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를 위한 미술산책] 대통령부터 노숙자까지 마시는 코카콜라가 예술이 될까

입력 2013-10-18 21:20   수정 2013-10-19 04:50

(17) 앤디 워홀과 팝아트



1964년 뉴욕의 어퍼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의 ‘미국 슈퍼마켓’전을 보러 전시장에 들어선 관객들은 할 말을 잊었다. 작품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 전시장에는 동네 슈퍼마켓에서 볼 수 있는 깡통 식품과 상품 광고의 포스터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포스터가 아니라 6명의 팝아트 작가들이 그린 작품이었다. 그중에서도 앤디 워홀(1928~1987)이라는 애송이 화가의 작품은 관객들을 어이없게 만들었다.

그는 미국 서민들이 가장 즐겨 먹는 캠벨 수프 깡통을 똑같이 옮겨 그렸기 때문이다. 더 기가 막힌 것은 그 포스터에 1500달러의 가격표가 붙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그 앞에 있는 진짜 캠벨 수프에는 워홀의 사인만 해놓고 6달러에 판매한다는 점이었다.(물론 슈퍼마켓에서 직접 사면 이보다 더 싸게 단돈 29센트에 살 수 있다) 누가 이걸 살까 의문을 갖겠지만 놀랍게도 대중은 1500달러짜리 포스터를 사기 위해 지갑을 열었다. 바야흐로 팝아트 시대에 돌입한 것이다.

팝아트는 1950년대 영국과 미국에서 동시에 발생했지만 본격적으로 대중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1960년대 미국에서였다. 당시 미국 미술계는 잭슨 폴록이 주도한 액션페인팅(추상표현주의)과 그를 흉내내 캔버스에 페인트통을 들이붓는 아류들이 판을 쳐 대중으로부터 외면당하고 있었다.

팝아트 작가들은 네온사인, 옥외광고판, 매스미디어 등 대중문화에서 차용한 이미지를 재현해 대중의 호응을 얻었다. 추상에서 탈피해 다시 구상미술로 돌아오긴 했지만 그들은 대량 소비시대의 산물인 통조림, 햄버거, 포장 상자, 향수병 등 친숙한 상품, 마릴린 먼로, 엘비스 프레슬리 같은 대중스타의 이미지를 주된 테마로 삼았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워홀은 만화 이미지를 차용한 작품으로 유명한 로이 리히텐슈타인과 함께 팝 아트 최고의 스타로 떠올랐다.

워홀은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는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선천적으로 병약한 체질을 타고나 어린시절 침대에서 보내는 때가 많았다. 학교에서도 따돌림을 당하던 그는 어머니 치마폭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마마보이였다. 고립된 생활에 침잠하던 그에게 위안을 준 것은 팝뮤직과 할리우드 영화였다. 대학에서 상업미술을 전공한 그는 상품디자인에서 일찍부터 재능을 드러냈다. 그의 성장과정과 직업 경력 속에 이미 팝아트 작가로서의 자질이 자연스럽게 배양되고 있었던 셈이다.

대중이 워홀의 작품에 열광한 데는 추상표현주의에 대한 염증 외에 코카콜라로 대변되는 미국 소비문화의 특수성도 한몫했다. 미국에서는 최고의 부자도 가장 가난한 사람과 마찬가지로 코카콜라를 소비한다. 대통령도, 거리의 부랑자도 똑같은 품질의 똑같은 콜라를 마신다. 부자만을 위한 특별한 콜라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만큼 팝아트는 폭넓은 지지기반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팝아트에 묘사되는 상품들은 감각적인 디자인, 현란한 색채, 매끈한 질감을 지닌 것들이 많아 대중의 욕망을 충족시키기에 충분했다.

워홀은 전통 미술에 존재하고 있던 엄숙주의를 완전히 탈색시키려 했다. 그는 마치 공산품을 만들 듯 작품 제작과정에서 작가의 인위적인 손길을 완전히 배제하고 실크스크린 기법을 도입해 대량 복제를 꾀했다. 우리에게 친숙한 ‘마릴린’ ‘마오쩌둥’ ‘더블 엘비스’ 같은 작품들은 그런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다. “예술은 비즈니스”라고 큰소리치던 그가 미술품을 만들어내는 공장이라는 의미의 ‘팩토리’를 설립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는 팩토리에 희대의 괴짜들을 불러 모아 작품 아이디어를 이들과의 브레인스토밍을 통해 얻어냈다. 구체적인 작업은 조수의 몫이었다. 그는 팩토리에서 다양한 실험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대중 스타에 열광하던 그는 마침내 자신도 스타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는 유명 인사들과의 만남을 즐겼을 뿐만 아니라 틈만 나면 영화에 출연했고 텔레비전에 얼굴을 내밀었다. 그러나 승승장구하던 그에게 늘 행운만 따른 것은 아니었다. 1968년 그는 팩토리의 일원인 한 여성에게 총격을 받아 치명상을 입는다.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그는 평생 후유증에 시달렸고 1987년 그로 인해 숨을 거뒀다.

팝 아트 컬렉터인 필립 존슨은 “미술의 책무 중 하나는 사람들로 하여금 세상을 즐겁게 바라보도록 만드는 것”이라며 “팝아트는 이런 일을 시도한 유일한 예술사조”라고 극찬했다. 그의 말은 결코 틀리지 않았다. 오늘도 관객은 여전히 앤디 워홀과 팝아트에 열광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석범 문화전문기자 sukbumj@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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