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문장의 교양] (12) "그녀를 보내줘야만 했어.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입력 2013-07-05 14:48  


사랑의 본질에 대해

아버지 대신 성에 갇힌 벨이라는 여인과 그녀를 사랑하는 야수의 이야기를 그린 디즈니 애니메이션 <미녀와 야수>를 보면 가슴 아픈 이별의 장면이 나옵니다. 벨이 아버지를 그리워한다는 것을 알고 야수가 그녀를 놓아주는 장면입니다. 벨을 보내며 야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녀를 보내줘야만 했어.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기 때문에 보내준다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이렇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야수의 저 말은 사랑이란 게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슨 소리냐고요? 좋습니다. 오늘은 ‘사랑’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한번 생각해보죠.

<미녀와 야수>에서 야수는 원래 훈남 왕자였습니다. 어느 요정이 건 마법 때문에 야수가 된 것이죠. 마법을 풀 열쇠는 진정한 사랑이었습니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자신도 그 사람에게 사랑받으면 야수는 다시 왕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야수는 과연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을까요? 곰곰이 생각하면 요정이 내건 조건은 참 짓궂은 것이었습니다. 왜냐고요? 일단 이렇게 물어보죠.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인가요?



“너 자신과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을 결코 단순히 수단으로 취급하지 말고,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 대우하도록 행위하라.” -이마누엘 칸트



사람을 수단화하지 말고 목적으로 대하라는, 정언명령이라는 이름의 이 명제는 사랑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돈 때문에, 배경 때문에, 어떤 조건 때문에 사랑한다면 우린 그걸 진정한 사랑이라고 하지 않죠. 대상이 수단화되어 있으니까요. 가령 누군가를 돈 때문에 사랑한다면, 그 사랑의 대상은 돈이지 상대방이 아닙니다. 상대방은 돈을 얻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죠. 생각해보세요. 두 연인이 대화를 나눕니다. “널 사랑해” “왜?” “너희 아버지가 부자니까!” 아이고. 저들의 관계가 이 다음에 어떻게 될지는 안 봐도 뻔합니다. 진정한 사랑이란 상대방을 향한 순수한 목마름입니다. 상대방 외에는 아무런 목적도 이유도 없는 사랑. 어떤 일이 있어도 상대방을 수단화하지 않는 사랑. 그런 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라고 불릴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야수는 참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된 셈입니다. 요정이 정한 게임의 룰이 뭐였죠? 마법을 풀려면 사랑을 하라는 것이었죠. 잘 생각해보세요. 야수는 왜 사랑을 해야 하죠? 왕자로 돌아가기 위해서입니다. 사랑은 마법을 풀 열쇠입니다. 결국 야수는 누구를 사랑하든 그를 수단화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요정이 만든 이 게임에선 사랑이 애초에 목적(마법을 푼다는)을 이룰 ‘수단’으로 설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야수는 마법을 풀고 자기 자신을 되찾길 원하죠. 그를 위해서는 사랑을 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누굴 사랑하든 그건 진정한 사랑이 아니게 됩니다. 마법을 풀기 위한 수단화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야수는 진정한 사랑을 할 수도, 마법에서 풀려날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요정은 얼마나 짓궂은가요. 야수를 빠져나올 길이 없는 미궁에 가둬두고 밖으로 나오라고 하고 있습니다. 사랑을 해야 목적(왕자로 돌아가는 것)을 이룰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목적이 있는 한 진정한 사랑은 불가능합니다. 그렇다고 진정한 사랑을 하기 위해 목적을 버리면 이제 사랑을 해야 할 이유가 없게 됩니다. 야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야수는 어떻게 했나요? 사랑하는 그녀를 떠나 보냈죠? 이제 이 행동의 의미를 살펴볼 차례입니다. 철학자 헤겔에 따르면, 사랑이란 ‘자기임’을 포기하고 자신을 타자 속에서 완전히 상실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자신을 잃어버리는 깊은 늪과 같습니다. 이는 우리가 사용하는 말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사랑을 말할 때, 우린 사랑에 ‘빠졌다’고 표현하죠? 영어권에서는 ‘falling in love’라고 말합니다. 깊은 숲 속을 걷다 미처 발견하지 못한 웅덩이에 “빠져버리고 마는 것”, 사랑이란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 ‘사랑을 한다’는 말은 사랑의 본질을 제대로 드러내주지 못합니다. 사랑은 내가 능동적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사랑이란 빠지고 떨어지고 추락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나 사랑에 빠.져.버.리.고.야. 말았어.” 그러니 사랑은 단순한 떨어짐이 아니라 차라리 죽음 같은 것입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누구나 사랑 안에서 죽습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 이제 예전의 자신은 없으니까요.

