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인터뷰] 유시찬 "요즘 유행하는 '힐링'은 임시방편, 근본적인 치유는 깨달음이죠"

입력 2013-05-26 17:17   수정 2013-05-26 23:14

안식년을 남을 위해 보내고 있는 유시찬 전 서강대 이사장

학우도 경쟁자로만 보는 대학생
성적과 취업에 매달려 황폐해져
모두가 자기 인생의 주인이 돼야



지난 3월 서강대 이사장에서 퇴임한 유시찬 신부(59)는 요즘 바쁘다. 지난 4월 삶의 목적과 좌표를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을 위한 에세이《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한국경제신문)를 출간한 이후 여러 매체와의 인터뷰, 방송 출연, 대중강연이 이어져서다. 지난 9일 홍익대 근처에서 연 북콘서트에는 150여명의 학생들이 몰려 성황을 이뤘다.

유 신부는 가는 곳마다 “마음의 이력서, 마음의 스펙을 쌓으라”고 강조한다. 대학에 있으면서 취업과 성공을 위한 ‘스펙 쌓기’에 찌든 청춘들을 너무나 많이 봐온 탓이다. 유 신부는 이사장 시절에도 청년들과 소통하는 신부로 유명했다. 이사장 퇴임 이후 1년 동안 주어진 안식년을 자신보다 남을 위해 바치고 있는 유 신부를 경기 양평군의 한 기도처에서 만났다.


▷책을 보니 청년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절절합니다.

“서강대만 해도 자질이 우수한 학생들이 많은데 막상 대학에 들어와서 하는 거라곤 족보 외워서 시험 보고 스펙 쌓고 취업하는 일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다 보니 패기와 생기가 넘쳐야 할 젊은이들이 찌들고 짓눌린 채 긴장 속에서 방황하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이런 현실을 바꿔보자는 생각을 화두처럼 붙들고 살았죠. 기성세대들이 같이 고민하고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학생들의 상황이 어느 정도로 심각한가요.

“한 대학의 학과에서 공부를 3등 하는 학생이 1등 하는 친구한테 노트를 빌려달라고 했는데 빌려주지 않았어요. 그러자 그 학생의 사물함을 부수고 노트를 꺼내 가는 게 폐쇄회로TV(CCTV)에 포착됐죠. 이쯤 되면 학우나 친구가 아니라 상대를 전부 경쟁자로 보는 거 아니겠어요? 친구가 A학점을 받으면 나는 B학점을 받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거죠. 이런 풍토가 KAIST를 비롯한 대학가의 잇단 자살 사건을 불러온 겁니다.”

▷청춘은 언제나 고민투성이인데 왜 유독 요즘 젊은이들이 더 힘들어할까요.

“전반적인 사회 여건이 더욱 물질화되고 경제 일변도로 치우친 탓 아닐까요. 성적, 시험, 취업, 승진을 위해 지식을 축적하는 공부만 치열해져서 학교는 물론 가정과 사회, 나라 전체가 점점 황폐해진 결과예요.”

유 신부는 그래도 희망을 놓지 않는다. 대학에는 건강하고 올바른 학생들도 많기 때문이다. 사실 고통과 방황은 길을 찾는 과정에서 누구나 겪는다. 유 신부 자신도 적잖은 방황 끝에 길을 찾은 사람이다. 일찍부터 법관의 꿈을 키운 그는 서울대 신문학과와 고려대 법대 대학원을 나왔다. 하지만 연례행사처럼 사법시험에서 줄줄이 낙방했다. 생활을 위해 법원 공무원으로 일하면서도 고시공부를 계속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군대 말년에 개신교를 믿기 시작했으나 뜻밖에도 길은 다른 곳에서 열렸다.

▷가톨릭을 만난 사연이 재미있던데요.

