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를 위한 미술산책] "임신부는 보지 말라"…재현 거부하고 인상 포착한 이단아들

입력 2013-08-09 17:36   수정 2013-08-09 22:13

정석범 문화전문기자의 CEO를 위한 미술산책 (8) 회화의 혁명, 인상주의



“이 그림은 대체 뭘 그린 거지. 맞아 이건 틀림없이 인상이야 인상. 화가는 그림 속에 뭔가 인상을 표현한 게 틀림없어, 어휴 저 붓질한 꼬락서니라니… 정말 힘 하나 안 들이고 마구 그려댔군. 벽지 초벌그림도 이것보다는 나을 걸.”

1874년 무명작가전에 출품된 클로드 모네의 ‘해돋이 인상’을 본 비평가 루이 를루아는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올 지경이었다. 명암법, 원근법 등 회화의 기본 규칙을 하나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네뿐만이 아니었다. 폴 세잔, 오귀스트 르누아르, 에드가 드가도 버젓이 ‘불량스러운’ 그림을 출품했다. 를루아는 일간지 ‘샤비레’에 기고한 전시리뷰에서 이 반항적인 화가들의 전시를 ‘인상주의자들의 전시’라고 지칭하면서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때부터 모네를 비롯한 전시 참가자들은 인상주의자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으로 불리게 됐고, 그들이 그린 그림은 인상주의라는 별명을 얻었다. 어떤 신문에서는 임산부가 이 해괴한 그림들을 보고 충격받아 유산할 가능성도 있으니 관람을 자제하라는 내용의 만평을 게재했을 정도였다.

기존의 회화원리를 거부한 인상주의가 출현한 데는 여러 가지 사회, 경제적 배경이 숨어 있다. 인상주의가 출현한 19세기 후반은 산업혁명으로 인해 공장을 중심으로 대도시가 형성됐고, 새롭게 부를 축적한 중산층이 등장한 시기다. 이로 인해 소비문화가 생겨나고 여가를 즐기는 풍조가 폭넓게 확산됐다. 이런 변화하는 사회 환경에 발맞춰 예술가들도 새로운 사회상을 반영하고, 신흥계층의 기호를 반영한 새로운 미술을 고민하게 된다. 특히 이런 움직임에 기름을 부은 것은 19세기 전반 등장한 사진술이었다.

전통적 회화의 제1목표가 대상의 사실적 재현이었는데 사진이라는 괴물이 화가보다 더 정확하게 대상을 재현할 수 있게 되면서 화가들이 설 자리를 잃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생존권의 위협을 느낀 것은 당연했다. 재능이 없는 화가들은 서둘러 사진기술을 배워 사진사로 변신했고, 재능 있는 화가들은 사실적 재현 대신 주관적 감성을 무기로 삼는 새로운 미술을 꿈꿨다. 또 항상 숭고하고 영웅적이거나 고상한 주제에만 매달려야 하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형태와 색채의 하모니가 발산하는 순수한 조형적 아름다움을 실현하려 했다. 인상주의는 그런 시대적 필요성을 절감한 진보 성향의 젊은 화가들의 모임 중 하나였다.

인상주의자들은 우리 눈에 보이는 대상은 일조량과 기상 여건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변하기 때문에 화가는 세부 묘사에 얽매이기보다 주제의 핵심을 빠른 붓놀림으로 포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빛은 그림의 분위기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이젤과 캔버스를 들고 야외로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모네는 항상 여러 개의 이젤을 세워놓고 빠른 속도로 그려나갔는데 보통 30분에 한 작품을 완성했다고 한다. 인상주의자들은 또 물감을 가급적 팔레트에서 섞지 말고 원색을 캔버스 위에 나란히 병치해 그것이 감상자의 눈에서 섞이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검정색 사용을 터부시했다.

그러나 인상주의자 내부에서도 새로운 회화 방향을 두고 의견이 엇갈렸다. 인상주의가 탄생하는 데 산파 역할을 했던 에두아르 마네는 검정색을 덕지덕지 캔버스에 발라댔고, 드가는 야외작업을 극단적으로 혐오했으며 전원 풍경보다 파리의 도시 풍경을 즐겨 그렸다.

인상주의자들은 전통 회화 규율에서 벗어나 예술의 자유를 얻었지만 대신 배고픔과 처절한 대결을 벌여야 했다. 모네는 이집저집 돌아다니며 생활고를 호소했고 그런 친구를 불쌍히 여긴 르누아르는 바게트 빵을 들고 모네의 집을 찾았다고 한다. 카미유 피사로 역시 방세가 비싼 파리를 벗어나 시골 농가에 정착, 허리띠를 졸라맸다.

그런 그들에게 화상 폴 뒤랑 뤼엘은 구세주였다. 그는 인상주의의 가능성을 내다보고 이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한편 런던과 미국에서 전시회를 열어 대중의 관심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덕분에 르누아르는 1879년부터 형편이 나아졌고, 모네는 1880년부터 고소득자가 됐다. 반면에 알프레드 시슬레는 1899년 빈곤 속에서 쓸쓸히 숨을 거뒀다.

서양회화의 역사는 인상주의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인상주의의 등장은 획기적 사건이었다. 그것은 예술사의 코페르니쿠스적 반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림은 이제 주제보다 조형성을 더 중시하게 되고, 예술의 주도권도 주문자가 아닌 작가가 행사하게 됐다. 인상주의는 현대미술의 출현을 예고하는 신호탄이었다.

정석범 기자 sukbumj@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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