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의 인물] 황순원 "작가는 작품으로 말할 뿐"

입력 2013-09-13 17:08   수정 2013-09-13 21:30

경제와 문화의 가교 한경



“나는 소설가로 족하다. 작가는 작품으로 말할 뿐, 더 이상 다른 말은 하지 않는다.”

한국 현대문단의 거목 고(故) 황순원 선생이 대학에서 준다는 박사학위도, 정부의 문화훈장도 거절한 이유였다. 선생은 70년 문학인생에서 시와 소설 이외에 일체의 ‘잡문’을 남기기 않았고, 공직도 맡지 않았다. 일제 식민 지배와 전쟁, 분단으로 점철된 현대사의 격랑 속에서 ‘낙락장송’ 혹은 ‘백학’으로 불리는 까닭이다.

선생은 1915년 평안남도 대동의 지주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스케이트와 바이올린을 배울 정도로 유복했던 그는 평양 숭실중학교에 다니던 1931년 잡지 ‘동광’에 시(詩) ‘나의 꿈’으로 등단했다. 일본 와세다대에 유학 중이던 1937년 발표한 단편 ‘거리의 부사’ 이후 소설가로 변신했다. 대학 졸업 후 귀국해서는 서울중·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42년 일제의 압박이 심해지자 낙향해 작품활동에 전념했다. 이 시기에 쓰여진 작품들은 선생이 월남 후 출간한 소설집 ‘기러기’(1951)에 실렸다. 1953년 국민소설 ‘소나기’ 발표 이후 내놓은 장편 ‘카인의 후예’(1955)로 아시아자유문학상을 받았다.

선생은 1957년 경희대 교수로 직장을 옮기고, 학술원 회원이 됐다. 이후 정년퇴임 때까지 23년간 이른바 ‘황순원 사단’이라 불리는 후학들을 양성했다. 소설가 전상국 조세희 한수산, 시인 정호승 등이 그들이다. 1985년 산문집 ‘말과 삶의 자유’를 끝으로 몇 편의 시를 발표했을 뿐, 소설은 더 이상 쓰지 않았다. 매년 이어지던 제자들의 새해 인사를 한사코 마다했던 2000년 초가을, 선생은 추석 나흘 연휴 마지막 날 눈을 감았다. 13년 전 오늘, 선생의 나이 85세였다.

백승현 기자 argo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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