 건네 왔다. 

"임진강 부근에서는 6년을 지냈지요. 작품활동을 하기에는 물론 한적한 지방이 좋겠지만 전시회를 하려면 불편한 점이 많아요. 개인전이라는 것이 대개 인사동 중심으로 열리잖아요. 물론 서울에서 지내자니 복잡하기는 하죠"

'올해 말 대구에서 개인전을 가질 계획'이라는 조화백은 그동안 크고 작은 전시회를 30회나 가졌다. 그중에서도 개인전은 약 20여회에 이른다. 첫 개인전이 1987년 서울 예성화랑에서 열렸고 2012년도에 아산병원 갤러리에서 스물 두 번째 개인전을 열었으니 거의 매년 개인전을 개최한 셈이다. 뿐이랴 각종 국제전과 초대전, 단체전에는 300여 회나 참가했다고 하니 그는 거의 작품활동에만 매달려오며 왕성한 예술혼을 불태우며 살아온 셈이다.

조 화백이 건네주는 여러 종의 개인전 팸플릿 중에 유독 금강산 연작전이 눈에 띄었다.  2008년도에 개최된 <금강산 연작전>에는 20여 종에 가까운 작품들이 전시되었는데 크기 또한 작지 않아서 대작은 가로의 길이가 2미터에 가까운 194.3cm에 이르렀다. 


조범제 화백은 분명 서양화가인데 그의 그림은 마치 동양화를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 왔다. 독특하면서도 깊이 빠져드는 듯한 필치, 마치 먹을 갈아 한 올 한 올 정성들여 동양화를 완성한 듯한 작품이 서양화로 다시 되살아나는 느낌이다. 동양화의 필치가 더해진 듯한 그의 작품들은 보고 있을수록 빠져들고 두고두고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을 것 같다. "이런 작품이라면 집에 하나 꼭 걸어두고 싶다"는 느낌도 들었다.

"금강산은 1996년와 1997년도에 두 번 다녀왔죠. 스케치도 많이 했고 사진도 많이 찍어왔어요. 금강산 작품전만 세 번을 했습니다. 지금도 금강산을 그리고 있고 한국의 자연을 그리고 있습니다"

사전에 알고 있던 것과 달리 그는 금강산 연작에 깊은 애정을 갖고 있었고 나아가 우리나라의 명산들을 작품화 하면서 그만의 화풍을 정립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한국의 진경산수를 완성하려고 해요. 우리나라 동양화의 진경산수를 서양화 화하는 것이죠. 한국의 명산을 진경산수체로 완성하는 일이 아버지 형제들의 독립운동을 기록화로 제작하는 것과 함께 제 필생의 과업인 셈입니다"  

진경산수의 서양화 화와 독립운동의 기록화. 얼핏 듣기에는 둘 중 어느 하나라도 제대로 완수하기에는 너무 벅찬 일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 대목에서는 두 가지 이야기를 구분해서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진경산수(眞景山水)는 조선 후기인 18∼19세기에 성행했던 화풍이다. 진경산수란 한 마디로 산천에 있는 모습을 그대로 그리는 산수화다. 그래서 ‘실경산수’라고도 불린다. 진경산수는 조선 숙종 때부터 영ㆍ정조 때까지 유행한 화풍이라고 한다. 겸재 정선에 의해 시작된 진경산수는 뒤를 이어 심사정, 이인상, 강세황, 김홍도, 이인문 등 수많은 화가들이 추구했는데, 특히 정선과 김홍도의 작품이 탁월한 필치와 화면으로 이름이 높았으니 진경산수는 겸재가 시작하여 김홍도와 함께 꽃을 피운 우리 민족 전통의 화법인 셈이다.

조 화백은 서양화가이면서 왜 동양화의 진경산수에 눈을 돌린 것일까? 그리고 그 배경에는 어떤 동기가 있었던 것일까? 조 화백은 천안 단국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서양화를 가르치고 있는데 이 대목에서 그의 짧은 강의가 시작된다.

“사실화를 시작하면 자기화풍이 정해지게 됩니다. 물론 적지 않은 작업량에서 나오는 것이죠. 반복된 작업에서 영감이 나오는데 자기화풍이란 것은 하늘이 알려주는 것도 아니고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자신의 정신세계가 잡혀야 하는 것이죠.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것은 작업에 불과하죠. 정신이 담겨야 제대로 된 작품활동을 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

그의 말에 의하면 “내면이 정리되고 추구하는 가치가 고고할수록 훌륭한 예술작품이 나온다”는 것이다. 즉 이상향을 꿈꿔야 그림 또한 그 방향을 따라간다는 이치다.

“서양미술에서 최고의 경지는 필력(筆力) 곧 붓의 힘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동양미술에는 그보다 한 가지가 더 있죠. 그것이 바로 기운생동입니다. 그림공부를 해보면 정신세계의 완성이나 해탈이 와야 합니다. 그림이란 정의하기를 조물주가 모든 우주를 창조했지만 화가는 신이 창조한 창조물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는 행위를 닮아가는 것이죠. 그래서 예술가의 작품은 전 우주에 단 한 점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쯤되면 화가를 인터뷰하러 온 기자는 철학강의를 듣고 있는 셈이 되었다. 그가 말하는 ‘기운생동(氣韻生動)’이란 기운이 충일하다는 의미로 중국 회화의 작풍에서 최고 이상으로 삼았던 말이다. 즉 그림을 그릴 대상의 기질이나 성격이 화면에 생생하게 표현되는 것을 뜻하는 것이니 그림에 정신이 포함되어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좋을 것이다.