“강릉법원 산하 동해등기소장으로 일하던 1987년이었습니다. 여직원이 보고 있던 책이 이해인 수녀의 두 번째 시집 《내 영혼에 불을 놓아》였는데 그걸 보고 큰 충격을 받았어요. 등기소장하면서 인간관계 때문에 상처를 많이 받아서 술 담배를 심하게 했을 때였는데, 그런 내 영혼의 상태가 새카맣다면 시집에 드러난 이해인 수녀의 영혼은 새하얗게 느껴졌어요. 도대체 가톨릭이 어떻게 하기에 영혼을 이토록 순수하게 만드나 싶었죠.”

▷이른바 ‘늦깎이’ 수도자인데 많은 수도회 가운데 왜 예수회를 선택했나요.

“그때만 해도 학자가 되고 싶은 열망이 강했어요. 그래서 성인전(聖人傳) 두 권에 실린 성인들 가운데 학자 성인의 전기를 다 읽어보고 나서 보나벤투라 성인(1221~1274)을 세례명으로 택했죠. 보나벤투라 성인은 프란치스코회 3대 총원장을 지낸 분인데 토마스 아퀴나스에 버금가는 신학자였거든요. 한마디로 예수회 수도자가 되면 서강대 교수가 될 수 있다는 ‘흑심’을 품었던 거죠, 하하. 하지만 지식인의 허구성, 지식이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는 없다는 걸 깨닫고 교수의 꿈은 일찌감치 접었어요.”

유 신부는 책에서 지금 많은 사람들이 처한 고통과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책으로 마음공부를 제시한다. 물정 모르는 넋두리라는 비판이 나올 법도 하다. 유 신부는 그러나 고통스런 상대방을 위로하는 것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고통스러운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저는 힐링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치유는 필요하고 중요하지만 요즘 회자되는 힐링은 임시방편적인 게 대부분입니다. 근본적인 치유를 위해서는 깨달음을 얻어야 합니다. 그건 위로와 토닥임만으로는 되지 않아요. 스스로 고통의 의미를 깨달아야 인간됨이 깊어지고 성숙하게 됩니다. 다만 한 가지 꼭 명심해야 할 것은 그런 고통을 초래했다고 자책하거나 자기 부정, 자기 혐오, 죄의식에 빠지지는 말자는 겁니다.”

▷하지만 각자 처한 상황은 자기 책임 아닙니까.

“자기를 너무 구석으로 몰지는 말자는 겁니다. 상황이 안 좋으면 그저 날씨가 바뀐 정도로 이해하면 됩니다. 날씨가 좋아도, 천둥 번개가 쳐도 태양은 언제나 떠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통에 함몰되지 말고 어떻게 그 고통을 생명으로 바꿔낼 것인지, 고통과 함께 살아갈 것인지에 집중해야 합니다.”

▷행복이 화두가 된 시대입니다.

“살기 어려우니까 행복에 대한 열망을 더 키운 것 같아요. 하지만 뭐가 정말 행복인가 고민해봐야 합니다. 돈, 명예, 권력이 있으면 행복인가. 좋은 직장에 몸매를 잘 가꾸는 것이 행복의 길인가. 과연 그럴까요.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외적 조건이 아니라 인간의 깊은 내면, 영혼이 충족돼야 진짜 행복을 누리게 된다는 걸 자각해야 합니다. 사실 이게 돈 벌고 권력 쥐는 것보다 어렵고 그 과정도 길어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쉬운 길을 택하고 결국 후회하죠.”

▷그러자면 용기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같은 열차를 타고 가면서 방향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어도 중간에 뛰어내릴 용기를 내기란 쉽지 않지요. 그러나 어렵더라도 용기를 내지 않으면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얼마 전 신문을 보니 진취적으로 주인의식을 갖고 사는 여성을 뜻하는 ‘진주녀’라는 말이 있더군요. 자기가 하고 싶은 일, 의미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면서 자기를 성장시키는 20대 여성을 뜻하는 말인데 ‘이거야말로 진짜 희망이다’ 싶었어요. 우리 모두가 인생 내내 ‘진주녀’ ‘진주남’이 돼야 합니다. 의식혁명을 위한 사회 전반의 운동이 필요합니다.”

