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활자와 인쇄혁명

입력 2013-07-17 17:30   수정 2013-07-17 20:44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구텐베르크의 아버지는 조폐국에서 일했다. 당시 금화는 문양을 새긴 펀치로 금덩어리를 때려서 만들었다. 구텐베르크는 이를 응용한 주형을 만든 뒤 금속활자를 개발했다. 그는 이를 나무틀에 하나씩 심어서 조판하기로 했다. 문제는 종이에 찍어내는 방법이었다. 고민하던 그의 눈에 양조장의 와인압착기가 들어왔다. 와인을 만들기 위해서는 포도를 압착해야 했는데, 활판을 인쇄기에 세게 눌러서 종이에 찍는 원리를 여기에서 발견한 것이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발명은 지난 1000년 동안 일어난 인류의 10대 사건 중 1위로 꼽힌다. 그만큼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그때까지는 책이 귀족의 전유물이었다. 성경을 필사할 수 있는 권한도 가톨릭 수도원만 가졌다. 1455년 라틴어판 ‘구텐베르크 성경’이 출판되기 전까지는 한 권 필사하는 데 2개월이 걸렸다. 그런데 500권을 인쇄하는 데 1주일도 걸리지 않게 됐다. 책이 널리 보급되자 문자문화의 영향력이 확산됐고 지식의 대폭발이 일어났다.

활자와 인쇄혁명은 종교개혁에도 불을 댕겼다. 1517년 루터가 면죄부 판매의 부당성을 지적하며 비텐베르크 성(城) 교회 문에 붙인 반박문은 활판인쇄를 타고 순식간에 50여만부나 배포됐다. 종교개혁의 시작이었다. 그 전에도 인쇄가 없었던 건 아니다. 중국에서는 6세기에 목판인쇄가 등장했고 11세기에는 찰흙으로 구운 교니활자도 나왔다. 우리나라 최초의 금속활자본은 고려 인종 때(1230년)의 ‘상정예문’이지만 실물은 전하지 않는다. 그래서 1377년의 ‘직지’가 세계 첫 금속활자본으로 공인됐다.

그런데 구텐베르크의 성서보다 80년이나 앞서 금속활자를 발명한 우리나라에서는 왜 인쇄혁명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많은 요인이 있지만 가장 큰 문제는 문자계급에 의한 지식의 독점이었다. 성현의 가르침은 대량 복제하지 말고 붓글씨로 정성들여 쓰면서 배워야 한다는 유교적 세계관이 작용했다. 서예가 발달한 나라에서 인쇄술이 힘을 못 썼다는 얘기도 그래서 나왔다. 활자 주조와 인쇄를 중앙 관청이 맡았던 것도 이 때문이다. 인쇄술을 통해 대중에게 지식을 널리 보급한 서양과는 대조적이었다. 앞선 기술은 가졌지만 사회변화까지 이끌지는 못했으니 ‘금속활자를 가장 먼저 발명한 게 우리’라고 자랑하는 것도 멋쩍다.

‘직지’보다 138년 이상 앞선 증도가자(證道歌字) 11개가 어제 추가로 공개돼 눈길을 끌었다. 그간의 진위 논란에도 마침표를 찍을 유물이라니 관심이 크다. 만약 세계 활자사를 새로 쓰게 된다면 이를 계기로 활자뿐만 아니라 기술과 사회혁신의 진정한 의미까지 되돌아 볼 일이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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