조 화백의 말인즉슨 “화가는 자기만의 ‘풍’을 만들어 가는데 이 ‘기운생동’의 이치를 알아야 접근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예술에 정신세계가 내포되어있지 않으면 기능에 불과하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그의 이야기는 조금 더 이어진다. “작가라면 ‘독만서 만리행로’를 해야합니다. 책은 끝없이 읽고 공부를 해야 정신세계가 깊어지고 정신의 깊이가 깊어야 비로소 기능을 높일 수 있는 것이죠”

조범제 화백은 1954년생으로 올해 예순의 나이. 서울 돈암동에서 태어났다. 알려진대로 그는 독립운동가 집안의 후손이다. 부친은 1954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이자 2대 국회의원을 지낸 조시원 선생이며 모친은 역시 독립운동가인 이순승 여사의 4남2녀중 2남이다. 그의 집안에서만 모두 열 한 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고 하는데 첫째 큰아버지가 조용하 선생이며 둘째 큰아버지가 유명한 조소앙 선생이다. 셋째 큰아버지 조용주 선생, 넷째 큰아버지 조용한 선생, 고모 조용제 여사, 누나 조순옥 여사는 모두 독립운동가였다. 매형인 안춘생 선생은 안중근 의사의 종질로 제5대 광복회 회장과 독립기념관 건립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한 바 있다.

최근 업적이 재평가가 되고 있는 조소앙 선생은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을 처음 지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상해임시정부가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처음 사용한 의미는 왕정에서 공화제로 이행한 중요한 첫걸음”이라고 한다.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의 논문에 의하면 “당시 임시정부 내부에서 왕정복귀의 주장이 적지 않았지만 신석우와 조소앙, 여운형의 반대로 공화제인 대한민국으로 국호를 정할 수 있었던 것이며 망명정부였지만 민권의식이 성장했던 결과를 반영한 것”이라고 밝힌 적이 있다.


여하튼 조소앙은 을사조약 후 도쿄 우에노 공원에서 유학생들 모아 역적들과 일진회 규탄 대회 열고 퇴학 당한 이래 임시정부 외교부장으로 카이로선언, 포츠담선언에서 한국의 독립을 보장 받고 전국 최고 득표로 2대 국회의원에까지 당선되었지만 아쉽게도 625동란시 납북되어 결국 평양의 애국지사 묘역에 잠들 때까지 평생 독립운동을 해온 애국지사다.

이야기가 많이 돌았지만 조 화백의 출생과 성장환경은 그의 작품활동과 작품세계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의 성장배경은 “아버지 형제들의 독립운동을 기록화로 제작하는 것이 그에게 필생의 과업이 된 이유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다. 그는 우리나라의 민족수난사를 기록화로 되살리고 전시회를 치르기 위해 회원들이 항일운동사 전문교수에게 교육을 받고 사실적인 묘사로 역사를 정리하는 취지의 대한민국민족정기미술회의 회장으로 모임을 출범 시킨 바 있다.  

“우리나라는 역사기록화가 정립되어있지 않아요. 그러나 어느 나라나 자기의 역사를 잘 기록해 놓습니다. 중국에는 공산당혁명기념관을, 러시아는 레닌그라드전승기념관을 세워서 뼈아픈 역사를 잘 기록, 정리해 놓았죠. 하지만 우리나라는 최소한의 기록화는 물론 전시회조차 잘 열리지 않습니다”

“만주에 가서 김좌진 장군의 생가에 가도, 헤이그의 이준열사기념관에 가도, 상해의 윤봉길기념관엘 가도 제대로 된 그림이 없었다”는 조 화백은 기록화로 역사적인 사실을 남겨 놓고자 했다. 예를 들자면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거를 고증받아 기록화로 남겨 놓으면 후세에 역사적인 사건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불특정 다수의 기록화가 제각각 다른 기념관에 섞여 있어 특정화된 전시회나 기념관이 없다”고 생각한 그는 민족의 역사를 기록화로 만들려는 22명의 미술인을 규합했고 2000년, 독립기념관에서 <한국독립운동기록화특별전>을 개최하기도 했다. 그러나 기록화 전시회는 2회를 개최한 후 멈춰서고 말았다.


“좋은 취지였고 의욕도 높았죠. 하지만 작가들이 기록화에만 전념할 수는 없었죠. 작업을 계속하려면 사업예산도 필요하고 공동작업실 같은 것도 필요한데 현실은 그렇지 못한 거죠”
당시 보훈처 등의 후원을 받고자 했지만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외국의 경우 기록화 1점을 그리는데 10년 이상의 시간이 걸리는데 그것은 국가적인 지원이 있다는 것이고 우리나라도 그 같은 점들을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조화백은 백범기념관 개관시 500호짜리의 대작 ‘김구선생진격도’를 그렸다. 6개월간 밤을 새우다시피 작업 한 이 거작은 백범이 19세 때 동학에 입교 후 동학군 대장으로 500명의 부하를 이끌고 해주성을 공격하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이 작품에서 백범은 백마를 타고 ‘선봉’이라는 깃발을 들고 용맹스럽게 진격을 한다. 