유 신부의 책에는 하느님이나 예수님이 거의 나오지 않는다. 대신 유교의 성(誠), 노자의 도(道), 불교의 불이(不二) 같은 이야기들이 수시로 등장한다. 인터뷰를 하는 책상 위에도 명나라 사상가 왕양명(王陽明)의 어록인 《전습록(傳習錄)》이 놓여 있었다. 책을 보다 뒤집어 둔 모양이다. 유 신부는 “진리는 하나인데 다만 각자 다르게 표현할 뿐”이라며 “유교적 관점이나 불교적 관점이 가톨릭 신앙을 심화시키는 데 도움이 되지 결코 해가 되진 않는다”고 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탈권위적 행보가 신선해 보였습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예수회는 신앙과 정의에 대한 봉사와 가난한 자를 위한 우선적 선택을 슬로건으로 내세우고 있는데 교황님은 이런 게 내면화된 분입니다. 신앙은 개인적인 행복과 평안만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정의와 함께 가는 겁니다. 그게 신앙과 삶의 일치입니다. 힘 없고 가난하며 보잘 것 없는 사람들에게 우선 봉사할 수 없다면 희망을 찾기 어렵습니다.”

▷국내 종교는 어떻습니까.

“교회만 보자면 신부가 먼저 회심(回心:마음을 돌이켜 먹음)해야죠. 신부 하나가 바로 서면 그 영향력은 절대적이니까요. 신자들도 교회에서 미사 드린 후 집에 가면 여느 사람과 같이 사교육, 재테크, 취업 등에 골몰하지요. 신앙인이라면 각자 깨어나 신앙과 삶이 괴리되지 않도록 해야죠. 대부분 공감하면서도 행동하지 못하는 건 절실함을 못 느껴서 그래요.”

▷갑을 논쟁이 한창입니다.

“짐 콜린스가 쓴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라는 책을 읽고 엄청 감동했어요. 기업 경영은 세속적인 것인데도 이 책에 담긴 논리는 신학이나 영성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세상에 좋은 기업은 많습니다. 포천 500대 기업 중 위대한 기업은 12개뿐입니다. 이들 기업의 최고경영자는 천박하게 돈에 초점을 두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 미치다 보니 돈은 부수적으로 따라오더라는 게 이들 기업 경영자의 공통적인 이야기입니다.”

유 신부는 “기도는 뭐를 해달라는 간구(懇求)가 아니라 수행”이라고 말했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신부님은 지금 어디에 서 있느냐”고 물었다.

“어정쩡한 자리에 있는 것 같아요. 아는 것도 아니고 모르는 것도 아니고, 깨달음을 깊게 얻은 것도 아니고…. 깨달음이나 내 존재의 완성을 향해 가는 길 위에 있는 존재라고나 할까요. ”

양평=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

■ 유시찬 신부는 누구

서울대 신문학과, 고려대 법대 대학원 출신의 엘리트 사제다. 사법시험에 잇달아 낙방한 뒤 법원 행정직 공무원으로 일하던 중 1987년 이해인 수녀의 시집 《내 혼에 불을 놓아》를 읽고 가톨릭에 귀의했다. 1990년 36세의 늦깎이로 예수회에 입회해 일본 상지대 유학을 포함한 7년의 공부 끝에 1997년 사제가 됐다. 예수회 ‘말씀의 집’ 원장에 이어 서강대에서 예수회공동체 원장, 서강대 교육사도직위원장, 이사장을 역임했다.

유시찬 신부는 종교로 인한 학문과 수행의 닫힘을 경계하면서 폭넓은 사유를 추구한다. 불교 유교 도교 등 타 종교의 가르침에도 귀를 열고 소통한다. 크고 작은 영성 모임뿐만 아니라 젊은이들을 위한 ‘청년 토크’ 강연을 갖는다.

안식년이 끝나면 내년 4월부터 전남 순천의 예수회 영성센터에서 피정 지도를 맡을 예정이다.《한 영신수련》《없는 것마저 있어야》《밤과 낮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가운데》《길》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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