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덤 스미스에 동조한 英귀족…특권 포기하고 자유무역 시대 열다

입력 2013-11-01 21:01   수정 2013-11-02 05:27

스토리&스토리 - 세계경제를 바꾼 사건들 (7) 곡물법 폐지
한국경제·한국제도경제학회 공동기획

1815년 영국서 도입된 곡물법…수입 곡물에 높은 관세 부과
보호정책의 어리석음 지적하며 反 곡물법 운동일어나 결국 폐지
英, 유럽국가와 상업협정 맺어…10년 새 교역량 5배 늘어…기계 수출로 산업화도 촉진




곡물법(Corn Law)은 1815년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외국의 값싼 곡물 수입으로부터 자국 곡물 생산자를 보호하기 위해 도입됐다가 1846년 폐지됐다. 영국과 아일랜드는 곡물법에 따라 여러 종류의 수입 곡물에 대해 높은 관세를 부과했다. 정치적으로 강력한 힘을 지녔던 지주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곡물 소비자들의 이익을 희생시킨 특권적 법률이었다. 그런 점에서 곡물법 폐지는 자유(무역)주의의 승리를 상징하는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1839년 반(反) 곡물법 동맹이 영국 맨체스터의 방직업자 리처드 코브던, 퀘이커 교도인 존 브라이트의 주도로 결성됐다. 이들은 ‘보호’정책의 어리석음을 밝히고, 국제적 거래 자유와 곡물법 폐지를 요구하며 자신들과 입장을 같이하는 선거 후보자들을 지지하는 운동에 나선다.

코브던도 이런 운동 덕분에 의원으로 당선돼 당시 토리당을 이끌며 곡물법을 지키는 선봉이었던 로버트 필 총리와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필은 자유무역의 일반적 원칙들을 수용했지만 농업은 예외라고 보았다. 곡물시장의 개방은 상업적 이익을 넘어서는 사회적 불안을 창출하며, 곡물법 아래에서도 영국의 제조업은 경쟁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코브던은 1845년 무렵부터 곡물법이 농부와 노동자들에게 미치는 폐해에 대해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곡물법 아래서는 농지를 개량해도 지대 인상으로 끝난다. 농지개량이나 투자의욕이 사라져 저생산성과 빈곤이 만연한다. 도시의 노동자들도 높은 곡물가격으로 살기 힘들다. 곡물법 폐지가 임금을 올릴 것이다. 토리당은 봉건적 특권을 포기하라.”

고전학파의 임금철칙설을 믿었던 필은 곡물가격 하락이 임금도 낮출 것이라고 보았지만 코브던의 주장에 동의하게 되면서 자유무역이 반드시 임금 인하로 귀결되지는 않음을 인정했다. 필은 결국 곡물법 폐지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바꾸었고 이에 따라 토리당의 분열을 가져왔지만, 필을 따르던 귀족-지주의 대다수가 곡물법 폐지에 찬성 투표함으로써 곡물법은 1846년 마침내 폐지됐다.

곡물법 폐지는 흔히 영국에서 지주-귀족 계급이 몰락하고, 신흥 부르주아지가 의회 진출을 확대하면서 자신들의 이해를 추구한 결과로 설명되고 있다. 그러나 곡물법 폐지를 애덤 스미스 등 자유무역 사상의 영향을 빼고서 설명하기는 어렵다. 코브던은 스미스의 자유무역 사상의 추종자였다.

그럼 지주·귀족 출신 정치가들은 왜 자신들의 이해를 해치는 곡물법 폐지를 지지했을까. 우선 1832년의 1차 선거법 개정은 피선거권을 확대했지만 지주·귀족들의 정치적 권력을 위협할 정도는 아니었다. 당시 영국 의회의 절대다수는 지주·귀족 출신이었다. 이들이 곡물법 유지에 따른 이해관계가 약화된 것은 사실일지 모르지만 여전히 그들의 기득권은 농지에 있었다. 그런데 왜 이들 가운데 다수가 곡물법 폐지 결정에 찬성한 것인지는 사상적 동조를 빼면 설명할 수 없다.

필 총리가 아일랜드의 기근을 해결해야 하는 현실적 이유 때문에 곡물 수입이 필요해 곡물법 폐지로 돌아섰다는 설명도 있지만, 기근 해결을 위해서라면 왜 즉각 폐지하지 않고 3년에 걸쳐 서서히 폐지하는 정책을 택했는지 설명이 안된다. 더구나 필은 논리를 중시하는 사람이었다. 코브던의 경우에도 그가 열렬한 스미스 찬미자였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곡물법 폐지보다는 섬유업의 이해에 중요한 품목들의 관세인하를 시도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1846년 곡물법 폐지 이후 영국은 코브던의 활약 아래 전쟁 준비 소문 등의 악재를 극복하고 프랑스와 지금의 자유무역협정(FTA)격인 상업협정을 맺었다. 1870년 무렵엔 유럽 27개국과 유사한 협정을 마쳤다. 그 결과는 엄청났다. 이들 국가와의 교역은 10년 전인 1860년에 비해 총교역량이 82%(총수입은 86%, 총수출은 77%) 증가했다. 유럽 이외의 지역까지 고려한 영국의 총수입은 1850년 약 6000만파운드에서 20년 뒤 약 3억6000만파운드로 5배 이상 늘어났다. 1840년 5000만파운드 선이던 총수출은 1870년 2억5000만파운드로 4배 이상 증가했다. 당시는 금본위제여서 물가상승이나 하락이 거의 없던 시절이었다. 1874년 영국 가정의 식단에는 평균 매일 식빵 재료 2.5파운드, 0.75파운드의 설탕이 외국산이었고, 1주일마다 베이컨 0.8파운드, 버터 0.5파운드, 치즈 2.5파운드, 쌀 1파운드, 차 0.3파운드가 외국에서 실려 왔다. 인구는 1841년 이후 1870년대 초까지 17.5% 증가했지만, 빈곤율은 25% 이상 감소했다. 영국 교역국들의 국민도 비슷한 혜택을 누렸다. 또 직물기계를 비롯한 영국의 선진 기계들도 수출돼 수입국의 산업화가 촉진됐다.

1849년엔 항해법이 폐지됐으며, 동인도회사 등 특허 회사들이 누리던 무역독점권뿐 아니라 거의 모든 관세가 폐지됐다. 그래서 당시 영국과 유럽에서 벌어진 엄청난 변화의 원인을 곡물법 폐지로만 돌리기는 어렵다. 그러나 고전적 자유주의자 스미스의 ‘자연적 자유의 간단한 시스템’을 국제무역에 적용해 거둔 놀라운 결과로 보는 데는 무리가 없다. 곡물법 폐지 전후를 비교한 애시워스는 이렇게 말했다. “종전에 겪던 굶주림은 소위 (국가의) ‘보호’로부터 비롯됐지만, 상업의 자유가 풍성한 식량과 고용을 가져다 주었다.

인류는 한 가족이며 서로의 평안을 위해 서로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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