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워싱턴=장진모 기자 ]

“미국 중앙은행(Fed)이 테이퍼링(tapering·양적완화 축소)을 시작할 때 신흥국과 사전 교감이 없었다. 통화정책의 국제 공조가 깨졌다.”(라구람 라잔 인도 중앙은행 총재)
“Fed 의장과 부의장이 지난 1년간 신흥국 중앙은행장들을 8~10차례 만났다. 이는 엄청난 조율이다.”(벤 버냉키 전 Fed 의장)
라잔 중앙은행 총재와 버냉키 전 의장이 10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브루킹스연구소에서 열린 ‘글로벌 통화정책’ 세미나에서 설전을 벌였다. 라잔 총재는 기조연설자로 연단에서, 지난 1월 말 퇴임해 브루킹스연구소 선임연구원으로 자리를 옮긴 버냉키 전 의장은 청중석에 앉아서였다.
○라잔 “Fed, 신흥국 고려해야”
라잔 총재는 기조연설 내내 Fed의 정책을 조목조목 비판했다. 그는 “Fed의 양적완화와 초저금리 정책이 장기화하면서 집단으로 몰려다니는 양떼 근성의 국제투자자금이 신흥국으로 몰려왔고 이제 금리가 오르면 다시 빠져나갈 것”이라고 했다. 미국의 일방적 통화정책이 신흥국 금융시장을 위협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국제 투자자금의 양떼 근성은 금융 규제로 쉽게 막을 수 없다”며 “양떼는 금리가 오를 것을 직감하면 더 빠르게 움직이고 시장 혼란을 가중시킬 것”이라고 우려했다. 지난해 6월 버냉키 전 의장이 전격 테이퍼링을 예고하는 바람에 신흥국 자금이 대량 이탈하면서 통화가치가 급락한 것을 염두에 둔 발언이다.
라잔 총재는 양적완화의 이익보다 비용이 더 크다고 주장했다. 그는 “양적완화가 미국 경제에 도움을 주는 것보다 나머지 나라에 더 많은 피해를 준다면 그 정책을 계속 펴야 하는 것이냐”며 “양적완화가 길어지면서 부작용이 증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미국이 신흥국의 환율시장 개입을 비판하고 있는 데 대해서도 쓴소리를 했다. 라잔 총재는 “신흥국은 환율시장에 개입해 경쟁력 있는 환율을 유지함으로써 무역적자를 막고 외환보유액을 더 쌓아야 한다. 이것이 신흥국이 그동안 배운 교훈”이라고 했다. 선진국이 양적완화로 자국 통화의 평가절하를 유도하고 있는 만큼 신흥국은 환율 개입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버냉키 “신흥국과 충분히 소통”
라잔 총재의 기조연설이 끝난 뒤 청중석 맨 앞줄에 노타이 셔츠 차림의 버냉키 전 의장이 손을 들고 일어섰다. 그는 “라잔 총재의 강연에 대해 몇 가지 말하고 싶다”며 반론을 제기했다.
그는 우선 Fed가 신흥국 중앙은행과 자주 소통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어 “만약 양적완화가 없었더라면 신흥국 경제가 지금보다 더 좋아졌을까”라는 반론을 펼치며 양적완화 효과에 대해 회의적 반응을 보인 라잔 총제를 공격했다.
버냉키 전 의장은 또 “당신은 아주 예리하게 양적완화와 환율 개입을 동일한 것으로 비유했는데 둘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고 지적했다. 양적완화는 글로벌 수요를 증대시키는 정책인 반면 환율 개입은 관세처럼 한 나라의 수요를 다른 나라로 방향만 바꿀 뿐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라잔 총재는 “당신 말이 맞다. 내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선진국이 양적완화의 파급효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라고 재반박했다.
이날 두 사람의 공방은 신흥국과 선진국을 대표하는 전·현직 중앙은행 의장 간의 논쟁으로 관심을 끌었다. 두 사람은 시종일관 비판적인 의견을 주고받았지만, 토론이 끝난 뒤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돌아갔다. 세미나를 마친 뒤 라잔 총재는 연단에서 내려와 버냉키 전 의장과 악수하며 “벤, 당신이 그리울 거예요”라고 말했다.
워싱턴=장진모 특파원 ja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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