2011년 이동녕생가기념관 개관시에는 이동녕의 영정을 그렸다. 또 이동녕을 포함 28명의 임시정부 대표가 회의하는 장면을 그린 작품을 완성했다. 각각 나이가 다를 때 촬영한 사진들을 모아 젊은 시절의 나이에 맞춰 그리느라 적지 않은 고생을 했다고 한다.

조 화백은 5살 때 서울대 미대에 다니던 다섯째 누나로부터 그림을 배웠다고 한다. 초등학교 때에는 그의 재주를 눈여겨 본 미술선생이 일요일마다 고궁으로 데리고 다니며 그림을 그리도록 했다고 한다. 저학년 때부터 적지 않은 상을 받으며 미술에 접한 그는 중학교에서도 미술부활동을 하며 두각을 나타냈고 고등학교 시절에는 원로작가인 변시지 선생에게서 사사받으며 그의 미술활동에 큰 영향을 받았다.

조 화백은 우여곡절 끝에 미술공부를 더 할 목적으로 미국행을 선택한다. 1985년 시애틀에 자리를 잡은 그는 그곳에서 사실화를 많이 그렸다. ‘한국에서 야외스케치를 워낙 많이 다녔기에 풍경을 다 외울 정도’였던 그는 한국의 평야와 들녘을 그렸다. 상설화랑인 런닝스 갤러리(Runnings Gallery)를 포함해서 3회의 개인전을 열었다. 미국에서 그의 작품들은 후한 평가를 받았다.


“미국에 머무를 때 작품활동이 잘 되지 않으면 잔디를 깎기도 하고 낚시를 했죠. 배를 타고 나가서 우럭이나 도미를 잡았어요. 그리고는 모두 놔주었죠”

“이역만리 외진 곳에 혼자 머무르며 작품활동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에는 낚시를 하며 세월을 낚기도 했다”는 그는 미국에서 한국에 있을 때 느끼지 못한 우리의 자연에 다시 매달리게 되었다. 그리고 한국의 자연을 조범제의 화풍으로 정립하겠다고 마음먹었고 ‘진경산수’를 떠올리게 된 것이었다.

결국 그는 고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1994년 전시회 개최를 위해 한국에 나왔다가 지금의 부인을 만난 것이었다. 당시 그의 나이 41세 부인의 나이 38세. “부인의 첫인상이 예쁘고 좋았다”고 고백한 조 화백은 “늦게 만났으니 다른 커플보다 두 배 세 배 더 행복하게 살자”고 약속하고 결혼후 한국에 정착하게 된다.

불현 듯 민족적인 정서를 갖고 있는 그가 왜 누드화로도 이름이 높은 지 의아해졌다. 누드라는 것은 미술의 한 부분이기는 하지만 그가 지향하는 진수산경의 서양화 화나 역사기록화와는 거리가 있지 않은가?

“그림은 면과 선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까? 화가는 평생 면과 선을 그리는 거에요. 그런데 ‘선’의 연습에는 누드크로키가 가장 좋아요. 세계적인 대가들도 일주일에 한 두 번은 반드시 누드크로키를 그립니다. 한때 크로키를 같이 그리는 모임을 갖기도 했고 누드크로키만으로 전시회를 갖기도 했죠”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자신도 계속 배우고 있다”는 그는 자신만의 화풍을 정립하며 독특한 예술세계를 지향하고 있다.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고 앞으로도 자유롭게 창작활동을 하려고 합니다. 금강산과 한국의 자연을 그리는 일도 게을리 해서는 안되겠죠”

미술계에 새로운 화풍을 정립하고자 하는 조범제 화백. 아직도 필생의 업을 이루기 위해 창작활동에 몰두하고 있는 조 화백은 어쩌면 탄생 300주년을 맞은 조선시대의 화가 표암 강세황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표암은 78년의 인생중 60년을 무명으로 살았지만 70세에 대한민국학술원격인 기로소에 들어갔고 사후에는 시, 서, 화에 모두 능한 ‘시서화삼절’로 추앙받았다고 한다.

“저녁을 먹고 가라”는 조 화백의 권유를 사양하고 5층 계단을 걸어 내려오니 기온은 많이 떨어져 있었다. 평생 예술혼을 불태워 온 예술가와 함께 예술과 인생에 대해서 논하고, 덧붙여 우리 역사의 한 조각이라도 다시 맞추어 보는 기회까지 얻게 되었으니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조 화백이 금강산 연작을 계속 그리기 위해서는 꼭 다시 금강산을 찾아 스케치를 할 수 있어야 할텐데…” 주제 넘는 생각을 하는 동안 어느새 시원해 진 바람이 불어왔다. 신록이 참 푸르게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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