셰익스피어가 쓴 비극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의 죽음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상대방을 잃었다고 생각했을 때, 그들은 더 이상 살 이유가 없었습니다. 사랑에 빠진 그들은 이미 자기 자신을 상대방 속에서 잃어버린 후였으니까요. 마치 하나뿐인 보석을 보석상자에 맡긴 것처럼요.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으니 이제 자신 또한 영영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보석상자와 함께 보석도 사라진 것이죠. 그러니 로미오와 줄리엣은 서로가 죽은 순간 이미 함께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자살을 했나요? 아닙니다. 그들은 상대방이 죽음으로써 동시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줄리엣의 죽음이 로미오를 죽이고, 로미오의 자살이 줄리엣을 죽이고. 그들은 상대방의 죽음이라는 살인행위에 의해 타살된 희생자들이며, 그들의 자살은 그러한 타살의 결과적 현상일 뿐입니다. 아직 어린 로미오와 줄리엣은 주어진 생의 길이를 거슬렀으나, 그 역행은 사랑의 본질에 순응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랑의 참된 본질은 자기 자신의 의식을 포기하여 자신을 다른 자기 속에서 망각하는 데 있으며, 이러한 소멸과 망각을 통해 비로소 처음으로 자기를 소유하고 점유하는 데 있다.” -헤겔



헤겔의 말을 한마디 더 덧붙여보죠. 그는 셰익스피어보다 훨씬 긍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사랑이 가져오는 상실의 밤을 알았지만 그 후에 찾아오는 회복의 아침도 알고 있었습니다. 사랑에 빠지면 자기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하지만 그 자기상실을 통해 오히려 본래적인 자기를 찾을 수 있습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결국에는 상대방보다 자기 자신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됩니다. “아픈 만큼 성숙한다”는 통속적인 말처럼요. 사람은 사랑 속에서 자신을 잃지만, 또 그 사랑 덕분에 진짜 자기를 만나게 됩니다. 자기상실과 자기발견의 역설. 사랑이 신비스러운 일인 이유입니다.

너무 멀리 돌아왔나요? 이제 다시 괴로워하는 야수 이야기로 돌아가죠. 그는 어떻게 했나요? 마법을 풀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벨을 그냥 보내줬죠. 벨을 옆에 두었다면 그는 아마 마법에서 풀려날 수 있었을 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았나요? 그는 마법에서 풀려나지 않아도 좋을 정도로 벨을 사랑한 것입니다. ‘벨이 행복할 수 있다면 난 아무래도 좋아!’ 야수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벨을 만나기 전까지 야수에게 전부는 왕자로 돌아가는 것이었지만, 이제 그에겐 벨이 전부입니다. “그녀를 보내줘야만 했어.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 말대로 야수는 벨을 사랑했고, 그래서 그녀를 보내줬습니다. 벨을 보냈다는 건 야수가 왕자로 돌아가기를 포기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그녀의 행복을 위해 자신이 살아가는 유일한 목적을 포기했습니다. 이는 그가 벨을 향한 사랑을 수단화하지 않았으며, 자기 자신을 그 사랑 안에서 완전히 상실했음을 알려줍니다. 그는 그녀를 보내줌으로써 자신의 사랑이 진짜임을 입증했습니다. 야수는 이제 진정한 사랑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헤겔의 말처럼 자기를 포기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자기 자신을 되찾게 될까요? 쉽게 말해, 야수는 다시 왕자가 될 수 있을까요? 글쎄요. 저 영화의 결말이 어땠는지 다시 한번 보고 싶어지는군요.

김영수 S·논술 인문 대표강사 ysjad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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